최용철(전 고려대학교 중문과 교수) 진행/정리
최용철 : 장페이헝(章培恒)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연말연시에 바쁘신 가운데서도 이렇게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전화로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저희 한국중국소설학회에서 간행하는 『중국소설연구회보』에서는 지속적으로 국내외 저명학자를 중심으로 학자탐방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해외학자가 한국을 방문한 기회를 이용하여 인터뷰를 요청할 때도 있고 또는 해외 유학생에게 위탁하여 특별 방문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푸단대학(復旦大學)에 온 지도 반년이 다 되었습니다. 이제 귀국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아서 부득이 바쁘신 선생님을 찾아뵙고자 한 것입니다.
장페이헝 :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까? 지난여름 고려대 학술방문단이 푸단대학을 다녀간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벌써 그렇게 흘렀군요.
최용철 : 선생님의 학술 업적은 대단히 풍성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희 간행물이 『소설회보』이기는 하지만 선생님께서 일찍이 소설과 희곡 그리고 문학사 등에 대하여 다양한 연구 성과를 보여주시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넓은 범위의 학술연구 현황을 말씀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우선 선생님의 고향과 가정, 학업과정 등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페이펑 : 저의 고향은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입니다만 아주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상하이로 왔습니다. 아마 네 살쯤 되었을 때 일 것입니다. 그 후 초중고를 모두 상하이에서 다니고 1950년에 푸단대학을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신문학과를 다녔습니다. 다니다 보니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2학년 때 중문과로 바꿨습니다. 당시 규정에 3년이면 졸업이 가능하였지만 중도에 병을 앓은 적이 있어서 1954년 봄에야 졸업을 하게 되었지요. 졸업할 무렵에는 처음에 현대문학과 문학이론 등에 관심이 있었는데 1955년 대규모 정치운동인 후펑(胡風)반혁명집단에 대한 비판운동에 휩쓸리게 되었다가 후에 고대문학 쪽으로 연구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최용철 : 처음에는 현대문학에 관심이 많으셨군요.
장페이헝 : 네 그렇습니다. 사실은 지금까지도 현대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요. 하지만 당시 우리 학교에 쟈즈팡(賈植芳)선생이 이 운동에 휘말려 감옥에 가는 일이 생겨났지요. 사실 그는 평생 동안 다섯 차례나 옥중생활을 한 불행한 분이지요. 처음에는 대학생시절 항일운동을 하다가 첫 옥사를 치르고 종전이후 국민당 시절에는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옥사를 치르기도 했는데 1955년에는 반혁명의 이유로 11년간이나 긴 옥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1979년 이후에야 복권되어 연구와 강의활동이 가능했습니다.
최용철 : 그럼 선생님은 1955년 이후부터 고전문학에 종사하게 되었던 것인가요? 당시에는 어떤 교수님이 계셨던가요?
장페이헝 : 아니에요. 그 해는 도서관에서 근무를 했었고 1956년 가을부터 중문과에 돌아와 조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 푸단대학 중문과에는 고대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님이 여러분 계셨지요. 저의 지도교수는 쟝톈수(蔣天樞)교수였습니다. 장교수는 학문이 깊은 분이었지만 저술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 분은 천인커(陳寅恪)교수의 제자였습니다. 훗날 천인커(陳寅恪)선생의 문집을 그 분이 편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중문과에서 저에게 맡긴 업무는 선진양한(先秦兩漢)의 문학을 연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지도교수인 천(陳)교수는 이처럼 시대와 장르를 구분해서 하는 공부가 이상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나는 그 분의 지도 하에 역사서와 언어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또 목록학과 판본학에 대한 연구 등 비교적 넓은 범위의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희곡 등에 대한 관심이 일게 되었는데 장교수님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최용철 : 당시 50년대와 60년대에 중국에서는 집체적인 공동 작업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선생님은 어떤 작업에 참여하게 되셨는지요?
장페이헝 : 여러 작업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하나는 『이백시선집(李白詩選集)』 편찬에 참여했고, 또 하나는 『근대문학사(近代文學史)』편찬 작업에 참여한 바 있지요. 그 책은 중국에서 가장 이른 근대문학사의 하나였습니다. 후에 력대중국문학작품선(歷代中國文學作品選)과 중국문학비평사(中國文學批評史) 등의 공동 작업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최용철 : 중국문학비평사 분야는 푸단대학 중문과에서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 온 전공이 아니었습니까?
장페이헝 : 그렇지요. 하지만 제가 당시에 맡아서 썼던 부분은 후에 모두 없어졌습니다. 제가 맡았던 부분은 비교적 후대의 것인 청대(淸代)와 근대(近代)시기의 문학비평인데 문화대혁명 이전에 제1권이 나오고 아직 제2권과 3권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문혁(文革)이 터졌던 것이지요. 문혁기간 중에 제가 썼던 원고는 모두 없어졌습니다. 문혁이 지난 이후에 왕윈시(王運熙)교수 등이 계속하여 문학비평사를 집필하였고 저는 다른 작업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비평사작업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최용철 : 후에 선생님께서 희곡과 소설분야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작가와 작품을 연구하셨는지요?
장페이헝 : 1956년부터 희곡과 소설에 관심을 두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훙성년보(洪昇年譜)』를 쓰기 시작하여 여러 해 동안 진행되었고, 훙성(洪昇)의 기타 글에 대해서도 논문을 썼습니다. 소설 쪽에서는 문혁이전에는 견책소설(譴責小說)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고, 1980년 이후 수년 동안 소설연구에 집중한 적이 있는데 『요재지이』․『서유기』․『수호전』․『삼국연의』등에 대한 연구논문을 썼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방향을 돌려 명대(明代) 시문(詩文)에 대해 연구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중국문학사의 집필을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최용철 : 제가 알기에 선생님은 중국의 역대 금서(禁書)에 대해서도 책을 쓰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요? 그 책이 나온 후에 금서 방면에 관한 책이 출판계에 하나의 붐을 이루며 쏟아져 나오게 되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인지요?
장페이헝 : 예, 『금서대관(禁書大觀)』이란 책을 편찬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제가 쓴 내용은 많지 않습니다. 주로 당시 푸단대학과 베이징대학의 젊은 학자들이 참여하여 엮은 것입니다. 이 책이 나온 이후에 독자들로부터 상당히 폭넓은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학술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업성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당시 이 책의 판매량이 급증하자 많은 출판사에서 이와 유사한 책을 많이 편찬했던 것이지요.
최용철 : 사실 그 이전에는 금서에 관한 연구가 비교적 어려운 실정이 아니었습니까?
장페이헝 : 꼭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50년대 후반에 왕리치(王利器)선생의 『원명청삼대금훼소설희곡자료(元明淸三代禁毁小說戱曲資料)』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공을 들여서 만들어낸 역작이지요. 하지만 제가 편찬한 『금서대관』이 나온 이후 일시적으로 많이 읽힌 것은 사실 정치적인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그 무렵 천안문사태(1989년)이후 지식인들은 당시의 문화정책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역사상의 금서와 금서정책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 책은 전후 약 10만권 이상이 간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독자들은 금서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전제적인 문화정책에 대한 관심에 의해 이 책을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신조사(新潮社)에서 이 책의 금서간사(禁書簡史) 부분을 번역한 바 있는데, 번역자의 후기에서 이 책의 유행과 당시 천안문사태 이후의 중국 정치상황과의 상관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최용철 : 90년대 이전에는 중국 사대기서의 하나인 『금병매(金甁梅)』에 대해서도 전면적인 개방을 유보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일찍이 『금병매』국제회의에 참가하여 류후이(劉輝)회장이 당국의 이러한 보수적인 정책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 러시아에서 발굴된 『고망언(姑妄言)』도 타이완(臺灣)에서 배인본(排印本)이 나온 이후 대륙(大陸)에서 새로 찍는 과정에서 일부 외설부분을 빈 네모 자로 대신하면서 괄호 속에 몇 글자를 생략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밖에 당대의 새로 나온 작품 중에서도 출판이나 배포가 금지된 작품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장페이헝 : 저도 80년대에 『금병매(金甁梅)』에 대해 논문을 쓴 적이 있지요.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글로서는 비교적 이른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금병매』의 원본 열람이나 구입이 극히 제한된 고위층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만 오늘날 그러한 제한은 대체로 풀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작품의 경우, 부분적인 출판제한이 있다고 봅니다. 『고망언(姑妄言)』의 경우 뿐 만 아니라 상하이고적출판사에서 나온 『고본소설집성(古本小說集成)』에서도 일부 작품의 경우는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우선적인 가치판단은 문학적인 가치가 검증되지 않은 작품일 경우에 해당될 것입니다.
최용철 : 이제 선생님께서 그 동안 해 오신 『중국문학사』 편찬 작업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언제부터 문학사 저술 작업의 계획을 갖게 되셨는지요?
장페이헝 : 아마 80년대 초기였을 것입니다. 저는 이전의 문학사들이 이른바 정치적 각도에서 작품을 평가하고 서술하였으므로 전체적인 문학의 발전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점에 불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문학사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거지요. 하지만 그 작업자체가 방대한 것이기에 쉽게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가 후에 어떤 기관에서 독학 수험생을 위한 『중국문학사』의 편찬을 위촉하여 본격적으로 일부 학자들과 함께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독학자를 위한 책이었으므로 일반적인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써야 했는데 쓰다보니 실제로 많은 부분의 문학사적 관점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어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는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새로운 문학사로 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96년 간행된 『중국문학사(中國文學史)』는 이러한 성과의 하나로 나온 것인데 비록 새로운 견해를 상당부분 추가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기존의 관점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 책이 간행된 이후 학계와 일반 사회에 널리 환영을 받기는 했지만 우리 스스로는 여전히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서 다시 한번 새로 쓰기로 마음먹게 된 것입니다.
최용철 : 앞에 나온 『중국문학사』(3권)는 전후 얼마동안 시간을 들여서 편찬하게 되었던 것인지요? 또 새로 쓰는 『중국문학사신저(中國文學史新著)』는 언제부터 시작한 것이며 신구판 『중국문학사』의 주요 차이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페이헝 : 아마도 4년 정도는 걸렸을 겁니다. 사실은 구판 『중국문학사』가 간행될 무렵부터 새로운 『중국문학사』의 집필 작업이 시작되어 그 동안 꾸준히 진행되어 온 상태였습니다. 새 『중국문학사』는 이미 2권이 나온 상태이고 곧 제3권이 나오게 됩니다. 1996년판의 『중국문학사』에서는 문학의 형식이나 문학의 예술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신판 문학사에서는 문학의 형식문제와 예술성에 대해 대폭 보강하였습니다.
최용철 : 과거의 문학사에서는 사상적인 측면에 치중하여 문학작품을 평가하였는데 새로운 문학사에서 문학의 형식과 예술성에 주목한 것은 커다란 진전이라고 보여 집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문학의 형식과 예술적 성취와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십니까?
장페이헝 : 이른바 문학의 성취는 실제상 주로 문학의 형식에 의해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수호전』의 경우, 판본상으로 보면 내용이 더 많이 들어 있는 번본(繁本)과 내용이 축약된 간본(簡本)계통이 있는데 전반적인 줄거리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적 성취 면에서 보면 번본(繁本)의 것이 간본(簡本)보다 분명히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예술적 성과의 높고 낮음은 바로 문학의 형식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번본과 간본의 차이라는 것은 바로 형식상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최용철 : 그렇다면 중국문학의 독특한 형식은 한자(漢字)라고 하는 문자의 특성에서 오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장페이헝 : 그렇습니다. 중국문자의 특성에서 중국문학의 주요 장르인 시사(詩詞) 등이 발달한 것이며 문장의 경우도 그 영향을 받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중국 소설, 특히 백화소설의 경우 문자 상의 특성으로부터 받는 영향은 비교적 적다고 보며 세계 각국의 소설과 유사한 일반적인 특징을 함께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적인 특징은 시사(詩詞)분야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용철 : 중국문학의 발달과정에서 중국의 한족(漢族)과 주변 소수민족간의 교류에 의한 영향관계는 어떠하다고 보십니까? 예를 들면 서역(西域)이나 북방(北方)의 음악과 민속의 전래가 중국문학의 발달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지는 않으시는지요?
장페이헝 : 물론 그렇습니다. 음악의 전파와 중국문학에서의 시가(詩歌)발전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사(詞)의 형식은 중국음악이 기타 민족의 음악으로부터 영향 받아 변화된 이후에 나온 결과물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희곡의 발전에서도 그 영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최용철 : 지난 수천 년의 중국문학 발달과정에서 몇 차례의 전환기가 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전환의 시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장페이헝 : 제 생각에 만약 음악의 각도에서 본다면 당대(唐代)를 하나의 중요한 고조기(高潮期)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의 발전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사회적인 발전단계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금 전에 사(詞)의 발전을 예로 들었는데 음악의 변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 이외에 사회적인 변화에 따른 인간 감정표현의 기풍이 점점 확대되어 원래 전해오던 시(詩)의 형식만으로는 그것을 모두 용납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詞)라고 하는 새로운 시가형태의 장르를 통해 폭넓은 감정세계를 노래할 수 있게 했다는 얘기지요. 이처럼 새로운 형식의 문학 장르는 당시의 새로운 감정표현이 확대된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외부에서 전래된 음악의 변화와 결합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희곡과 소설의 발전도 역시 사회적 변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용철 : 지난여름 저희 방문단이 왔을 때 선생님께서 강연하신 근대문학의 시기와 개념 그리고 선생님의 『중국문학사』에서 언급한 근세문학의 개념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장페이헝 : 저는 1840년을 전후하여 근대문학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는 그 개념자체가 비교적 모호하다고 봅니다. 이처럼 역사적, 정치적 사건에 의한 시기구분법은 실제로 문학의 발전과정과 실제로 부합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근대문학의 연구대상으로 첫 인물을 궁쯔전(龔自珍)으로 잡고 있는데 만약 1840년을 기준점으로 삼는다면 그를 포함할 수 없습니다. 그의 대부분 작품은 그 보다 앞서서 씌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에 아편전쟁에 대해 언급하거나 그 시기에 까지 다루고 있는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대표작들은 대부분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씌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미 아편전쟁을 근대문학의 시작으로 잡는 시기구분법에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최용철 : 근대문학의 시기구분은 다분히 정치적, 역사적 입장에서 작의적으로 정해진 감이 없지 않습니다. 지난 수 십 년간 얼핏 보기에 이미 고정된 것 같이 보이는 이러한 시기구분법에 대해 최근 여러 학자들이 다른 견해를 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일부에서는 명말청초(明末淸初)를 근대문학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선생님의 경우는 금원지간(金元之間)으로 앞당겨서 근세문학이라는 용어로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 근대문학 혹은 근세문학이라는 용어와 개념에 대해 중국학계에서도 일치된 견해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선생님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장페이헝 : 근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념이 불분명한 상태입니다. 세계사의 구분법으로 말한다면 고대사, 중세사, 근세사, 현대사 등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일본 한학계(漢學界)에서는 중국에서 말하는 현대부분을 근대라고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일본 학자들은 메이지(明治)유신부터 그들의 근대가 시작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도(江戶)시대를 근세의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른바 근세는 봉건사회의 말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중국적 표현으로 본다면 자본주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전에는 근세와 근대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의 근대라는 것은 바로 현대(modern)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1840년을 근대라고 한 것은 세계사에서의 현대와도 다르고 일본에서의 근세와도 다른 비교적 독특한 구분법으로 완전히 정치적 고려에서 나온 개념이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근세문학(近世文學)은 일본학자의 근세와 유사한 것입니다. 근세이전에는 중세문학(中世文學)이 있었는데 중세는 진한(秦漢)으로부터 시작하여 금원지간(金元之間)에 이르는 비교적 긴 시기를 아우르고 있다고 봅니다. 진한이전을 고대문학(古代文學)이라고 생각하지요. 고대문학은 이른바 상고문학(上古文學)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문학 이전의 것은 모두 고대문학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용어상의 혼란이 적잖습니다. 80년대 이후 나온 『사해(辭海)』에서는 이미 이 점을 분명히 밝혀 두 가지 함의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용철 : 끝으로 선생님께서 주임을 맡고 계신 중국고대문학연구중심(中國古代文學硏究中心)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알기로 고대문학연구기관으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교육부의 중점기지로 선정되어 활동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또 선생님께서 소장을 겸임하고 계신 고적정리연구소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요?
장페이헝 : 그렇습니다. 1999년 연말에 교육부로부터 정식으로 선정되어 3년간의 연구계획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고대문학 연구중심은 지난해 새로 설립된 연구기관이고 고적정리 연구소는 80년대에 설립되어 17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연구인력으로 보면 대부분 고적연구소의 연구원이나 교수님들이 그대로 고대문학 연구중심으로 소속되었습니다. 현재는 두 기관이 동시에 존재하고 모두 제가 소장과 주임을 맡고 있지만 곧 고적연구소의 소장직은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고적연구소의 연구생은 좀 줄어들게 될 것이고 고대문학 연구중심이 확대 개편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재 연구중심에는 15명 정도의 전임교수가 있으며 고대문학, 고전문헌학, 한어문자학 등 세 가지 분야의 전공으로 박사연구생을 받고 있습니다. 공동 편찬 작업으로는 『중국문학통사』(4권)를 기획하고 있는데 이번에 나오는 『중국문학사』(3권)를 포함하고 1912년 이후 최근까지의 현대문학과 당대문학이 기술된 제4권이 합쳐져 이뤄지게 될 것입니다. 또 『중국문학사상사』의 편찬도 준비하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문학비평사에서는 이론과 비평을 위주로 하고 있지만 이 문학사상사에서는 문학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문학사상과 이론비평을 결합하여 만들어 내게 될 것입니다. 본 연구중심은 고대문학의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중국문학고금연변연구실(中國文學古今演變硏究室)이 설치되어 있어서 현당대(現當代) 문학도 연구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발전이 상호 연관성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최용철 : 귀 연구중심의 이러한 연구방법은 저희에게도 좋은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현대문학을 독자적인 발생의 입장에서 강조하였고 고전문학과의 상호 연관성을 극력 배제해 왔는데 이러한 방법을 지양하여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이 하나의 선상에서 변화 발전해 왔다고 보는 입장에서 특별히 중국문학고금연변연구실이 설치된 것은 외국에서 중국문학을 연구하는 저희 입장에서 볼 때 실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귀 연구중심의 대외교류 방면의 계획은 어떠한지요?
장페이헝 : 내년부터 해외학자를 단기방문으로 초청하여 이곳 연구중심에서 연구하도록 할 작정입니다. 홍콩 중문대학의 해외학자 단기초청 방안이 매우 좋은 제도로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들보다 경비 면에서 충족하지는 않지만 저희 연구중심에서도 이를 추진하고자 하며, 해외 대학이나 연구기관과 상호간의 방문연구를 통한 학술교류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본 연구중심의 질적 향상과 더불어 활발한 대외교류가 이뤄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최용철 : 앞으로 한중간의 국제학술교류가 더욱 늘어나길 기대하며 귀 연구중심을 통해 한국의 중국문학 연구자들이 귀국의 학자들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기를 바라겠습니다. 바쁘신 가운데 장시간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1.3.정리)
[엮은이 주: 이 글은 원래 『중국소설연구회보』 제36집(1998년 11월)에 실린 것을 엮은이가 수정 보완했다.]
부록(附錄)
<푸단(復旦)대학 중국고대문학연구중심(中國古代文學硏究中心) 소개>
푸단대학의 중국고대문학연구중심은 중국 교육부에서 정식으로 인가한 전국적인 고등교육기관 인문사회과학 중점연구기지의 하나이며 또한 전국에서 유일한 중국고대문학 연구센터이기도 하다.
중국 교육부에서는 인문사회과학 중점연구기지가 “과학연구의 전체적인 수준이 전국적으로 지도적인 위치에 있어야 하며 동시에 국제적으로 동일한 연구 분야에서 높은 명성을 갖추고 있어야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푸단대학의 중국고대문학연구중심이 중국 내에서는 이 분야에서 유일하게 공인된 지원기관으로 인정받은 것은 그 만큼 중국고대문학에 대한 기존의 연구 성과와 앞으로 연구 활동에 그 만큼 높은 점수를 받고 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이 연구중심에는 현재 중국고대문학, 중국고전문헌학, 중국언어문자학 등 세 분야의 전공분야가 설치되어 있으며 각각 대학원 과정이 설치되어 있다. 이 밖에도 논리학(인명학을 위주로 함)전공도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이 연구중심은 푸단대학 직속의 연구, 교육기관으로서 관련 학과 및 연구소와 긴밀한 상호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앞에서 밝히 세 가지 전공분야별로 보다 구체적인 학문특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중국고대문학(中國古代文學) : 21세기를 맞이하는 교체기에 중국고대문학의 연구는 전환기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차제는 이 연구중심에서는 국내외의 우수한 연구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본 연구중심의 주임인 장페이헝(章培恒)교수의 『중국문학사』와 이를 바탕으로 새로 쓴 『중국문학사신저(中國文學史新著)』는 고대문학 분야의 주요 성과로서 1999년 교육부에서 추천하는 중국문학사 교재가 되었다. 본 연구중심의 부주임인 황린(黃霖)교수 등이 공동 집필한 『중국문학비평통사(中國文學批評通史)』는 역대 비평사연구의 성과를 방대하게 집대성한 저술로 평가받아 국가사회과학상, 교육부 인문사회과학저작 일등상과 상하이시(上海市) 인문사회과학저작상 등을 받기도 하였다. 또 황린(黃霖)교수가 주편한 『중국고대문학이론체계(中國古代文學理論體系)』도 학계에서 중국고대문론(中國古代文論)에 대해 다방면에서 전환점을 이룬 성과로 인정받고 있다. 본 연구중심에서는 현재 선진시대부터 현당대(現當代)에 이르는 『중국문학통사(中國文學通史)』와 문학창작에서 본 문학사상을 다루게 될 『중국문학사상사(中國文學思想史)』 그리고 역사상 각 문학장르별 특징을 분석하여 문학론 자체의 체계를 분석하게 되는 『중국분체문학학사(中國分體文學學史)』 등의 공동 저술을 통해 중국문학의 고금연구와 문학사와 비평사를 아우르는 새로운 연구지평을 열어가고자 하고 있다. 문학연구에 있어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분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중국문학고금연변연구실(中國文學古今演變硏究室)을 두어 그 주임을 주원화(朱文華)교수가 맡고 쟈즈팡(賈植芳)교수를 고문으로 천쓰허(陳思和)교수를 겸임교수로 초빙한 상태다.
2. 중국고전문헌학(中國古典文獻學) : 본 연구중심의 중국고전문헌학 분야에서는 중국고대문학 연구와 협력하여 관련 문헌을 정리, 편찬하는 일을 맡고 있는데 우거(吳格)교수가 주편하는 대형 총집 『전명문(全明文)』의 편찬 작업이 진행 중이고 첸전민(錢振民)․차핑치우(査屛球)교수가 주관하는 고금중외(古今中外)의 중국고대문학연구론저색인(中國古代文學硏究論著索引)의 편찬 작업도 시작되었으며, 우진화(吳金華)교수의 『고문헌학개론(古文獻學槪論)』도 출판을 앞두고 있다. 이밖에 천광훙(陳廣宏)․탄베이팡(談蓓芳)교수가 주관하는 해외한학연구(海外漢學硏究) 프로젝트도 추진 중에 있다.
3. 한어언문자학(漢語言文字學) : 이 분야 전공은 중국 언어문자학의 고대한어(古代漢語)부분에 집중되어 있으며 우진화(吳金華)교수가 주관하고 있다. 주로 한어사(漢語史)의 훈고학과 고문헌교감학(古文獻校勘學)이 결합되어 연구되고 있는데 『삼국지교고(三國志校詁)』, 『세설신어고석(世說新語考釋)』 등이 출판되었으며 『삼국지』정리연구자료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삼국지총고(三國志叢考)』, 『삼국지신주(三國志新註)』, 『삼국지언어연구(三國志言語硏究)』 등 일련의 연구 성과를 낼 예정이다.
이 밖에도 이 연구중심은 인명학(因明學)연구에서도 중국 내에서 선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정웨이훙(鄭偉宏)교수의 『불가(佛家)논리학통론』과 『인명정리문논직해(因明正理門論直解)』 등의 저술이 학계의 각광을 받고 있으며 “한전불교인명연구(漢傳佛敎因明硏究)”가 1999년도 국가사회과학연구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연구되고 있다. 본 연구중심에서는 기관지 『중국문학연구』를 내고 있다.
[참고] 장페이헝(章培恒, 1934~ ) 교수 소전(小傳)
고전문학 연구가.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 사람으로 1954년 2월에 푸단대학(復旦大學) 중문과(中文系)를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중문과(中文系) 당지부(黨支部) 부서기 · 서기 등 직을 맡았으며 1955년에는 후펑(胡風)사건에 연루되어 격리심사를 받고 도서관으로 부임 당했다. 1년 이후에는 중문과(中文系)로 돌아와 쟝톈수(蔣天樞) 교수의 조교를 맡으면서 고전문학 연구에 종사하였다. 1960년에 강사로, 1979년에 부교수로 승급하였으며 동년에 일본 고베대학(神戶大學)의 초청으로 1년간 「중국문학사」 등의 과정을 강의하였다. 귀국 후에 교수로 승급하였는데 지금은 푸단(復旦)대학 중문과(中文系) 교수 · 고적정리연구소(古籍整理硏究所) 소장, 제이계국무원(第二屆國務院) 학위위원회(學位委員會) 어문학과조(語文學科組) 성원(成員), 국문원(國務院) 고적정리출판규획소조(古籍整理出版規劃小組) 성원, 중국작협(中國作協) 위원을 지내고 있다. 주요 저작으로는 『중국근대문학사고(中國近代文學史稿)』, 『중국문학비평사(中國文學批評史)』, 『중국력대문학작품선(中國歷代文學作品選)』, 『이백시선(李白詩選)』, 『통용대학어문(通用大學語文)』, 『훙성년보(洪昇年譜)』(上海古籍出版社, 1979), 『중국금서대관(中國禁書大觀)』(安平秋와 공동 주편, 上海文藝出版社, 1990), 『십대희곡가(十大戱曲家)』(주편, 上海古籍出版社, 1990), 『전명시(全明詩)(1~3)』(공동 주편, 上海古籍出版社, 1990~1994), 『헌의집(獻疑集)』(岳麓書社, 1993), 『중국문학사(中國文學史:상․중․하)』(駱玉明과 공동 주편, 復旦大學出版社, 1996)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金聖嘆的文學批評」(劉大杰과 공저, 『中華文史論叢』 1963년 제3집), 「論李伯元作品的思想傾向」(『光明日報』 1965년 6월 6일), 「關於李伯元作品評價的幾個問題」(『光明日報』 1966년 3월 13일), 「『聊齋志異』三合本序」(『聊齋志異』三會本 上海古籍出版社, 1978), 「『聊齋志異』寫作年代考」(『蒲松齡硏究集刊』 제1집), 「三國志通俗演義前言」(『三國志通俗演義』 上海古籍出版社, 1979), 「『辯奸論』非邵伯溫僞作」(『中國古典文學論叢』 上海人民出版社, 1980), 「關於洪升生平的幾個問題」(『復旦學報』 1980년 제3기), 「關於屈原生平的幾個問題」(『學術月刊』 1981년 제10기; 『中國古代近代文學硏究』 1981년 제23기), 「試論魯迅對中國文學遺産的觀點」(『魯迅誕生一百周年紀念集』 復旦大學, 1981), 「關於羅貫中的生卒年及其他」(『文學遺産』 1982년 제3기), 「施耐庵墓志辨僞及其他」(『中華文史論叢』 1982년 제4기), 「『儒林外事』原貌初探」(『復旦學報』 1982년 제4기), 「施彦端是否卽施耐庵」(『復旦學報』 1982년 제5기), 「『儒林外史』原本應爲五十卷」(『學術月刊』 1982년 제7기), 「關於施耐庵問題的爭論及施氏族譜」(『文匯報』 1983년 2월 21일), 「論『金甁梅詞話』」(『復旦學報』 1983년 제4기), 「試論“兩拍”的思想傾向」(『文藝論叢』 1983년 제17기), 「『海上花列傳』與其以前的小說」(日本 『淸末小說硏究』 1983년), 「百回本『西游記』是否吳承恩作」(『社會科學戰線』 1983년 제4기), 「晩淸譴責小說的思想傾向」, 「試論凌濛初的『二拍』」, 「關於魏晋南北朝文學的評價」(『中國古代近代文學硏究』 1987년 제3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