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姓
나는 성(姓)이 풍(豐)이다. 우리가 알기로, 성이 이 풍(豐)인 사람은 아주 적다. 내 고향 석문만에서도 우리 한 집만 있을 뿐이고, 밖으로 나가면 성이 같은 사람을 더욱 보도 듣도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성을 물어보고 나서 “드문 성이군요, 드문 성이예요”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어렸을 때 이 성의 암시를 받아서, 스스로 자기를 평범하지 않게 보는 심리가 매우 컸다. 그러나 단순히 풍씨 성이 희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석문만에서 풍씨 집안은 우리 집 하나 뿐이었고, 게다가 과거에 급제한 사람도 아버지 한 사람 뿐이었기 때문이다. 석문만에서는 성이 풍인 사람은 필시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고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필시 성이 풍인 사람이라고 모두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심부름꾼 저노오(褚老五)가 나를 안고 전통극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 “석문만에서는 다른 어르신은 없고 오직 풍씨 집안에만 어르신이 있지. 너도 크면 어르신이 되는 거야, 풍어르신!”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과거제도는 폐지되었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내가 열 살 때, 임시로 일하던 황반선(黄半仙)이 어느 날 저녁 큰누나에게 말했다. “신교두(新橋頭) 쌀집에 성이 풍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어디 사람인 지 모르겠어.” 큰누나와 어머니는 모두 아주 기이하게 여겨, 황반선더러 그 밤에 당장 가서 확실히 성이 풍인지, 어디 사람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성이 풍인 집이 또 있다는 건가, 가짜는 아닌가 하는 심정인 듯했다.
황반선이 돌아와 말했다. “확실히 성이 풍(豐)이예요. ‘양국수풍(養鞠須豐)’이란 말에서의 풍(豐)이예요. 사교(斜橋) 사람이라는데요.” 큰누나는 긴 담뱃대를 물고 “설마 정말이란 말야? ‘풍포사당(酆鮑史唐)’이란 말에서의 ‘풍(酆)’은 아니겠지?”라고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조사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내가 항주, 상해, 동경에 갔을 때 친구 중에서도 성이 같은 사람이 없어서, 풍씨는 정말로 나 한 사람 뿐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자신을 평범하게 보지 않고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풍씨 성의 특색을 조금이라도 성취하지도 못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이 풍이 아닌 사람과 똑같은 삶을 그럭저럭 살고 있다. 과거시험도 붙지 못했고, 도리어 이 괴상한 성으로 인해 누차 말썽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람들이 내게 “성이 무언가요?”라고 물어, 내가 “저의 성은 풍(豐)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대로 끝나지 않고 늘 몇마디 더 덧붙이려 하고, 혹자는 ‘풍(馮)’으로 잘못 알아듣기까지 한다. 여관이나 성문 입구에서 야간 검문을 하는 경찰은 심지어 내가 위조했다고 의심을 하면서 “이런 성은 없는데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영파와 소흥을 오가는 배에서 최근 어느 금융인(환전상)이 아주 간단한 방법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내가 배에 올라 선실 안으로 파고드는데, 이 뚱뚱한 금융인이 먼저 앞에 있었다. 그는 늘 그렇듯 “성이 무언가요?”고 내게 물었고, 나는 “풍입니다. 함풍황제(咸豐皇帝)에서 풍이예요”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시대가 너무 멀리 떨어져서였나, 그는 일순간 함풍황제를 생각해내지 못해서 멍하니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손바닥 안에 획을 그으면서 “오곡풍등(五穀豐登: 오곡이 풍년이 들다)에서 풍이예요”라고 말을 했다. 아마도 ‘오곡풍등’이라는 성어는 금융인 점포에서는 잘 쓰지 않는지, 역시 들어보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또 멍하니 모르겠다는 표정이기에, 나는 연필을 꺼내서 담뱃갑에 ‘풍(豐)’을 하나 써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훤히 깨달았다는 듯 “아, 괜찮네요, 괜찮아요, 회풍은행(滙豐銀行)에서 풍이네요!”라고 했다.
아, 괜찮다, 괜찮아! ‘회풍은행’은 확실히 ‘함풍황제’보다 인기있고, ‘오곡풍등’보다 많이 쓰이니까! 앞으로 남들이 내게 물어보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야지.
(1927年)
(1927년 7월 10일 <소설월보> 제18권 제7호)
姓
我姓丰。丰这个姓,据我们所晓得,少得很。在我故乡的石门湾里,也“只此一家”,跑到外边来,更少听见有姓丰的人。所以人家问了我尊姓之后,总说“难得,难得!”
因这原故,我小时候受了这姓的暗示,大有自命不凡的心理。然而并非单为姓丰难得,又因为在石门湾里,姓丰的只有我们一家,而中举人的也只有我父亲一人。在石门湾里,大家似乎以为姓丰必是举人,而举人必是姓丰的。记得我幼时,父亲的用人褚老五抱我去看戏回来,途中对我说:“石门湾里没有第二个老爷,只有丰家里是老爷,你大起来也做老爷,丰老爷!”
科举废了,父亲死了。我十岁的时候,做短工的黄半仙有一天晚上对我的大姐说:“新桥头米店里有一个丰官,不晓得是什么地方人。”大姐同母亲都很奇怪,命黄半仙当夜去打听,是否的确姓丰?哪里人?意思似乎说,姓丰会有第二家的?不要是冒牌?
黄半仙回来,说:“的确姓丰,‘养鞠须丰’的‘丰’,说是斜桥人。”大姐含着长烟管说:“难道真的?不要是‘酆鲍史唐’‘酆’吧?”但也不再追究。
后来我游杭州,上海,东京,朋友中也没有同姓者。姓丰的果然只有我一人。然而不拘我一向何等自命不凡地做人,总做不出一点姓丰的特色来,到现在还是与非姓丰的一样混日子,举人也尽管不中,倒反而为了这姓的怪僻,屡屡找麻烦:人家问起“尊姓?”我说“敝姓丰”,人家总要讨添,或者误听为“冯”。旅馆里,城门口查夜的警察,甚至疑我假造,说“没有这姓!”
最近在宁绍轮船里,一个钱庄商人教了我一个很简明的说法:我上轮船,钻进房舱里,先有这个肥胖的钱庄商人在内。他照例问我“尊姓?”我说:“丰,咸丰皇帝的丰。”大概时代相隔太远,一时教他想不起咸丰皇帝,他茫然不懂。我用指在掌中空划,又说:“五谷丰登的丰。”大概“五谷丰登”一句成语,钱庄上用不到,他也一向不曾听见过。他又茫然不懂,于是我摸出铅笔来,在香烟麓上写了一个“丰”字给他看,他恍然大悟似的说:“啊!不错不错,汇丰银行的丰!”
啊,不错不错!汇丰银行的确比咸丰皇帝时髦,比五谷丰登通用!以后别人问我的时候我就这样回答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