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부각되는 두 가지 문제兩個立即可見的困難
이 지점에서 적어도 두 가지 큰 문제가 부각된다.
첫째, 케인스처럼 개념적으로 칼로 케이크를 자르듯 그 절대 수요의 선을 긋는다면, 우리 개개인의 실제 생활로 돌아와 생각할 때 삶의 기본 수요를 유지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타이완 단수이강(淡水河)에서 떠낸 물 한 잔은 칠레 아타카마 사막(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이라 불리는 이곳은 4백 년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적도 있다고 한다!)에 갇힌 어떤 사람에게는 반갑고 그 수요의 정의에 부합하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35세를 인생의 딱 절반이자 삶이라는 여행의 반환점이라고 말했다. 이 서사시를 쓸 당시, 단테는 바로 그 언저리를 넘고 있었다. 시 속에서 그가 지옥과 연옥과 천당에 들어선 것처럼. 어쨌든 그래서 인간의 수명을 35 곱하기 2인 70세로 보았다. 아주 오랜 세월(아마 수천 년은 될 것이다) 70세는 사람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인간의 한계 수명이었다. 그보다 더 사는 사람은 ‘고희古稀’라는 말 그대로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70세라는 수명은 사실 인간 세계의 관점에서 나온 것이고 훨씬 오래된 생물계의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다. 고고학과 인류학의 발굴과 현장 조사를 검토하면서 보조로 생식 능력의 상실이 대체로 생명의 종결점과 같다는 생물계의 일반 법칙을 참고하면 50세 전후로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모두가 살아가는 데 전력투구하는 이 신세계에서는 8, 90세까지 올라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절대 수요는 결국 50년, 70년 혹은 90년간 한 시체를 유지하는 것인가.
둘째, 시종일관(아마도 영원히 멜서스의 유령이 배회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 세계가 절대 수요의 문제를 이미 해결했고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방도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굳이 증거를 대는 것이 불필요하며 또 이로 인해 더 진전된 논의를 하는 것이 곤란하고 어색해진다. 인간 세상의 발전은 여태껏 균일하게 이뤄진 적이 없어서 세계에는 두터운 화석층처럼 ‘정상 수명’이 50세, 70세, 90세인 이들 그리고 100세를 안 넘으면 이상한 몇몇 사람들이 동시에 존재한다(각 층의 높이가 기본적으로 부의 수치와 정비례한다는 것을 모른다면 바보일 것이다). 이 점은 우리의 말문을 막고 생존 한계선 위쪽 세계의 각종 까다로운 난제들을 반성하게 유도하지만, 부나 경기 확장 현상에 대해 필요한 언급만 해도 아직 생존 한계선 밑에서 몸부림치는 이들에게 무례를 범하게 되고 머릿속에서 “어찌 고기죽을 먹지 않는가?何不食肉糜(『진서晉書』의 한 구절로 부자가 가난한 이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묻는 말이다)”(중국), “왜 케이크를 안 먹는 거지?”(프랑스) 같은 도덕적 책망의 목소리가 자동으로 메아리친다. 하지만 부의 정점에 있는 이들은 이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 그들에게 가장 비참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이들은 동시에 그들의 인질이기도 한데, 사람이 허기와 추위에 시달리면 어떻게 계속 부를 창출하겠는가.
진지하게 민주 정치의 문제를 논의할 때도 마찬가지다. 도덕은 강력한 자기 제약의 힘이어서 그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을 말로 이기기 어렵다. 어쩔 수 없다. 이것은 사람들을 매우 불편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일반적 역사 법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