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옥 속의 고결한 지성

낙빈왕의〈감옥에서 매미를 노래함〉 駱賓王 – 在獄詠蟬

가을인데 매미 소리 요란하니

남쪽 나그네 고향 생각 깊어간다.

어쩌란 말이냐, 미인의 머리채 같은 날개로

내게 와서 「백두음」을 읊어대는 걸!

무거운 이슬 젖어 날기도 어렵고

세찬 바람에 소리조차 쉬이 잦아든다.

고결함 믿어주는 이 아무도 없으니

누구에게 내 마음 드러낼까?  

西陸蟬聲唱, 南冠客思深.

不堪玄鬓影, 來對白頭吟.

露重飛難進, 風多響易沉.

無人信高潔, 誰爲表予心.  

당나라 초기의 저명한 시인 낙빈왕(駱賓王, 626?~684?)의 〈감옥에서 매미를 노래함[在獄詠蟬]〉이다. 원래 이 시에는 시인이 감옥에 갇히게 된 사연을 담은 다음과 같이 제법 긴 〈서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내가 감금된 황궁 서쪽은 법령을 집행하는 청사인데, 여러 그루의 오래된 홰나무가 있다. 비록 살려는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은중문(殷仲文)이 탄식한 고목과 같고,1) 여기에서 백성들의 소송을 들어주었으니 바로 주(周)나라 소공(召公) 때의 감당나무와 같다 하나,2) 석양이 낮게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 매미가 드문드문 그윽하게 울어대면 예전에 듣던 것보다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이 어찌 내 마음이 예전과 달라져서 벌레 울음이 예전보다 더 슬프게 들리기 때문이겠는가? 아, 소리는 사람 얼굴에 감동의 표정이 떠오르게 만들고, 덕행은 성현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매미가) 자신의 몸을 고결하게 하는 것은 군자와 현달(顯達)한 이들의 고고한 행실을 따르는 것이요, 허물을 벗는 것은 깃털이 생겨 신선의 나라에 날아오르는 신령한 자태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때를 기다려 온 것은 음양의 운수(運數)에 순응한 것이요, 계절에 따라 변한 것은 숨김으로써 오히려 공용(功用)을 드러내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눈을 뜨고 있으니 길이 어둡다고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없고, 날개를 지녀 스스로 몸을 가볍게 하여 날 수 있으니 세속에 영합하여 자기의 진심을 바꾸지 않는다. 높은 나무에 부는 산들바람에 노래 읊조리니 그 운치 있는 자태는 하늘이 부여한 것이요, 한가을의 이슬 마시니 그 청렴함은 사람들도 알고 있다.

나는 어려운 시절에 길을 잃고 죄수의 몸이 되었으니, 슬퍼하기보다는 자신을 원망하고 떨어지기 전에 미리 시드는 잎의 신세가 되었다. 흐르는 매미 소리를 들으니 내 억울한 누명이 이미 씻겼음을 알겠고, 사마귀가 덮치는 모습을 보니 위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을까 두렵구나. 이에 느낀 바 있어 시를 지어 나를 알아주는 이에게 주노라. 바라건대 감정은 사물에 따라 일어나는 법인지라 유약한 날개로 바람에 떠도는 매미 같은 내 신세를 애달피 여겨주고, 사람들에게 알려 적막한 내 노래를 동정해주기 바라노라. 훌륭한 시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이걸로 내 마음의 근심을 대신하고자 한다.  

余禁所禁垣西, 是法廳事也, 有古槐數株焉. 雖生意可知, 同殷仲文之古樹, 而聽訟斯在, 即周召伯之甘棠, 每至夕照低陰, 秋蟬疏引, 發聲幽息, 有切嘗聞, 豈人心異于曩時, 將蟲響悲于前聽? 嗟乎, 聲以動容, 德以象賢. 故潔其身也, 禀君子達人之高行, 蛻其皮也, 有仙都羽化之靈姿. 候時而來, 順陰陽之數, 應節爲變, 審藏用之機. 有目斯開, 不以道昏而昧其視, 有翼自薄, 不以俗厚而易其眞. 吟喬樹之微風, 韻姿天縱, 飮高秋之墜露, 清畏人知. 僕失路艱虞, 遭時徽纆. 不哀傷而自怨, 未搖落而先衰. 聞蟪蛄之流聲, 悟平反之已奏, 見螳螂之抱影, 怯危機之未安. 感而綴詩, 貽諸知己. 庶情沿物應, 哀弱羽之飄零, 道寄人知, 憫余聲之寂寞. 非謂文墨, 取代幽憂云爾.  

이것은 당나라 고종(高宗) 의봉(儀鳳) 3년(678)에 낙빈왕이 시어사(侍御史)로 있을 때 올린 상소가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노여움을 사서 뇌물 수수와 부정 축재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옥에 갇힌 일과 감옥에서 들은 가을 매미의 울음소리에 자신의 신세를 연상시켜 시를 짓게 된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수련(首聯)의 첫 구절에서 ‘서륙(西陸)’은 가을을 가리킨다. 고대 중국의 천문학에서는 태양이 황도(黃道)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서륙 구역에 이르게 되면 계절이 가을로 바뀐다고 여겼다. 둘째 구절의 ‘남관(南冠)’은 《좌전(左傳)》 〈성공(成公)〉 9년 항목에 기록된 초(楚)나라 사람 종의(鍾儀)의 이야기를 빌려 쓴 것이다. 종의는 진(晉)나라에서 죄수로 갇혀 있을 때에 줄곧 자기 고향에서 쓰던 모자를 쓰고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고향이 남쪽 절강(浙江)인 낙빈왕 자신이 북쪽인 장안(長安)에서 죄수로 갇힌 몸이 되었음을 비유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연은 매미 울음소리를 듣고 일어난 나그네의 향수(鄕愁)를 얘기하고 있다.

함련(頷聯)의 첫 구절에서 현빈(玄鬢)은 원래 여자의 머리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따르면 이 머리 모양은 위(魏)나라 문제(文帝)가 사랑하던 막경수(莫瓊樹)가 처음으로 꾸몄다고 하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매미 날개처럼 보였다고 한다. 다만 이 시에서는 거꾸로 여인의 머리 모양을 통해 매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둘째 구절의 ‘백두음(白頭吟)’은 본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들어 있는, 한(漢)나라 때의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와 그의 아내인 탁문군(卓文君)의 이야기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사마상여가 바람을 피자 탁문군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백두음’이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결국 그것을 통해 남편의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악부시집(樂府詩集)》에 따르면, 포조(鮑照)와 장정견(張正見), 우세남(虞世南) 등이 이 제목으로 시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모두 청렴하고 정직한 몸으로 무고(誣告)를 당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 내용이라고 했다. 전체적으로 이 연은 첫 구절의 ‘불감(不堪)’과 둘째 구절의 ‘내대(來對)’가 의미상 서로 연관되는, 이른바 ‘유수대(流水對)’를 이루고 있다. 또한 젊고 아름다워서 임금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여인인 ‘현빈’과 백발의 늙은이가 되어 버림받은 여인으로 투영된 자신의 모습이 의미심장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다만 논자에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즉 ‘현빈’은 한창 젊음과 재기(才氣)를 자랑하는 낙빈왕 자신을 의미하고, ‘백두음’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무고를 당해 죄수로 갇혀 있는 현재의 처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논리는 그럴싸하지만 어법적으로는 맞지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둘째 구절 첫머리의 ‘내대(來對)’라는 동사의 주어는 바로 앞 구절의 ‘현빈영(玄鬢影)’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후반부 두 연은 매미의 입을 빌려 자신의 심사를 읊은 전형적인 영물시(詠物詩)의 수법이다. 우선 경련(頸聯)의 ‘이슬’과 ‘바람’은 자신을 억압하는 혼탁한 세태를 암시한다. 〈서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눈을 뜨고 있으니 길이 어둡다고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없고, 날개를 지녀 스스로 몸을 가볍게 하여 날 수 있으니 세속에 영합하여 자기의 진심을 바꾸지 않는” 깨어 있는 그의 지성 앞에는 사마귀로 상징되는 음험한 권력의 그림자가 매복해 있다. 그러나 부조리한 현실에 승복하지 못하는 고고한 천성 탓에 죄인의 누명을 썼으니 “슬퍼하기보다는 자신을 원망”하게 되고, 앞길을 알 수 없는지라 “떨어지기 전에 미리 시드는 잎의 신세”가 되어 시름에 잠긴다. 그러나 미련(尾聯)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억울하게 옥에 갇힌 채 하소연할 데도 없는 자신의 심사는 인간 세상의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오로지 매미와 교감될 뿐이다. 결국 그는 시를 적어 ‘지기’에게 주면서 “유약한 날개로 바람에 떠도는 매미 같은 내 신세를 애달피 여겨주고, 사람들에게 알려 적막한 내 노래를 동정해주기 바라”면서도, 구원의 손길이 찾아올 가능성은 별로 기대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낙빈왕은 무주(婺州) 의오(義烏, 지금의 저쟝성[浙江省]에 속함) 사람으로서 왕발(王勃, 650~676),3) 양형(楊炯, 650~693?),4) 노조린(盧照隣, 637?~689)5)과 함께 ‘초당사걸(初唐四傑)’로 불리며, 또한 부가모(富嘉謨, ?~?)6)와 더불어 ‘부락(富駱)’으로 칭해지기도 했다. 그는 부친이 청주(靑州) 박창현령(博昌縣令)을 지냈기 때문에 어려서는 비교적 풍요로운 집에서 자라면서 ‘신동’으로 불리며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부친이 임지(任地)에서 죽은 후로는 이리저리 떠돌며 가난과 실의에 빠져 지냈다. 그러다가 고종(高宗) 영휘(永徽, 650~655) 연간에 도왕(道王) 이원경(李元慶)에게 발탁되어 봉례랑(奉禮郞)과 동대상정학사(東臺詳正學士)를 지냈으나, 나중에 일에 연루되어 폄적돼 서역(西域)에서 종군(從軍)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촉(蜀) 땅으로 들어가 요주도(姚州道) 대총관(大總管) 이의(李義)의 군막(軍幕)에서 막료로 지내면서 노조린과 교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678년에는 장안으로 들어가 시어사가 되었다가, 위 작품에 언급된 사건에 휘말려 옥에 갇혔다.

이듬해 사면을 받아 풀려나자 그는 북쪽의 유연(幽燕) 땅으로 가서 다시 군대에서 생활하다가, 680년에 임해현승(臨海縣丞)이 되었다. 그러다가 684년에 측천무후가 중종(中宗)을 폐위시키고 주(周)나라를 세우려 하자, 그는 양주(揚州)를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서경업(徐敬業, 즉 이경업[李敬業])의 부대에 참여하여 예문령(藝文令)에 임명돼 문서를 관장했다. 유명한 〈이경업을 대신하여 천하에 알리는 격문[代李敬業傳檄天下文]〉은 바로 이때에 쓴 것이다. 그러나 그해 11월 서경업의 군대가 패배한 뒤로 그의 행적은 끊어져버렸다. 격렬한 전투의 와중에 이름 모를 병사들과 더불어 전사해버린 것인지, 아니면 좌절된 혁명의 꿈을 내던지고 지기(知己) 없는 속세를 떠나 은거해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마지막은 특이한 이름처럼 신비했던 것이다.

그러나 낙빈왕의 사후에도 1,500년 가까이 이어진 봉건 왕조는 체 게바라를 연상시키는 그의 치열한 삶의 행적을 거의 보존해놓지 못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중종 때에 희운경(郗云卿)이 《낙빈왕집(駱賓王集)》 10권을 편찬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명‧청 시기에 다시 엮어진 몇몇 시문집들만이 나왔을 뿐이다. 그 가운데 청나라 때 진희진(陳熙晉)이 편찬한 《낙림해집전주(駱臨海集箋注)》가 가장 유명하다.

중국문학사의 관점에서 낙빈왕을 비롯한 ‘초당사걸’은 제(齊)‧량(梁) 시대에 유행하여 당나라 초기까지 상관의(上官儀, 608?~664)7) 등에 의해 계승되고 있던, 화려한 수사(修辭)만 있고 내용은 없는 ‘궁체시(宮體詩)’의 창작의 기풍을 개혁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즉 그들의 시는 궁정의 화려한 연회와 미녀에 대한 묘사로 황제에게 기쁨을 제공하던 시의 역할에서 벗어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산천 경관과 치열한 변방의 삶을 묘사함으로써 시 문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던 것이다. 낙빈왕의 또 다른 시 〈역수에서 벗을 전송하며[於易水送人]〉는 그 활기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곳에서 연 태자 단과 작별하니

사나이의 곤두선 머리카락 모자를 찔렀다네.

옛 사람은 이미 죽고 없지만

지금도 역수 강물은 여전히 차갑구나.  

此地别燕丹, 壯士髮冲冠.

昔時人已没, 今日水猶寒.  

역수는 전국시대 말엽 진왕(秦王) 영정(嬴政, 훗날의 진시황제[秦始皇帝])을 암살하기 위해 형가(荊軻)가 연(燕)나라 태자 단(丹)과 친한 벗 고점리(高漸離)의 전송을 받으며 떠난 곳이다.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수록된 그의 비장한 노래는 지금도 널리 회자되는 절창(絶唱)이다. 이처럼 역수는 형가의 장쾌한 거사의 출발점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깃든 곳인데, 위 시의 제3~4구는 사나이들의 거룩하고 용감한 행보가 낙빈왕이 살았던 시대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시인의 벗은 또 다른 형가가 되어 역수를 건너고, 시인은 고점리가 되어 노래로 벗을 전송한다.

역사적 상황이 다른 만큼, 어쩌면 시인의 벗은 당시 당 황실의 기틀을 뒤흔들던 측천무후를 응징하는 거사를 위해 목숨을 건 길을 떠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또 다시 재현되는 이 비장한 이별의 장면을 아우르는 ‘차가운[寒]’ 강물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시의 눈[詩眼]이다. 그 ‘차가움’은 바로 보는 이를 오싹 움츠리게 만드는 대장부의 의로운 기개일 뿐만 아니라, 정의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나이를 보내는 이들의 쓸쓸한 마음이요, 형가의 경우처럼 실패로 끝날 거사를 예견하는 냉정한 역사의 시선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20자의 짧은 구절 속에 들어 있는 옛 이야기 한 토막과 벗을 보내는 시인의 눈에 비친 강물의 풍경에는 거의 무한대로 확장되는 깊이와 서사(敍事)가 응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축을 이루는 것은 부조리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진정한 사나이들의 기개이니, 이것은 다름 아니라 오랫동안 잊혀 있던 위(魏)‧진(晉) 시인들의 ‘풍골(風骨)’인 것이다. 별다른 수식어 하나 없이 차분하게 나열된 이 작품의 시어(詩語)들은 시에서 중요한 것은 수사가 아니라 그 안의 내용, 즉 정신임을 소리 없이 강조하고 있다. 왕발의 시 〈촉 땅 부임지로 떠나는 두소부를 전송하며[送杜少府之任蜀川]〉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의 시적 변혁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장안 성과 궁궐은 삼진의 보좌를 받고 있는데

바람에 일렁이는 안개 너머로 촉 땅 나루터들이 보인다.

그대와 이별하는 데에 담긴 뜻은

우리 모두 벼슬살이로 집 밖을 떠돌아야 한다는 것.

천하에 나를 알아주는 이 있다면

하늘 끝 멀리 헤어져 있어도 이웃처럼 가까운 법.

떠나고 보내는 갈림길에서

아녀자처럼 함께 눈물로 수건 적시진 말세!  

城闕輔三秦, 風煙望五津.

與君别離意, 同是宦游人.

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

無爲在岐路, 兒女共沾巾.

소부(少府)는 당나라 때에 현위(縣尉)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호칭이었는데, 이 시에 등장하는 두(杜) 아무개는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다. 수련 첫째 구절의 ‘삼진(三秦)’은 본래 항우(項羽)가 관중(關中) 땅을 옹(雍), 새(塞), 적(翟)의 세 지역으로 나누고 그것을 아울러 부르던 명칭인데, 여기서는 장안을 둘러싼 지역인 관중 땅을 가리킨다. 둘째 구절의 ‘오진(五津)’은 본래 촉 땅의 민강(岷江)에 있는 5개의 나루터 즉 백화진(白華津)과 만리진(萬里津), 강수진(江首津), 섭두진(涉頭津), 강남진(江南津)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촉 땅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쓰였다. 장안과 촉 땅을 가르고 있는 ‘바람에 일렁이는 안개[風煙]’는 단순한 풍경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 단어는 탐욕과 기만, 억압 등 온갖 추악한 인간세상을 가리키는 풍진(風塵)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또 전란(戰亂)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중국은 황후가 되어 당나라 황실을 뒤엎고 주나라를 세우려던 측천무후의 야망에 맞서 서경업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혼란한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단어의 함축적인 의미가 더욱 생생해진다.

함련은 이 이별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있다. 즉 두소부와 왕발은 모두 조정의 관리로서 수시로 집을 떠나 여기저기 부임지로 옮겨 다녀야 하는 몸이니, 지금과 같은 이별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는 설명이다. 나아가 경련에서는 서로를 알아주는 지기의 관계에서는 살고 있는 지역의 멀고 가까움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지금의 이별을 슬퍼할 필요 없다고 위로하고 있다. 특히 이 구절은 조식(曹植, 192~232)8)이 〈백마왕 표에게[贈白馬王彪]〉라는 시에서 “대장부가 천하에 뜻을 두면 / 만 리를 떨어져 있어도 이웃 같은 것. /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남아 있다면 / 멀리 헤어져 있어도 날마다 가까워질 테니[丈夫志四海, 萬里猶比隣. 恩愛苟不虧, 在遠分日親]”라고 한 구절을 ‘탈태(奪胎)’하여 만든 것으로, 후세에 길이 남는 명구(名句)가 되었다. 마지막 미련은 전체 작품의 결론으로서 대장부답게 의연하게 헤어지자는 다짐을 담고 있다.

한편, ‘풍골’을 담은 내용과 더불어 주목할 만한 것은 낙빈왕과 왕발의 오언율시가 이미 형식적으로 거의 완전한 틀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중국 시의 역사에서 ‘초당사걸’ 가운데 특히 왕발과 양형은 오언율시의 기초를 확립하고 칠언고시(七言古詩)를 성숙하게 만든 인물들로 평가받고 있다. 훗날 이들의 뒤를 이은 심전기(沈佺期, ?~713?)9)와 송지문(宋之問, ?~712)10) 등의 노력으로 오언율시는 완전한 형식을 갖추게 된다. 또한 오언고시(五言古詩)는 이미 삼국시대 후기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지만 칠언고시는 당나라 때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초당사걸’ 가운데 낙빈왕과 노조린은 칠언고시 형식으로 많은 걸작을 남겼다. 다만 이들의 주요 작품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시 감상하게 될 것이다.

*

감옥과 정신병원에 관한 푸코(M. Foucault)의 유명한 분석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억압은 권력의 기본 속성이다. 권력이란 일정 정도의 강제력이 전제되어야 성립 가능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유민주주의’의 탈을 뒤집어썼을 때에도 권력의 그런 속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민주주의’ 권력은 갈수록 교묘해지는 기만적 술수와 자본주의에 영합하여 창출해낸 비열한 우민화(愚民化) 정책을 통해 억압의 힘을 더욱 강화한다. 그 결과 현대사회는 눈에 보이는 철창과 보이지 않는 ‘빅 브라더’의 굴레, 그리고 인격의 상품화를 통해 고립이 부추겨진 개인들의 껄끄러운 집합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이다.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철창 안팎의 개념을 모호하게 할 만큼 보편적인 삶의 현실을 풀어놓고 있다. 그의 사색에 공감하면 할수록 철창 밖의 세상은 더 넓은 감옥에 지나지 않음을 점점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감옥은 지독하게 두꺼운 벽으로 차단된 벌집 같은 독방이다. 그것은 “내 마음 드러낼” 누군가도, “적막한 내 노래를 동정해”줄 사람조차 차단된 채 그저 물리적으로 공존하는 이차원(異次元)의 시공이다.

법정에 서 있는 친구를 보고 돌아온 날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하늘은 유난히 맑아서

나는 새장의 새를 풀어놓았다

하늘을 알아버린 탓일까

그 작은 눈에 고인 햇빛이 너무 맑아

새는 외로워 보였다

모든 걸 알아버린 탓일까

아직도 하늘이 푸르냐고 묻던

그 친구의 눈에 패인 그늘이 생각나

하늘을 보다 자리에 누운 날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햇빛이 너무 맑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1976년에 발표된 정희성의 〈하늘을 보다 잠든 날은〉을 나는 1984년에 처음 읽었다. 최루탄 가득한 교문과 거리에서 ‘닭장 차’에 끌려간 벗들을 목격한 날이면, 밤늦도록 취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이 시를 떠올리곤 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정해진 행사처럼 흥건히 젖은 교문에서 마스크를 쓰고 깨진 보도블록과 화염병 유리조각을 치우는 경비원들 사이를 지나 교정에 들어설 때면, 어느새 붉어진 눈시울이 아직 씻기지 않은 최루탄 가루의 탓이리라 둘러대곤 했다.

그러고 보니, 이른바 ‘386 세대’의 대학생들은 ‘학우’라기보다는 ‘동지’인 경우가 더 많았다. 수업 거부와 시험 거부로 강의실은 1년 내내 몇 차례 들어가 보지 못했고, 그 대신 우리는 빈 강의실이나 누군가의 자취방에서 함께 ‘의식화’를 위한 세미나를 하고, 시위장과 술집에서 한 데 어울려 목 터지게 ‘자유’와 ‘해방’을 노래하는 ‘동지’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것이 또 다른 ‘배제’를 위한 훈련 과정이었음을 그때의 ‘동지’들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총칼을 앞세운 실제적인 억압 앞에서 절박하게 요구된 ‘투쟁’과 ‘타도’의 격한 분위기 속에서, ‘배제’란 결국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의 산물임을 누군가 환기시켰다 할지라도 그의 문제 제기는 결국 ‘수정주의자’의 관념적 변명으로 매도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요 악’의 시대인 80년대의 폭력이 지나가고 난 뒤, 다시 21세기의 새로운 ‘패거리 문화’를 구축해가는 지난날의 ‘동지’들을 보면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모든 걸 알아버린” 그는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죽어서건 살아서건 지금쯤 창살 밖으로 나왔을 그의 눈에 비친 하늘은 여전히 푸를까? ‘같은 하늘 아래’ 펼쳐진 매트릭스의 고립된 인자(因子)로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는 과연 자유를 느꼈을까? 태풍이 지나고 다시 뜨거운 여름 햇살이 젖은 세상을 달군다. 그러나 간밤의 폭우로 불어난 흙탕물에 쓰레기를 가득 실은 채 흐르는 낙동강은 역수의 강물보다 더 차갑다.

주)

1) 東晉 때의 殷仲文이 大司馬 桓溫의 관서에 있는 늙은 홰나무를 보더니, “이 나무가 어지러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더 이상 살려는 뜻이 없나 보다.[此樹婆娑, 無復生意.]”라고 하면서 조정에 나아가 뜻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고 한다. 은중문(?~407)은 陳郡(지금의 河南省 淮安에 속함) 사람이다. 그는 會稽王 司馬道子의 驃騎參軍 등을 지내다가, 桓玄에게 발탁되어 咨議參軍, 侍中,左衛將軍 등을 지냈다. 훗날 환현이 劉裕의 군대에게 격파당하자 晉나라에 투항했다. 405년에는 鎭軍長史를 시작으로 尙書, 東陽太守 등을 지냈으나, 407년 永嘉太守 駱球 등과 모의하여 桓胤을 황제로 옹립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2) 전설에 따르면, 周나라 召公이 민간을 시찰하다가 백성들의 訴訟을 듣고 백성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甘棠나무 아래에서 재판을 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때문에 감당나무를 아끼고 보호했다고 한다. 소공은 바로 武王의 아들인 姬奭을 가리킨다. 그는 주나라 무왕 때에 召(지금의 陝西省 岐山縣 서남쪽) 땅에 봉해졌고, 무왕이 商나라를 멸망시킨 이후 그를 燕 땅에 봉해주었다. 成王 때에는 ‘三公’ 가운데 하나인 太保가 되어, 周公과 함께 陝 땅을 동서로 나누어 다스렸다.

3) 王勃은 字가 子安이고 繹州 龍門(지금의 山西省 河津)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명성이 높았던 그는 成年이 되기도 전에 조정에 천거되어 朝散郞에 임명되었으며, 666년에는 沛王 李賢의 侍讀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2년 후 장난삼아 쓴 〈檄英王鷄〉라는 글 때문에 高宗의 노여움을 사서 쫓겨나 巴蜀 땅을 여행했다. 이후 672년에는 虢州參軍으로 다시 임용되었으나, 함부로 官奴를 처형한 혐의로 除名되었다. 그러다가 675년 무렵에 친척을 방문하기 위해 남쪽으로 가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 본래 그는 시집 30권을 남겼다고 하나, 지금은 후세 사람들이 편찬한 2권 분량의 시집만 남아 있다.

4) 楊炯은 華陰(지금의 陝西省에 속함) 사람이다. 그는 659년에 神童으로 천거되었고, 676년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校書郞, 詹事司直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則天武后가 집권하던 685년에는 徐敬業의 반란에 참여한 혐의로 梓州司法參軍으로 폄적당했다. 그 후 690년에는 다시 洛陽宫中習藝館의 敎授가 되었고, 692년에는 盈川令이 되었는데, 嚴酷한 정치로 악명이 높았다. 《舊唐書》에는 그의 문집 30권이 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명나라 때에 그의 글을 모아 편찬된 《盈川集》 10권과 《附錄》 1권 등이 남아 있다.

5) 盧照隣은 字가 升之이고 幽州 范陽(지금의 河北省 涿縣) 사람이다. 그는 鄧王 李元裕의 典簽과 新都尉를 지내다가 병에 걸려 벼슬을 사직하고 太白山에 은거하며 丹藥을 만들어 먹곤 했으나 중독되어 팔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나중에 다시 陽翟 具茨山(지금의 河南省 禹縣 북쪽)에 장원을 사서 은거하며 스스로 幽憂子라고 불렀다. 그러나 끝내 병에 시달리다가 潁水에 투신해 죽었다. 그는 본래 문집 20권을 남겼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후세 사람들이 엮은 《幽憂子集》이 전해진다.

6) 富嘉謨는 雍州 武功(지금의 陝西省 武功) 사람이다. 그는 진사 출신으로 晉陽尉를 지냈으며, 《三敎珠英》의 편찬에도 참여했고, 이후 左臺御史를 지냈다. 그는 본래 문집 10권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7) 上官儀는 字가 游韶이고 陝州(지금의 허난성 陝縣) 사람이다. 그는 627년 진사에 급제하여 弘文館直學士에 임명된 이후 秘書郞으로 승진하여 太宗의 신임을 받았다. 高宗 때에는 秘書少監, 西臺侍郞으로 승진했으나 측천무후가 황후가 되는 데에 반대하다가 미움을 샀다. 그러다가 664년 폐위된 태자 李忠과 내통하여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되어 옥에 갇혀 있다가 죽었다. 그는 본래 문집 30권을 남겼다고 하나 지금은 원본이 없어졌고, 《全唐詩》에 시집 1권(20수)과 《全唐文》에 산문 20편이 수록되어 남아 있다. 화려한 수사로 황제의 비위를 맞춘 그의 시는 한 때 ‘上官體’라고 불리며 유행하기도 했는데, 비록 내용은 보잘것없으나 시의 對偶와 聲律을 발전시킴으로써 훗날 近體詩가 완성되는 데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8) 曹植은 삼국시대 魏나라 曹操의 셋째 아들로, 字는 子建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부친의 총애를 받았으나, 우여곡절 끝에 그의 형인 曹丕(187~226)가 왕위를 계승하고 황제가 되면서 잦은 박해를 받았고, 明帝 曹叡(227~239 재위)가 즉위한 후에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 시름 속에서 죽었다. 그는 일찍이 陳王에 봉해진 적이 있고 죽은 후 諡號가 思였기 때문에 흔히 陳思王이라고 불린다. 東漢 말엽 獻帝의 建安(196~219) 연간에 부흥한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기도 한 그의 작품 가운데 80여 수의 시와 40여 편의 辭賦 및 산문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9) 沈佺期는 字가 雲卿이고 相州 內黃(지금의 河南省 內黃縣) 사람이다. 그는 675년 진사에 급제하여 通事舍人으로서 《三敎珠英》의 편찬에 참여했고, 이후 考功郞給事中, 臺州錄事參軍, 起居郞, 修文館直學士, 中書舍人, 太子少詹事 등을 역임했다. 그는 원래 문집 10권을 남겼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명나라 때에 후세 사람들이 모아 편찬한 《沈佺期集》이 있다.

10) 宋之問은 이름이 少連이라고도 하며 字는 延淸으로, 汾州(지금의 山西省 汾陽) 사람이다(일설에는 虢州 弘農 즉 지금의 河南省 靈寶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는 675년 진사에 급제하여 洛州參軍, 尙尚方監丞, 左奉宸內供奉 등을 역임하며 《삼교주영》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張易之 형제에게 아부하다가 나중에 瀧州參軍으로 폄적되었다. 얼마 후 中宗 때에는 張仲之가 武三思를 살해하려고 모의한 것을 밀고한 공로로 鴻臚主簿에 발탁되어 考功員外郞으로 승진하고 修文館學士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知貢擧로 일할 때 뇌물을 받은 혐의로 越州長史로 폄적되었고, 睿宗이 즉위한 후 欽州로 유폐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원래 문집 10권을 남겼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명나라 때에 편찬된 《宋之問集》이 있다. 《전당시》에 그의 시 3권이 수록되어 있다.

by 백운재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