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白 – 把酒問月
靑天有月來幾時 푸른 하늘의 달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我今停杯一問之 나 이제 술잔을 멈추고 한 번 물어보노라.
人攀明月不可得 사람은 저 밝은 달 잡을 수는 없는데
月行卻與人相隨 달이 도리어 사람을 따라 오는구나.
皎如飛鏡臨丹闕 떠다니는 거울같이 밝은 저 달은 선궁(仙宮)에 걸린 듯
綠煙滅盡淸輝發 푸른 안개 다 사라지니 맑은 빛을 내는구나.
但見宵從海上來 밤이면 바다에서 떠오르는 것을 볼 뿐
寧知曉向雲間沒 새벽에 구름 사이로 지는 것이야 어찌 알리오?
白兎搗藥秋復春 흰 토끼 불사약 찧을 때 세월은 하염없이 흐르는데
嫦娥孤棲與誰鄰 외로운 항아는 누구와 이웃할까?
今人不見古時月 지금 사람들은 옛 날의 달을 보지 못하지만
今月曾經照古人 지금의 달은 옛 사람들도 비춘 적 있으리라.
古人今人若流水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 모두 흐르는 물과 같아
共看明月皆如此 함께 달을 바라봄이 모두 이와 같았으리라.
唯願當歌對酒時 그저 바라는 건, 노래하고 술 마실 때
月光長照金樽裏 달빛이 오랫동안 금 술잔에 비춰주는 것뿐.
이백의 〈술잔 들고 달에게 묻다(把酒問月)〉이다. 고시 특유의 전운(轉韻)과 회문(回文)을 연상시키는 반복적 단어 활용이 절묘하다. 특히 이 시에는 “친구인 가순이 내게 묻도록 함(故人賈淳令予問之)”이라는 부제(副題)가 달려 있어서 묘미를 더해준다. 이것은 결국 술자리의 주흥이 올라 있는 상태에서 대작하던 친구의 청에 따라 즉흥적으로 이 작품을 썼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 즉흥시에서 수사법도 수사법이려니와 전체 시상(詩想)을 이처럼 치밀하게 엮어낸 것을 보면, 과연 ‘시선(詩仙)’이라는 칭송이 그의 천재성을 나타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음을 느끼게 해준다.
첫 두 구절은 도치적 서술이다. 주흥이 올라 잠시 술잔을 멈추고 질문을 던지는, 다시 말하자면 시를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질문의 내용이 그야말로 ‘우주적’이다. 창공의 별은 언제부터 존재했는가라는 질문은 우주와 대자연의 존재와 시공(時空)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지는 주체는 바로 적당히 취한 ‘나’인 것이다. 내가 그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제3~6구에 설명되어 있다. 영원하고 위대하며, 더욱이 청결하기 그지없는 자연은 인간이 따라잡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자연은 언제나 인간을 따라다니며 보살펴준다. 아니, 단순히 따라다니기만 할 뿐 아니라 영생불사의 비전을 보여주고, 진리를 통찰하는 시선을 가리는 세속의 먼지와 안개를 없애고 밝은 빛을 비춰준다.
제7~10구는 유한한 시공 속에서 제한된 식견으로 우주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인간 존재를 풍자하고 위로한다. 깨어 있는 시간에만 어렴풋이 우주의 영원성을 부러워하는 인간은 자신이 인식한 영원성 자체가 본디 무상(無常)한 것임을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영원한 것을 부러워하는 인간은 영원한 존재가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를 알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언뜻 하루살이와 대붕(大鵬)의 삶에 대한 장자(莊子)의 비유를 떠올리게 하는 이 구절들의 뒷면에 내재된 반어적 상징이 한층 선명해진다. 영생불사를 위해 불의를 감행했던 항아는 결국 ‘고독’이라는 영원한 뇌옥으로 스스로 내달려간 비극적 존재라는 것이다.
제11~14구는 끝없이 반복되는 인간 역사에 대한 총괄적 정의이다. 여기서 달은 비록 그 또한 인간이 인식하는 한정된 부분일 뿐일지라도, 순간을 머물렀다 흘러가버리는 인간의 눈에 대비되는 우주의 ‘눈’이다. 그에 비해 인간의 눈은 큰 강물을 이루는 수많은 물방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흐름’에 휩쓸린 인간의 눈은 돌아볼 수도, 흐름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자신을 관조할 수도 없다.
이 시의 결론에 해당하는 제15~16구는 이미 작은 물방울 가운데 하나임을 인식한 ‘나’의 새로운 깨달음을 담고 있다. 그 깨달음은 바로 유한성을 인정하는 체념과 비애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즐기자는 비약적인 결의이다. 그러나 이때의 나는 흐름에 휩쓸려 자신조차 관조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나는 ‘무상’ 속에서 ‘평상’을 추구하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시는 도도한 주흥에서 달로 대표되는 관념적 존재론으로, 다시 달에서 인간 역사 전체로, 그리고 전체 인간에서 ‘나’로 이어지는 시선의 변화를 담고 있다. 어떻게 보면 개인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으로 비칠 수 있는 이런 인생관은 퇴폐적이 아니라 적극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특징적이기도 하다.
이백의 생애는 거의 술과 여행의 연속이었다고 할 정도였기 때문에, 그의 시에는 술과 산수풍경에 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술은 심하게 얘기하자면 그의 시 가운데 그에 관한 언급이 없는 시가 거의 없을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데, 이것은 당연히 그의 현실적 고뇌와 초월적 인생관을 표현하는 매체로 술만큼 유용한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이백의 시 1,000여 수 가운데는 술과 달을 거론한 작품이 〈산중여유인대작(山中與幽人對酌)〉, 〈월하독작(月下獨酌)〉, 〈동야취숙용문각기언지(冬夜醉宿龍門覺起言志)〉, 〈장진주(將進酒)〉 등등 대표작으로 꼽을 만한 것들만 하더라도 250수 남짓 된다. 이것은 양적으로도 여타 시인에 비해 대단히 많을 뿐더러, 그 성취 또한 탁월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적 벗이기도 했던 두보는 유명한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李白斗酒詩百篇 이백은 술 한 말에 시 백 편을 쓰는데
長安市上酒家眠 장안 저자의 술집에서 잠자면서
天子呼來不上船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自稱臣是酒中仙 스스로 저는 술 속에 사는 신선이라 했다지.
《신당서(新唐書)》 〈이백전〉에 따르면, 당 현종이 침향정(沉香亭)에서 그를 불러 흥을 돋는 시를 쓰라고 했는데, 그는 장안의 술집에서 만취해 있었다고 했다. 또한 당나라 때 범전정(范傳正)이 쓴 〈이백신묘비(李白新墓碑)〉에서는 현종이 백련지(白蓮池)에 배를 띄우고 이백을 불러 글을 쓰라고 했지만, 당시 그는 한림원(翰林院)에서 만취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고역사(高力士)로 하여금 그를 부축해 배에 올라오게 했다고 한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자유분방함이 전적으로 그가 진정한 ‘자유인’이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설명일 것이다. 그보다 그의 그런 행위는 당시의 비틀린 관료사회와 시대의 부조리 아래 밝은 길을 찾지 못해 괴로움 속에서 방황해야 했던 그의 소극적인 반항의식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일찍이 ‘바른 생활 선생님’ 주희(朱熹)마저 인정하고 칭송했던 것처럼 이백은 시 창작에서 ‘신기한 성취[神就]’를 이룬 천재가 아니었던가!
한편 송나라 때의 대문호(大文豪) 소식(蘇軾)은 새로운 관점에서 이백의 이 작품을 응용한 절창(絶唱) 〈수조가두(水調歌頭)〉를 노래했다.
明月幾時有 밝은 달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把酒問靑天 술잔 들고 푸른 하늘에게 물어본다.
不知天上宮闕 천상의 궁궐은
今夕是何年 오늘밤 무슨 해일까?
我欲乘風歸去 바람 타고 돌아가고 싶지만
又恐瓊樓玉宇 화려한 건물들 있다 해도
高處不勝寒 높은 곳이라 추위를 이기지 못할 것 같구나.
起舞弄淸影 일어나 춤추며 맑은 그림자 희롱하면
何似在人間 어찌 인간 세상과 같으랴?
轉朱閣 화려한 누각 맴돌며
低綺戶 비단 바른 창에 이르러
照無眠 잠 못 이루도록 비추는구나.
不應有恨 나를 미워할 리도 없는데
何事長向別時圓 왜 언제나 이별할 때에만 둥글어지는지!
人有悲歡離合 인간 세상에는 만나고 해어지는 희비가 있고
月有陰晴圓缺 달에는 흐리고 밝게 차고 기우는 일 있는데
此事古難全 이것은 예로부터 완전하기 어려웠으니
但願人長久 그저 오래 살면서
千里共嬋娟 천 리 먼 곳에서나마 이 아름다운 달빛 함께 했으면!
이 작품은 자신의 아우이면서도 문단의 지기(知己)였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의 스승이자 벗이기도 했던 소철(蘇轍)을 그리며 보름날 달밤에 지은 것이다. 소식의 운명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오대시안(烏臺詩案)’이 일어났을 때 소철은 자신까지 연루될 위험을 무릅쓰고 형을 변호했고, 만년에 해남(海南)으로 폄적되어 떠나는 형을 위해 기꺼이 거액의 여비를 건네줌으로써 형제의 돈독한 우애를 확인해주었다. 그런 아우를 그리는 마음이 절절하게 담긴 이 작품은 그러나 기구한 인생살이에 지쳐 위축되어버린 소식의 심경을 드러낸다. 그 때문에 ‘바람을 타고 돌아가야 할’ 자신의 고향, 천상의 신선 세계도 ‘추위를 이기지 못할까 두려운’ 곳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미지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전혀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관조하는 이백의 태도와 씁쓸한 대조를 이룬다. 특히 두 작품의 마지막 두 구절은 서로 비슷한 듯하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유유한 시간 속에서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 인생의 의미를 인정한 이백이 가무를 즐기며 술잔 속에 비치는 달빛으로 그 짧은 인생에 영원한 빛을 부여하는 데에 비해, 소식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삶을 즐기기를 축원하며 그 아름다움을 혈육과 공유하고자 한다. 인간 세상에서 지기를 찾지 못해 “술잔 들고 명월을 초대해, 그림자 마주하고 셋이 되어[〈月下獨酌〉: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 노닐던 이백이 세계를 자신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에 비해, 소식은 보편적인 인간의 관점으로 확장시켜놓았다. 그 결과 이백의 궁극적인 지향이 짧고 덧없는 인생을 넘어선 영원한 우주 혹은 초월적인 신선 세계인 데에 비해, 소식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우주의 원리에 대한 도전을 포기한 채 자연의 혜택을 즐기며 발을 딛고 사는 인간 세계 자체에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백은 고독한 항아의 벗이 되기를 희망하고, 소식은 천 리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아우와 자신을 연결해주는 달빛의 은택을 기원하는 것이다.
달 얘기가 나왔으니, 옛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현대의 시인 원이둬[聞一多]까지도 천고(千古)의 절창으로 칭송한 바 있는 장약허(張若虛: 660?~720?)의 〈춘강화월야(春江花月夜)〉를 빼놓을 수 없겠다.
春江潮水連海平 봄 장강의 조수는 바다와 고르게 이어지고
海上明月共潮生 바다 위에 명월이 조수와 함께 떠오른다.
灔灔隨波千萬里 반짝이며 일렁이는 물결 천만 리에 펼쳐지는데
何處春江無月明 봄 장강 어디엔들 명월이 비치지 않으랴?
江流宛轉繞芳甸 강 물결 맴돌아 향기로운 들판 감아 흐르고
月照花林皆似霰 꽃 숲에 달빛 비쳐 모두 눈송이 같구나.
空里流霜不覺飛 허공에 흐르는 서리 어느새 날고 있어
汀上白沙看不見 섬 위의 하얀 모래밭 보이지 않는구나.
江天一色無纖塵 강과 하늘이 같은 색에다 먼지 한 점 없나니
皎皎空中孤月輪 공중에 외로운 달만 환히 빛난다.
江畔何人初見月 강가에서 처음 달을 본 이 누구인가?
江月何年初照人 강 위의 달은 언제 처음 사람을 비추었나?
人生代代無窮已 인생은 대대로 끝없이 이어지는데
江月年年只相似 강 위의 달은 해마다 비슷하기만 하지.
不知江月待何人 강 위의 달이 누구를 기다리는지는 몰라도
但見長江送流水 장강은 그저 물길만 흘려보내지.
白雲一片去悠悠 흰 구름 한 조각 유유히 떠가니
靑楓浦上不勝愁 청풍포에서는 시름을 견디지 못하지.
誰家今夜扁舟子 오늘밤 조각배 타고 떠도는 이 누구인가?
何處相思明月樓 어느 땅 달빛 비치는 누각에서 그리움에 젖을까?
可憐樓上月徘徊 가련하게도 누각 위엔 달이 맴돌며
應照離人粧鏡臺 떠나온 이의 화장대를 비추고 있으리라.
玉户簾中卷不去 규방의 주렴 속에서도 걷어내지 못하고
搗衣砧上拂還來 다듬잇돌 위에서 쓸어내도 다시 찾아오지.
此時相望不相聞 이때는 서로 그리워해도 목소리는 듣지 못하니
願逐月華流照君 달빛 따라 찾아가 그대를 비추었으면!
鴻雁長飛光不度 기러기 멀리 날아도 달빛을 건너지는 못하고
魚龍潛躍水成文 물고기와 용이 물속에서 뛰니 수면에 파문 생기지.
昨夜閑潭夢落花 간밤에 고요한 연못에선 꿈속에 꽃이 졌고
可憐春半不還家 가련하게도 봄은 저물어 가는데 집에 돌아오지 않는구나.
江水流春去欲盡 강물은 봄을 흘려보내 거의 다해 가고
江潭落月復西斜 강과 못에 달이 지며 다시 서쪽으로 기우는구나.
斜月沉沉藏海霧 기우는 달은 해무에 깊숙이 숨고
碣石瀟湘無限路 갈석산과 소상강에 길은 끝이 없구나.
不知乘月幾人歸 달빛 타고 돌아가는 이 몇이나 될까?
落月搖情滿江樹 지는 달은 그리움 자극하며 강과 숲에 가득하구나!
청풍포(靑楓浦)는 지금의 후난 성[湖南省] 류양[瀏陽]의 류수[瀏水]에 있는 나루터 이름이다. 옛날에는 종종 이별의 장소를 대표하는 뜻으로 쓰였다. 갈석산(碣石山)은 후베이 성[湖北省] 창리 현[昌黎縣] 서북쪽에 있다. 또 상수(湘水)는 후난 성 링링 현[零陵縣]에 이르러 소수(瀟水)와 합쳐지기 때문에, 이 지역의 강물을 소상강(瀟湘江)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갈석산과 소상강은 남북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달은 떠올랐다가 하늘 높이 걸리고, 다시 서쪽으로 기울어서 마침내 완전히 지기까지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이른바 ‘정경교융(情景交融)’의 시경(詩境)을 이루어내고 있다.
전반부 8구절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시점을 이동하면서 아득한 하늘에 홀로 뜬 달로 묘사를 집중해간다. 그리고 청명한 천지와 우주를 마주하며 시인은 인생의 철리(哲理)와 우주의 오묘한 비밀을 사색한다. “강가에서 처음 달을 본 사람은 누구이며, 달은 언제 처음 사람을 비추었나?”라는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질문은 대답 대신 “대대로 끝없이 이어지는 인생을 비추는 달빛은 해마다 그저 비슷하기만 할 뿐”이고, “강 위의 달이 누구를 기다리는지는 모르지만 그저 보이는 것이라곤 강물을 흘려보내는 장강의 모습뿐”이라는 담담한 서술로 끝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서술 속에 짧은 인생에 대한 희미한 서글픔의 흔적이 있지만, 그것이 결코 염세적인 절망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시인은 영원히 변함없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짧은 인생의 위안을 얻고 있는 것이다. 9번째 구절부터 끝까지는 집을 떠난 사랑하는 이를 그리며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젊은 여인의 정서를 묘사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그리움은 어쩌면 유행가에서도 자주 언급하는 상투적이고 평범한 것이지만, 시의 전반부에서 예사롭지 않은 우주와 인생에 대한 사색을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런 평범한 감정까지도 예사롭지 않게 변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시인은 무한하고 무궁한 우주에 비해 짧고 유한한 인생이기에 행복은 더욱 소중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긍정적인 인생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남송(南宋) 신기질(辛棄疾: 1140~1207)의 〈목란화만(木蘭花慢)〉은 뜨는 달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지는 달을 보내는 상황을 노래한 특이한 구상과 〈천문〉의 형식을 빌려 전체가 질문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또한 그 질문은 기본적으로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中秋飮酒將旦, 客謂前人詩詞有賦待月, 無送月者, 因用〈天問〉體賦. 중추절에 술을 마시다가 날이 밝아오는데, 손님이 옛 사람의 시사에 달을 기다리는 것만 있지 달을 보내는 것은 없다고 하기에 〈천문〉의 형식으로 쓰다.
可憐今夕月 사랑스러운 오늘밤의 달은
向何處 어디를 향해
去悠悠 유유히 가는가?
是別有人間 또 다른 인간 세계가 있어
那邊才見 그곳에서는 곧 볼 수 있을까
光景東頭 동쪽에서 떠오르는 모습을?
是天外 하늘 밖
空汗漫 아득한 창공에서
但長風浩浩送中秋 먼 바람만이 한가위의 달을 전송하는가?
飛鏡無根誰繫 뿌리도 없이 하늘을 나는 거울은 누가 묶어 놓았나?
姮娥不嫁誰留 시집가지 않는 항아는 누가 붙들어두고 있는가?
謂經海底問無由 바다 밑을 지난다고 하는데 물어도 이유를 모르겠나니
恍惚使人愁 어리둥절 시름겹게 만드는구나.
怕萬里長鯨 거대한 고래가
縱橫觸破 함부로 들이받아
玉殿瓊樓 아름다운 건물과 누각 부수지나 않을까?
虾蟆故堪浴水 두꺼비는 본래 물에 잠기는 걸 감당할 수 있지만
問云何玉兎解沉浮 옥토끼는 어떻게 수영을 배웠을까?
若道都齊無恙 모두가 무사하다면
云何漸漸如鉤 어째서 점점 고리처럼 굽어지는가?
사랑스러운 달은 져서 어디로 가는가? 혹시 또 다른 인간 세계가 있어서 그곳에서는 이제 곧 뜨는 달을 볼 수 있을까? 하늘 바깥의 한없이 공활한 곳에서 바람만이 전송하는 그 달은 뿌리도 없는데 누가 공중에 매달아놓았을까? 달 속의 항아가 시집가지 않는 것은 누가 붙들고 있기 때문일까? 달은 바다 밑을 지난다고 하던데 그러면 거대한 고래가 들이받아 달 속의 화려한 건물들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그리고 달이 바다 밑에 잠기면 물에 익숙한 두꺼비는 괜찮겠지만 수영도 못하는 옥토끼는 어쩌란 말인가? 설령 그래도 전혀 문제가 없다면 둥근 달은 왜 점점 고리 모양으로 변하는가?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논외로 치고 보면, 자유분방하고 기발한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재치 있는 질문들이 숨 가쁘게 이어진다. 가히 남송(南宋) 호방파(豪放派) 사인(詞人)의 노래다운 호쾌함마저 담겨 있다. 〈목란화만〉은 원래 당나라 때 교방(敎坊)에서 사용하던 악곡 이름으로서, 훗날 사패(詞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술잔을 들고 달에게 묻는 것은 결국 우주와 인생의 의미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의 표출이자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대자연의 일부로서 그것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면서도 종종 생로병사의 짧고 유한한 삶에 대해 아쉬움과 회한을 가진다. 또한 짧은 인생 속에서도 단순히 먹고 사는 수준을 넘어선 부귀영화와 명예를 위한 치열한 경쟁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인생의 기구한 여정을 달관하기란 쉽지 않지만, 적어도 동진(東晉)의 도잠(陶潛)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그의 걸작 가운데 하나인 〈신석(神釋)〉에서 도잠은 이렇게 설파했다.
大鈞無私力 조물주는 사적으로 힘을 쓰지 않으니
萬理自森著 모든 사물 저절로 번성하지.
人爲三才中 사람은 삼재 가운데 하나이거늘
豈不以我故 어찌 나로 인해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與君雖異物 그대들과는 비록 모습이 다르지만
生而相依附 태어나 서로 의존하며 붙어살지.
結托善惡同 서로 의지해 살기는 선악이 마찬가지이거늘
安得不相語 어찌 서로 얘기조차 나누지 않을 수 있으랴?
三皇大聖人 삼황은 위대한 성인이었지만
今復在何處 지금은 다시 어디에 있는가?
彭祖愛永年 팽조는 오래 사는 것 좋아했지만
欲留不得住 인간 세상에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지.
老少同一死 늙은이나 젊은이나 죽기는 마찬가지요
賢愚無復數 현명하고 어리석은 것도 더 이상 운명이 아니지.
日醉或能忘 날마다 취해 있으면 잊을 수도 있으니
將非促齡具 수명을 단축시키는 물건만은 아닌 게지!
立善常所欣 선한 일이야 늘 기꺼워하는 바이지만
誰當爲汝譽 누가 그대를 칭찬해주랴?
甚念傷吾生 내 목숨 해치게 될까 염려하여 무엇 하리?
正宜委運去 마땅히 자연의 순리에 따라야지.
縱浪大化中 대자연의 변화 속에 자유자재로 노닐면서
不喜亦不惧 기뻐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지라.
應盡便須盡 죽어야 한다면 죽게 마련이니
無復獨多慮 혼자 너무 많은 걱정 하지 말게나!
by 백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