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즈카이豊子愷-얼굴顔面

얼굴

사람들이 얘기하고 토론하는 자리에선, 그들이 하는 말의 뜻을 들으려고 하기보단, 그 얼굴의 변화를 보는 게 훨씬 재미있다. 또한 얼굴의 변화를 통해 각각의 심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복잡미묘한 감정이라는 것이야말로 흔히 그저 어떤 의미를 내포한 말로 표현되는 게 아니라, “표정을 만드는”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다. 입으로는 “그렇소”라고 말하면서도 얼굴에는 명명백백 “아니오”란 것이 드러나는 괴이한 일까지 있다. 총명한 상대방 역시 그의 말을 듣고서가 아니라 그저 그의 안색만을 살펴봄으로써 그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이 총명한 상대방이 되고 싶은 건 아니다. 나는 사람의 얼굴을 마치 하나의 조각판처럼 보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얼굴을 늘 보다 보면, 얼굴은 당연히 현재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자세히 응시하면, 얼굴은 참으로 이상한 것임을 느낀다. 누구나 똑같이 한 평면에 두 눈, 두 눈썹, 입 하나, 코 하나가 배열되어 있지만, 저마다 모양이 다르다. 같은 얼굴에도 또한 희, 노, 애, 락, 질투, 동정, 냉담, 음험, 당황, 부끄러움…… 등 천만 가지 표정이 있다. 사전에 수록된 감정과 관련된 형용사를 얼굴에서 모두 드러낼 수 있다. 그렇게 수많은 차이가 나는 원인을 따져보아도, 결국 몇 치 넓이 조각판에서의 모양과 색깔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오관(五官)을 놓고 보면, 얼굴 표정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류의 야수적 형상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귀’라던 어떤 문학가의 말이 기억난다. 예전에 큰 종이를 한 장 갖다가 가운데에 둥글게 구멍을 내서 한 친구의 귀에 걸고, 오로지 귀만의 생김새를 본 적이 있었다. 한참 보고 있자니, 그게 귀라는 걸 모르고, 갈수록 무섭게 느껴졌다. 이는 아마 귀가 줄곧 구레나룻 뒤쪽에 숨어 있어 평소 얼굴 표정의 무대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일본의 문학가 아쿠타카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만이 “조가비처럼 영롱하고 새하얗다”라며 중국 여인의 귀에 경의를 나타낸 적이 있다. 그러나 귀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역시 구레나룻 뒤쪽에 자리한 옥란화(玉蘭花)라고나 할까, 장식물에 불과할 뿐, 표정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다. 사실 귀는 얼굴의 주변에 자리잡고 있어, 단지 얼굴이란 부조 조각판의 두 고리 손잡이 정도나 될까, 부조판의 범위 안에 들지는 못한다.

얼굴이란 부조판 안에서, 얼굴 중의 북극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코다. 중앙에 떡 고정되어, 눈썹, 눈, 입 등이 한결같이 코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갖가지 표정을 만든다. 눈썹은 위쪽에 위치하여, 형태는 비교적 간단하지만 눈과 표리 관계를 이루고 있어서, 눈의 반주자 역할을 한다. “얼굴 표정”의 주요 선율을 연주하는 주인공은 눈과 입이다. 눈과 입은 성질이 다르다. (옛날 동진(東晉) 시대 유명한 화가) 고개지(顧愷之)는 “실감나게 그렸느냐 못 그렸느냐의 관건은 바로 눈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그릴 때마다 몇 년 동안 차마 눈을 그려넣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자면, 가장 풍부하게 표정을 연출하는 것이 눈이다. 그러나 입도 만만치 않다. 초상화가 실제 그 사람을 닮았는지 아닌지가 흔히 입에 의해 결정되곤 한다. 분필로 칠판에 임의로 얼굴을 하나 그려놓고, 입의 모양, 크기, 두께, 곡선, 방향, 위치 등을 조금 바꿔보면, 갖가지 완전히 다른 표정이 나온다. 그러므로 얼굴 표정에서 눈과 입이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눈은 “색깔”과 관계가 있고 입은 “모양”과 관계가 있다. 눈은 그 위치를 옮기지는 못하지만, 푸른 눈, 하얀 눈…… 여러 색의 눈이 있다. 입은 비록 색은 없다지만, 오관(五官) 중에서 모양과 위치의 변화가 가장 다양하다. 얼굴을 하나의 가정으로 보면, 입은 남자, 눈은 여자이다. 두 가지가 항상 어울리며, 이 가정의 여러 생활 모습을 만들어낸다.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얼굴 구조의 본질 문제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라고 가정하면, 신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어떤 이치를 따라서 얼굴을 만들었을까? 아니면 임의로 만들었을까? 오관(五官)의 모양을 만들고 위치를 배열한 방법은 필연이었을까? 아니면 우연이었을까? 생리적으로 말하면, 아마도 실용의 원칙에 맞게 했을 게다. 이를테면 눈을 보호하라고 눈썹을 눈 위에 배치했다거나, 미각을 도우라고 코를 입 위에 배치했다거나…… 그러나 조형적으로 말하면, 꼭 그렇게 일률적일 필요가 있을까? 실용적으로도 편한 또 다른 배열법이 있었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이 얼굴임을 인정하고 그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갖가지 동물의 얼굴 역시 또 다른 실용적 원칙을 따라서 모양을 만들고 위치를 배열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의 얼굴에서도 마찬가지로 표정을 볼 수 있다. 동물의 얼굴은 근육이 대부분 잘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 얼굴만큼 표정이 풍부하지 못할 뿐이다. 개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갖가지 개의 생김새 또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평소에 각 개의 차이를 말살해버리고, ‘개’라는 한 가지 개념으로 아우르곤 한다. 개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그 모습을 관찰하려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어린 시절 처음 상해(上海)에 가서, 서양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때도 그랬었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인데다, 게다가 제복 입은 조계(租界) 경찰들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 어머니가 매년 상해에 한두 차례 오시는데, 서양 사람을 보실 때마다 “이 냥반 또 보는구만”이라고 말씀하신다. — 사실 서양 사람이나 인도 사람이 나를 보아도 아마 똑같을 것이다. 이는 각각 황인종 백인종 인종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본 사람이나 한국 사람을 볼 때는 이런 느낌이 없다. 이런 인종의 차이를 의식하지 않고 분별하려는 마음을 넓혀나가 금수(禽獸)까지 이른다면, 금수의 모습도 분별하여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나로서는 사람 얼굴의 모양과 위치가 반드시 지금의 배열 방법대로여야 하는 건 아니며 우연히 이렇게 배열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다른 배열 방법으로 했다 해도 마찬가지로 표정이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린 현재 상태의 얼굴을 보는 것에 이미 오랫동안 익숙하여, 이런 얼굴의 표정을 분별하여 알아보는 능력이 특히 풍부하고 섬세하게 된 것일 뿐이다.

특별히 눈이 잘 훈련된 예술가, 특히 화가들은 얼굴 표정 식별력을 넓혀나가, 자연계 일체의 생물과 무생물에서도 갖가지 표정을 잘 본다. 이로부터 ‘의인화’의 시각이 생긴다. 복사꽃에서 웃는 얼굴을 보고, 연꽃에서 화장한 얼굴을 본다. 독일의 이상파 화가 보크린(Bocklin)은 파도를 묘사하면서, 큰 파도가 작은 물결을 삼켜버리는 것을 상징하여, 마왕이 연약한 여자를 따라가 덮치는 모습으로 그려냈다. 이건 ‘의인화’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화가가 아닌 보통 사람이라도, 얼굴 표정 보는 법을 일체 자연계에 응용하면 만물의 표정을 볼 수 있다.

어떤 아이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피아노 덮개를 여니까, 입 안 가득 가지런하고 새하얀 이가 보이는 누구누구하고 똑같네요.”

“잉크병은 이웃집 뚱뚱한 아줌마같아요.”

나는 그 아이의 풍부한 조형 감성에 탄복했다. 아이는 어른에 비해 개념이 약하고 직관이 강하다. 그래서 무얼 보면 의인화 인상이 더욱 많고, 만물의 진상을 잘 본다. 예술가는 바로 아이의 이런 직관 감성을 배운다. 예술가는 자연에서 생명을 봐야 한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서 자기를 발견해야 한다. 그래서 동화된 마음이 일체의 자연에 이르도록 넓혀가서, 일체의 자연을 정(情)이 있는 것으로 아울러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얼굴에만 표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눈 밝은 사람의 눈에는 얼굴의 표정과 마찬가지로 이름없는 모양, 의미없는 배열에도 모두 뚜렷하고 다채로운 표정이 있다. 중국의 서예가 바로 그 예이다.

(1928년 예수 성탄 열흘 전 강만(江灣) 연연당에서)
(1929년 2월 10일 <소설월보> 제20권 제2호)

顔面

在人们谈话议论的坐席中,与其听他们言辞的意义,不如看他们颜面的变化,兴味好得多,且在实际上,也可以更深切地了解各人的心理。因为感情的复杂深刻的部分,往往为理义的言说所不能表出,而在“造形的”脸色上历历地披露着。不但如此,尽有口上说“是”而脸上明明表出“非”的怪事。聪明的对手也能不听其言辞而但窥其脸色,正确地会得其心理。然而我并不想做这种聪明的对手,我最欢喜当作雕刻或纸脸具看人的脸孔。

看惯了脸,以为脸当然如此。但仔细凝视,就觉得颜面是很奇怪的一种形象。同是两眼,两眉,一口,一鼻排列在一个面中,而有万人各不相同的形式。同一颜面中,又有喜,怒,哀,乐,嫉妒,同情,冷淡,阴险,仓皇,忸怩……千万种表情。凡词典内所有的一切感情的形容词,在颜面上都可表演。推究其差别的原因,不外乎这数寸宽广的浮雕板中的形状与色彩的变化而已。

就五官而论,耳朵在表情上全然无用。记得某文学家说,耳朵的形状最表出人类的兽相。我从前曾经取一大张纸,在其中央剪出一洞,套在一个朋友的耳朵上,而单独地观看耳朵的姿态,久之不认识其为耳朵,而越觉得可怕。这大概是为了耳朵一向躲在鬓边,素不登颜面表情的舞台的缘故。只有日本文学家芥川龙之介对于中国女子的耳朵表示敬意,说玲珑而洁白像贝壳。然耳朵无论如何美好,也不过像鬓边的玉兰花一类的装饰物而已,与表情全无关系。实际,耳朵位在脸的边上,只能当做这浮雕板的两个环子,不入浮雕范围之内。

在浮雕的版图内,鼻可说是颜面中的北辰,固定在中央。眉,眼,口,均以它为中心而活动,而做出各种表情。眉位在上方,形态简单;然与眼有表里的关系,处于眼的伴奏者的地位。演奏“颜面表情”的主要旋律的,是眼与口。二者的性质又不相同:照顾恺之的意见,“传神写照,正在阿堵之中”,故其画人常数年不点睛,说“点睛便欲飞去”,则眼是最富于表情的。然而口也不差:肖像画得似否,口的关系居多;试用粉笔在黑板上任意画一颜面,而仅变更其口的形状,大小,厚薄,弯度,方向,地位,可得各种完全不同的表情。故我以为眼与口在颜面表情上同样重要,眼是“色的”;口是“形的”。眼不能移动位置,但有青眼白眼等种种眼色;口虽没有色,但形状与位置的变动在五官中最为剧烈。倘把颜面看作一个家庭,则口是男性的,眼是女性的,两者常常协力而作出这家庭生活中的诸相。

然更进一步,我就要想到颜面构造的本质的问题。神造人的时候,颜面的创作是根据某种定理的,抑任意造出的?即颜面中的五官形状与位置的排法是必然的,抑偶然的?从生理上说来,也许是合于实用原则的,例如眉生在眼上,可以保护眼;鼻生在口上,可以帮助味觉。但从造形上说来,不必一定,苟有别种便于实用的排列法,我们也可同样地承认其为颜面,而看出其中的表情。

各种动物的颜面,便得按照别种实用的原则而变更其形状与位置的。我们在动物的颜面中,一样可以看出表情,不过其脸上的筋肉不动,远不及人面的表情丰富而已。试仔细辨察狗的颜面,可知各狗的相貌也各不相同。我们平常往往以“狗”的一个概念抹杀各狗的差别,难得有人尊重狗的个性,而费心辨察它们的相貌。这犹之我小时候初到上海,第一次看见西洋人,觉得面孔个个一样,红头巡捕尤其如此——我的母亲每年来上海一二次,看见西洋人总说“这个人又来了”,实则西洋人与印度人看我们,恐怕也是这样。这全是黄白异种的缘故,我们看日本人或朝鲜人就没有这种感觉。这异种的范围推广起来,及于禽兽的时候,即可辨识禽兽的相貌。所以照我想来,人的颜面的形状与位置不一定要照现在的排法,不过偶然排成这样而已。倘变换一种排法,同样地有表情。只因我们久已看惯了现在状态的颜面,故对于这种颜面的表情,辨识力特别丰富又精细而已。

至于眼睛有特殊训练的艺术家,尤其是画家,就能推广其对于颜面表情的辨识力,而在自然界一切生物及无生物中看出种种表情。“拟人化”的看法即由此而生。在桃花中看出笑颜,在莲花中看出粉脸,又如德国理想派画家勃克林,其描写波涛,曾画魔王追扑一弱女,以象征大波吞没小浪,这可谓拟人化的极致了。就是非画家的普通人,倘能应用其对于颜面的看法于一切自然界,也可看到物象表情。有一个小孩子曾经发现开盖的洋琴的相貌好像露出一口整齐而洁白的牙齿的某先生,威迪文的墨水瓶姿态像邻家的肥胖的妇人。我叹佩这孩子对造形的敏感。孩子比大人,概念弱而直观强,故所见更多拟人的印象,容易看见物象的真相。艺术家就是学习孩子们这种看法的。艺术家要在自然中看出生命,要在一草一木中发现自己,故必推广其同情心,普及于一切自然,有情化一切自然。

这样说来,不但颜面有表情而已;无名的形状,无意义的排列,在明者的眼中都有表情,与颜面表情一样地明显而复杂。中国的书法便是其中一例。西洋现代的立体派等新兴美术又是其一例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