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주서암에게 답하다答周西巖

주서암에게 답하다答周西巖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1을 갖추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않은 사물 또한 하나도 없다. 그런데 언제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지만 다만 스스로 그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다. 그렇지만 또한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오직 흙․나무․기와․돌 등의 사물에게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 없는 이유는 그것들이 무생물이기 때문에 말해주기가 어렵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모자란 사람처럼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생명 있는 중생이기 때문에 말해주기가 어렵다.2 이 두 부류 이외에는 비록 소․말․나귀․낙타 같은 것들이라 해도, 그것들이 깊은 시름에 잠기고 고통받는 때를 맞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려주지 못할 것이 없고, 불성(佛性)에 대하여 말해주지 못할 것이 없다.

그3의 견해에 의거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고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지 않는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것이 곧 부처이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지 않은 것은 곧 부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반평생 이전에 행동하고 처신했던 것은 모두 누구의 주장에 따른 것인가? 혹시 《역경》에서 말한 대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에 따라 살면서도 깨닫지 못한다”4는 것이 아니겠는가? 알지 못한 것은 그래도 그럴 수 있다지만, 더욱이 스스로 지금은 부처가 될 수 없다고 인정하다니. 지금 부처가 없다면 다른 때는 또 어떻게 해서 부처가 있을 수 있는가? 만약 다른 때에 부처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부처가 정말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가 되지 않은 지금 이 때에는 부처가 또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어떤 때는 있다고 하고 어떤 때는 없다고 하고, 이런 것은 기성의 지식에 의해 분별하여 제멋대로 있다고도 하고 없다고도 하는 것일 따름이며, 정말로 ‘너라는 부처’[汝佛]5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또한 스스로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역시 스스로 자신의 이 생에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나는 그가 어떻게 스스로 이 세상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설 수 없다면 스스로 편안히 여길 수도 없다. 스스로 편안히 여길 수 없으면, 집에 있을 때는 집을 편안히 여기지 못하고, 마을에 있을 때는 마을을 편안히 여기지 못하고, 조정에 있을 때는 조정을 편안히 여기지 못한다. 나는 그가 어떻게 나날을 보내고 어떻게 남들 앞에 얼굴을 내미는지 모르겠다. 나는, 설령 아무리 겸양한다고 해도, 결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사람이 되었는데, 어찌 부처가 되지 못한다 하여 또 다른 날을 기다린단 말인가? 세상에 사람 이외에 무슨 부처가 있으며 부처 이외에 무슨 사람이 있는가? 만약 굳이 벼슬하고 혼인하는 일들이 모두 끝난 다음에 불도를 배워야 한다면, 부처가 되려면 반드시 아무 일도 없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일이 부처가 되는 데 장애가 된다는 말이다. 일이 있을 때는 부처가 될 수 없다면, 이는 부처가 일에 아무 보탬이 없다는 말이다. 부처가 일에 아무 보탬이 없다면 부처는 되어서 무엇하겠는가? 일이 부처에 장애가 된다면 부처 또한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는 말이니, 이 어찌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니란 말인가? 때가 되기를 기다려야 한다면 몇 억 또는 몇 천만 겁(劫)을 기다려야 할지 모를 일이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로다!

(권1)

1 원문의 용어는 ‘생지’(生知)이다. 이 용어는 《논어》 <계씨>와 《중용》 등에 나오는 ‘태어나면서부터 안다’[生而知之]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원래는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세상의 이치를 저절로 깨달을 수 있는 성인의 경지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이와 대비되는 말로는 ‘학지’(學知)와 ‘곤지’(困知)가 있는데, 이는 각각 ‘배워서 아는 것’과 ‘고생한 뒤에야 아는 것’을 뜻하며 고대 사회에서 인간을 계층적으로 이해했던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이 개념은 뒤에 인간의 본성[性] 안에 보편적인 이치[理]가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다는 주자학과 그 이치가 바로 양지(良知)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양명학, 그리고 세상 만물은 모두 불성(佛性)과 반야지(般若智)를 가지고 있다는 불교의 논리를 거쳐서 ‘생지’는 이지에 이르러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선천적 능력’으로 다시 정의되기에 이른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하나는 상제(上帝)․천(天)․천명(天命)․태극(太極)․이(理) 등으로 표상되던 ‘절대 보편’을 인간 본연의 생기발랄한 본성과 일치시켰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러한 본성을 가지는 유(類)를 인간으로부터 만물로 확장시켰다는 점이다. 전자는 양명학의 영향을, 후자는 당(唐) 중기 이후 성행했던 비정성불설(非情成佛說)의 영향을 받아, 그것들을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본성은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으며, 누구나 성인이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동심설>(童心說)에서는 이러한 본성이 도리(道理)와 견문(見聞)에 의해서 가려져 있는 현실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결국 ‘생지’(生知)와 ‘진심’(眞心)․‘불성’(佛性)․‘동심’(童心)․‘본심’(本心) 등은 모두 같은 대상을 가리키면서 저마다의 문맥에 따라서 그 뉘앙스를 달리한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2 둘 다 불교 용어이다. 원문의 ‘유정’(有情)은 범어로 ‘사트바’(Sattva)이며 바로 생명 있는 존재, 곧 ‘중생’(衆生)을 가리킨다. ‘무정’(無情)은 범어로 이와 반대로 생명이 없는 존재, 곧 ‘무생물’을 가리킨다.

3 원문의 글자는 거(渠)이다. 거는 3인칭 대명사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누구를 지칭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4 《역경》 《계사상》(繫辭上)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음과 양이 상호 작용하여 만물이 생장소멸하고 우주가 운행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이를 이어받는 것이 선(善)이요, 이를 완성하는 것이 성(性)이다. 어진 사람은 그 도가 인(仁)이라고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 도가 지(知)라고 한다. 일반 보통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에 따라 살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를 이루는 사람이 드문 것이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仁者見之, 謂之仁, 知者見之, 謂之知, 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卓吾論略”

5 원문의 ‘여불’(汝佛)을 ‘너라는 부처’로 번역했다. 이 글의 전체적 요지는 부처란 개개의 인간과 구별되는 어떤 것도 아니고, 부처가 된다[成佛]는 것 역시 객관적으로 정해진 어떤 모습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바로 부처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여불’(汝佛) 역시 인간 개개인과 부처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선가(禪家) 특유의 호칭으로 보인다.

卷一 書答 答周西岩

天下無一人不生知,無一物不生知,亦無一刻不生知者,但自不知耳,然又未嘗不可使之知也。惟是土木瓦石不可使知者,以其無情,難告語也;賢智愚不肖不可使知者,以其有情,難告語也。除是二種,則雖牛馬驢駝等,當其深愁痛苦之時,無不可告以生知,語以佛乘也。

據渠見處,恰似有人生知,又有人不生知。生知者便是佛,非生知者未便是佛。我不識渠半生以前所作所為,皆是誰主張乎?不幾于日用而不知乎?不知尚可,更自謂目前不敢冒認作佛。既目前無佛,他日又安得有佛也?若他日作佛時,佛方真有,則今日不作佛時,佛又何處去也?或有或無,自是識心分別,妄為有無,非汝佛有有有無也明矣。

且既自謂不能成佛矣,亦可自謂此生不能成人乎?吾不知何以自立于天地之間也。既無以自立,則無以自安。無以自安,則在家無以安家,在鄉無以安鄉,在朝廷無以安朝廷。吾又不知何以度日,何以面于人也。吾恐縱謙讓,決不肯自謂我不成人也審矣。既成人矣,又何佛不成,而更等待他日乎?天下甯有人外之佛,佛外之人乎?若必待仕宦婚嫁事畢然後學佛,則是成佛必待無事,是事有礙于佛也。有事未得作佛,是佛無益于事也。佛無益于事,成佛何為乎?事有礙于佛,佛亦不中用矣,豈不深可笑哉?才等待,便千萬億劫,可畏也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