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을 관사에서 강산을 바라보며 郡齋平望江山/당唐 잠삼岑參
水路東連楚 물길은 동으로 초와 이어지고
人煙北接巴 인가는 북으로 파와 접하였네
山光圍一郡 산 빛은 온 고을을 빙 두르고
江月照千家 강에 비친 달 천가를 비추네
庭樹純栽橘 마당엔 모두 귤나무를 심었고
園畦半種茶 농원엔 절반 차나무를 심었네
夢魂知憶處 꿈의 혼도 그리운 곳 알아서
無夜不京華 밤이면 밤마다 장안으로 가네
잠삼(岑參, 718?~769?)은 하남성 남양(南陽) 사람으로 경서와 역사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뜻도 고원하였는데 과거 급제 이후 주로 변방에 나가서 근무하는 때가 많아 주로 변새시를 많이 썼다. 그의 시는 매우 강개하고 격렬한 풍격을 띠고 있다. 잠삼의 행력을 살펴보면 749년에는 안서(安西)로 가서 고구려 유민 출신 장군인 절도사 고선지(高仙芝)의 막하에서 서기로 일하기도 했다.
잠삼은 52세로 타향인 성도(成都)에서 죽었는데 이 시는 바로 죽기 1년 전 가주(嘉州) 자사를 할 때 지은 시이다. 《영규율수(瀛奎律髓)》에는 이 당시 잠삼이 건위(犍爲)에서 목사를 했다고 주석을 달아 놓고 또 시 뒤에 가주 자사(嘉州刺史) 때 지은 시라 해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조사해 보니 본래 이 지역이 소동파의 고향인 미산(眉山)과 인접해 있는데 본래 미산군(眉山郡)이었다가 천보 원년(749)년에 가주건위군(嘉州犍爲郡)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니, 결국 가주 자사를 한다는 말이나 건위 목사를 한다는 말이나 그 실체는 동일한 것이라 그렇게 적어 놓은 것이다. 이 당시 관할 치소(治所 고을 관아)는 용유(龍游)란 곳에 있었는데 바로 지금의 낙산(樂山)에 해당한다.
제목의 군재(郡齋)는 고을의 정무를 보는 관아나 동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령이 편안히 거처하는 관사를 말한다. 평망(平望)은 위로 보는 앙시(仰視)나 아래로 보는 부감시(俯瞰視)가 아니라 눈과 같은 높이로 멀리 내다보는 것을 말한다.
낙산에는 낙산대불(樂山大佛)이라는 유명한 명승지가 있다. 이 낙산대불 앞으로 북, 서, 남 3방향에서 각각 문강(汶江), 청의수(靑衣水), 대도수(大渡水)가 흘러와 합쳐져 장강의 상류 명칭인 대강(大江)이 된다. 이곳에 대불을 조성한 이유도 이런 지형으로 말미암은 홍수를 불법에 의뢰하여 막아보기 위해서이다. 이 낙산 대불이 보는 방향, 즉 서쪽으로 멀리 수려한 아미산(峨嵋山)이 있다. 이 대불은 713년에 공사를 시작해 803년에 완공되었으니 잠삼이 이 시를 쓸 때는 대불 공사 중이었던 셈이다. 지금 이 시의 지형적 배경은 대강 이러하다.
이 약산에서 볼 때 동쪽은 옛날 초나라 지역인데 대강이 흘러가 장강이 되고, 북쪽으로는 지금의 중경은 파(巴)이고 성도는 촉(蜀)인데 남, 동, 서에 비해 사람이 많이 산다. 아미산은 3,099m로 매우 높은 산이다. 태산, 화산, 숭산 등은 내가 모두 새벽에 걸어 정상에 올라갔다가 그날 저녁에 내려왔지만 아미산은 신새벽에 올라가서 죽을 고생을 하고도 산 정상에는 이르지 못하고 버스 종점에 겨우 이른 적이 있다. 올라갈 때 중국 사람들이 보통 사흘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 이 아미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들이 고을을 분지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지금 그 산빛이 온 고을을 감싸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또 이 낙산은 3갈래의 물 가운데 있으니 그 물에 비친 달빛이 경내의 수많은 집을 비춘다고 말한 것이다.
이 지역엔 귤이 많이 나 집집마다 집 안에 다른 과일나무는 안 심고 오직 귤나무만 심는다고 하고, 밭에는 절반 정도는 차를 재배한다고 한다. 차는 안개가 많이 끼는 곳에 잘 자라므로 물길 사이에 위치한 이 고을은 차를 많은 심었던 모양이다. 아미산에도 안개가 많이 끼어 유명한 차가 생산된다.
옛날 사람은 잠을 자면 사람의 영혼이 몸에서 나와 돌아다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몽혼(夢魂)이란 말이 있는 것인데, 몽혼도 내가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서울 장안을 알고 그리워하는지 밤에 잠잘 때마다 장안으로 간다고 한다. 장안에 가는 꿈을 자주 꾼 것을 표현한 말이다.
잠삼은 이 당시 관직에서 파면되어 수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려 했으나 당시 성도 일대에서 일어난 난의 여파로 피난 가는 사람이 많아 길이 묶인 탓에 결국 성도로 왔다가 이 시를 지은 다음 해 769년 가을에 52세로 세상을 떠난다. 어떤 판본에 수로(水路)가 객로(客路)로 되어 있는 것은 그러한 실상을 반영한 것이다.
이 시는 장안과는 식생과 풍토가 전혀 다른 가주(嘉州)라는 곳에서 고향에는 가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잠삼의 마음이 그곳의 독특한 풍경, 식생과 어우러져 있다. 연구자들은 잠삼이 쓴 사경시(寫景詩)의 중요 풍격을 상청(尚清)과 기(奇)라는 말로 요약한다. 맑음을 숭상하고 신기한 것을 표현하기 좋아한다는 뜻이다. 이 시 역시 산 빛이 온 고을을 두르고 있고 강물에 비친 달빛이 마을을 비추고 있는 것이 청아한 것이라면 집집마다 뜰에 있는 귤나무와 텃밭에 있는 차나무는 신기한 경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시는 잠삼 사경시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365일 한시 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