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교에서 저녁에 바라보며洛橋晩望/당唐 맹교孟郊
天津橋下冰初結 천진교 다리 아래엔 얼음이 처음 얼고
洛陽陌上人行絕 낙양성 거리에는 나다니는 사람 없네
榆柳蕭疏樓閣閒 잎 진 비술나무 버드나무 조용한 누각
月明直見嵩山雪 밝은 달 아래 눈 덮인 숭산 바로 보이네
맹교(孟郊 : 751~814)는 절강성 호주(湖州) 무강(武康) 사람인데 선대가 낙양서 산 연고로 젊었을 때 숭산에서 은거한 적이 있다. 소식은 맹교의 시풍을 ‘차다[寒]’는 글자로 평가하였다. 이는 맹교가 생계를 돌보지 않아 가난하게 산 것과 관련이 있다. 한유는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서 ‘시대와 맞지 않아 불평(不平)하기 때문’이라 진단하였다. 당시 세속과 잘 맞지 않은 개결한 성품도 한 원인이었다.
맹교는 46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에 율양 위(溧陽尉)로 간 적이 있었다. 한유가 위의 글 마지막 부분에 말한 대로 맹교는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가보니 이름난 명승지들이 있어 맹교는 이런 곳을 찾아다니며 술을 먹고 금(琴)을 연주하고 시를 쓰느라 공무를 소홀히 했다. 현령이 이를 부주(府州) 장관에게 보고하여 대리 1명을 파견하는 대신 맹교의 급여를 절반으로 깎았다. 이런 일로 맹교는 벼슬을 그만두고 낙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낙양에서는 마침 문인 이고(李皐)가 날마다 술자리를 벌여 초대하고 절도사인 정여경(鄭餘慶)에게 소개해 주어 그의 참모로 일하다가 64세로 죽게 된다.
이런 일화에서 보듯이 맹교는 주로 자신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삶을 산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세상과 거리가 생기고 그에 따라 자연 가난하게 되며 시풍도 당시 유행하던 세속적인 경향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지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맹교의 시 중에서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천진교는 제목에 쓴 낙교를 말하는데 이는 본래 수양제가 건립한 것이다. 그는 낙양 도성에 낙수(洛水)를 끌어들이고는 이를 은하수에 비견하였기 때문에 천진(天津)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낙양을 ‘천상의 도시’, 즉 지상의 낙원으로 만들려고 한 의도를 알 수 있다. 조선도 고종 때 덕수궁 정문을 대한문(大漢門)이라 하였는데 이는 바로 한양을 천상의 도시로 새롭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작명이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은 왜 대한제국인데 한 나라 한(漢) 자를 쓰냐고 따지지만, 사실은 ‘한 나라 한(漢) 자’를 쓴 게 아니라 ‘은하수 한(漢) 자’를 쓴 것이다. 한양의 기원이 된 한강 자체가 은하수란 뜻이다.
이 시의 제목에 ‘망(望)’ 자를 썼는데 이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 시에서 ‘춘망’이나 ‘추망’ 등의 제목은 봄이나 가을에 멀리 바라보며 즉경(卽景), 즉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경물을 노래하고 또 그 속에 자신의 회포를 펼 때 붙인다. 봄이나 가을을 바라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명이나 누정 등 어떤 공간 뒤에 붙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제목의 낙교(洛橋)는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바라보는 장소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이 이 낙교는 독자를 배려하여 보다 넓고 지명도가 있는 말을 쓴 것이고 실제 바라보는 지점은 한가한 누각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천진교, 즉 낙교를 바라보는 것이다.
시인은 찾는 이 아무도 없는 누각에 올라 지금 이 시를 구상하고 있으니 이 점부터가 일반 시인과 다른 바로 맹교의 특징이다. 이 누각에서 보니 천진교 아래 흘러가는 낙수에 얼음이 언 것이 보인다. 이렇게 추운 날씨이니 누가 거리에 나다니겠는가? 그러니 다음 구에 길에 사람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예전에 길은 밭과 논 사이에 난 농로이기 때문에 그것이 그대로 도시에도 적용되어 도로 역시 밭두렁이라는 의미의 ‘맥(陌)’ 자를 쓰는 것이다. 얼음도 얼고 길에 사람도 없고 자신이 있는 누각을 둘러싼,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졌을 비술나무나 버드나무에는 이제 잎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무에 잎이 얼마 안 남은 소슬한 풍경을 ‘소소(蕭疎)’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소식이 말한 ‘차다’는 평가가 정말 적확하게 들어맞는다. 그런데 마지막 구에서 밝은 달빛 아래 눈 덮인 숭산이 멀리서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곧장 보인다고 시인은 말한다. 여름이나 가을에는 잘 안 보이던 숭산의 존재감이 나무에 잎도 지고 겨울에 눈이 와서 비로소 맑고 장엄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 것이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맑고 아름다운 숭산의 원경이며 그 속에는 자신의 고원(高遠)한 흉금 역시 담겨 있을 것이다. 간결한 묘사에 필봉이 감추어져 있지만, 시인이 제목에 ‘망(望)’ 자를 쓰고 결구에 ‘직견(直見)’이란 말을 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시 내용을 볼 때 이 시는 맹교가 낙양서 살던 806년 55세 무렵에 쓴 시로 추정할 수 있다.
365일 한시 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