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자서自序

李贄

자서自序

지금까지 내가 저술한 책은 네 종류이다. 그 중의 하나가 《장서》(藏書, 감추어 둘 책)이다. 그 책에서 상하 수천 년 역사에 대해 논한 나의 시비 판단은 육안(肉眼)1으로 보아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감추려는 것이다. 산 속에 감추어, 후세에 자운2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보아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또 하나는 《분서》(焚書, 태워버릴 책)이다. 주로 친구들에게 답장한 편지를 주로 모은 것으로, 거기에서 논한 내용이 근래 학자들의 고황(膏肓)3에 깊숙히 파고 들어 그들의 고질병을 까발리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태우려는 것이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태워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분서》 뒤에 또 별록(別錄)이 있어, 《노고》라고 하였는데4, 비록 《분서》에 함께 속하긴 하지만 따로 권목(차례)을 만들었으니, 태우려면 이것까지 태워야 할 것이다.

다만 《설서》(說書)5 44편은 정말 기뻐할 만한 것으로, 성현의 말씀에 담긴 깊은 뜻을 훤하게 밝히고, 일상 생활 중의 평범함의 이치를 천명하여, 독자로 하여금 일단 한 번 보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과 속세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할 수 있으리라. 정말이지 경전의 전통적 주석(예를 들어 주희의 《사서집주》) 같은 것은 사람들이 성인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을 닫는 격이어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막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설서》에서 논의한 내용은 친구가 시문(時文)6을 짓는 것을 보고 쓴 것이다. 따라서 《설서》는 시문7에 도움이 되는 것도 있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또한 많다.

이제 《설서》는 이미 간행했고, 《분서》도 다시 간행했고8, 또한 《장서》 중의 한두 논저 역시 다시 간행하여9, 태워야 할 것을 더 이상 태우지 않게 되었고, 감춰야 할 것을 더 이상 감추지 않게 되었다. 혹자는 “과연 정말 그렇다면 책이름을 《분서》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물의 명칭은 그 실상에 알맞게 표현되어야 하고, 사람의 말은 그 행실에 맞아야 한다’는 말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하기도 한다. 허허! 내가 어찌 알 수 있겠으며, 그가 또한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태우려고 했던 것은 사람들의 귀에 거슬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요, 간행하려 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받아들여지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귀에 거슬리면 반드시 죽이려 할 것이니, 이는 매우 두려운 바이다. 그러나 내 나이 이제 64세이니, 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지 모르겠다. 있다면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혹시 한명이라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므로 간행하는 것이다.

호숫가 취불루(聚佛樓)에서 탁오노자(卓吾老子) 쓰다.

1 육안이란 지혜의 심안(心眼)과 상대되는 육체적이고 생리적인 속안(俗眼)을 일컫는 말이다.
2 자운(子雲)은 한대(漢代) 학자 양웅(揚雄)의 자이다. 《역경》․《논어》 등을 본떠 《태현경》(太玄經)․《양자법언》(揚子法言) 등을 저술했다. 고대 서적의 심오한 뜻을 잘 밝혀내기로 유명했다. 이지(李贄)는 당시에 자기 저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누군가 후세에 진정으로 자기의 입장을 이해해줄 사람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는 마음을 이와 같이 표현했다.
3 고황(膏肓)에서 고(膏)는 심장 아래이고, 황(肓)은 격막(隔膜)의 위이다. 이는 내장의 가장 깊숙한 곳을 말하는데, 여기에 병이 나면 고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는 당시 학자들이 드러내기 싫어하는 결정적 병폐를 지적했다는 뜻이다.
4 이후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분서》(焚書)는 1590년 이지(李贄)의 나이 64세 때 호북(湖北) 마성(麻城)에서 처음 간행되었다. 이후 1600년 74세 때 중간(重刊)되면서, 64세 이후 10년간의 저술이 추가 수록되어, 현재의 체재가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노고》(老苦)는 초간본에 수록되었다가 이후 중간본에도 그대로 수록된 것으로 보인다. 원중도(袁中道)의 행장(行狀)에서 ‘이지는 노년에 친구들과 주고받은 서신을 엮어서 《노고》라고 한다’고 했는데, 대략 이지의 나이 60세 전후 노년의 고독과 고통을 말한 서신들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학자는 《노고》가 《속분서》(續焚書)의 처음 명칭이라고도 한다.
5 현재 중국에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일본 구주대학(九州大學)에 일부 소장된 것이 있는데, 《속분서》 권2에 수록된 《자각설서서》(自刻說書序)가 이 간행본에는 누락되어, 일부에서는 위서(僞書)가 아닌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처음 용호(龍湖)에서 간행되어, 이후 1618년 제자 왕본아(汪本鈳)에 의해 다시 간행되었다고 한다.
6 시문(時文)이란 ‘현재 유행하는 문체’라는 말로, 여기서는 과거 시험 응시를 위한 글형식으로 이른바 팔고문(八股文)을 말한다.
7 당시의 시문(時文)은 유행하는 형식에 맞추어 문자를 채우는 격이어서, 《설서》의 내용을 보면 그런 폐단을 없앤다는 점에서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오히려 시문을 잘 쓰기 위해서라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8 《분서》는 당시에 금서(禁書)로 지목되어서, 책 제목 그대로 간행되고 소실되는 과정을 몇 차례나 겪었다고 한다. 현재 전해지는 《분서》도 간행된 분량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한다.
9 《장서》 68권은 1599년 이지의 나이 73세 때 남경(南京)에서 간행되었다. 《장서》에서 《분서》로 채록된 글로, 《분서》 권3의 《병식론》(兵食論)과 《전국론》(戰國論)이 있다. 전자는 《장서》 권43 《장재전》(張載傳)에서, 후자는 권37 《유향전》(劉向傳)에서 뽑아서 전재(轉載)한 것이다.
10). 《논어》 《자로》, “名之不可言.” 《중용》, “言之不顧行.”

自序

自有書四種:一曰《藏書》,上下數千年是非,未易肉眼視也,故欲藏之,言當藏于山中以待後世子云也。一曰《焚書》,則答知己書問,所言頗切近世學者膏肓,既中其痼疾,則必欲殺之,言當焚而棄之,不可留《焚書》之後又有別錄,名為《老苦》,雖則《焚書》,而另為卷目,則欲焚者焚此矣。獨《說書》四十四篇,真為可喜,發聖言之精蘊,闡日用之平常,可使讀者一過目便知入聖無難,出世之非假也。信如傳注,則是欲人而閉之門,非以誘人,實以絕人矣,烏乎可!其為說,原于看朋友作時文,故《說書》亦佑時文,然不佑者故多也。

今既刻《說書》,故再《焚書》亦刻,再《藏書》中一二論著亦刻,焚者不複焚,藏都不複矣,或曰:“誠如是,不宜複名《焚書》也,不幾于名之不可言,言之下顧行乎?”噫噫!余安能知,子又安能知。欲焚者,謂其逆人之耳也;欲刻者,謂其入人之心也。逆耳者必殺,是可懼也。然余年六十四矣,倘一入人之心,則知我者或庶幾乎!余幸其庶幾也,故刻之。

卓吾老子題湖上之聚佛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