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즈카이豊子愷-그물 끊기剪網

그물 끊기

큰외삼촌이 ‘대세계(大世界)’ 나들이에서 돌아오셨다. 탁자에 양향(良鄕) 밤 두 봉지 털썩 올려놓고 등나무 의자에 기대며 환락의 피로가 묻어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셨다.

“상해(上海) 나들이 정말 기분 끝내 주더구만! 경극, 신파극, 그림자극, 화극, 판소리, 마술…… 아 글쎄 없는 게 없더라니까. 차 마시고, 술 마시고, 요리 먹고, 과자 먹고…… 뭐든지 마음대로 골라 먹지. 게다가 엘리베이터, 비행선, 허니문카, 스케이트…… 호랑이, 사자, 공작, 구렁이…… 정말 온갖 기이한 게 다 있어! 이야, 정말 기분 좋게 나들이 한 번 했구만 그려. 다만 돈을 생각하면 기분이 좀 꿀꿀허네. 상해에선 돈 쓰기 정말 쉽더라구! 돈만 안 드는 나들이라면, 하하하하……”

“하하하하……” 나도 따라 웃었다.

큰외삼촌 말이 정말 일리가 있었다. ‘정말 기분좋게 나들이 한 번 했으면서도, 다만 돈을 생각하면 기분이 꿀꿀한’ 것과 같은 경우를 나도 종종 겪는다. 배 탈 때, 차 탈 때, 물건 살 때…… 돈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것을 만든 일꾼이나 공급하는 상인에게 너무나 고마운 생각이 들고, 인생이란 그야말로 의미가 있는 것도 같다. 그러나 그런 것을 누리려면 돈이라는 교환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만 떠올리면 재미가 거의 사그라든다. 가르치는 것도 그렇다. 한 반 청년이나 아이들과 함께 연구하고 그들을 위하여 수업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의미가 있고 기쁜 일이다. 그러나 수업 시작 및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명령하듯 들려오면, 군대식으로 ‘출석 점검’을 할 때면, 무슨 장사하듯 ‘월급’이란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불쾌해지기 시작하면서 ‘수업한다’는 그 일이 지겨워진다. 큰외삼촌이 큰 세상 나들이했을 때와 완전히 똑같다. 그래서 큰외삼촌 말에 일리가 있다고 탄복하여 ‘하하하하……’ 따라 웃었던 것이다.

‘가격’이란 것이 원래 사물의 의의를 제한하거나 감소시키게 하기 쉽다. “공화청에서는 차 한 주전자가 2전이고, 사자를 보려면 동전 스무 개야”라는 큰외삼촌 말처럼 사물의 대가를 규정하면 그 의의가 제한을 받아서, 공화청에서 차 한 주전자 마시는 건 2전을 마시는 것과 다름없고, 사자를 보는 건 동전 스무 개를 보는 것과 다름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공화청에서 차를 마시거나 사자를 볼 경우, 그 차나 사자를 마시거나 보는 우리에게 그 재미는 결코 그렇게 간단한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고 파는 가격의 눈으로만 사물을 보면 세상에는 오직 돈만 있는 것처럼 보일 뿐 다른 의의가 없으며, 모든 사물의 의의가 감소된다. 사물이 돈과 관계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 바로 ‘가격’이다. 기타 세상 모든 ‘관계’라는 것이 사물 자체의 존재 의의를 방해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물 자체의 참된 존재 의의를 알고자 한다면 그것과 세상 모든 것과의 관계를 철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큰외삼촌은 줄곧 돈만 생각하면서 큰 세상을 나들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기분좋고 찬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큰외삼촌은 단지 ‘가격’이라는 관계만 철거한 것일 따름이다. 언제나 세상의 모든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 일생은 틀림없이 훨씬 더 환희와 위안을 얻게 될 것이다. 밀 물결을 만나도 그것이 빵의 원료라는 걸 생각할 필요 없고, 쟁반 위의 귤을 봐도 그것이 갈증을 풀어주는 과일이라는 걸 생각할 필요 없고, 길가의 거지를 봐도 돈을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걸 생각할 필요 없고, 눈 앞의 풍경을 봐도 어느 마을 어느 동네 교외라는 걸 생각할 필요 없고,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큰외삼촌이 큰 세상을 나들이한 것처럼 언제나 기분 좋고 찬미하며 이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무지막지하게 크고 복잡한 그물이 이 세상에 얽혀 있는 것 같다. 크고 작은 모든 것이 그 그물에 갇혀 있다. 어떤 사물을 파악하려고 할 때, 본래의 그것이 홀로 뚜렷하게 내 눈 앞에 나타나게 하지 않고, 늘 무수한 줄을 끌어당겨 무수한 다른 것을 끄집어내 견줌으로써, 세계의 진상을 영원히 보지 못해왔다. 큰외삼촌은 큰 세상에서 ‘돈’과 연결된 한 줄을 끊고 나서 만족을 얻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잘 드는 가위 하나 구해서 이 그물을 모조리 끊어버리고 이 세계의 참 모습을 알고 싶다.

예술, 종교, 이게 바로 이 ‘세상의 그물’을 끊으려고 내가 찾는 가위이다.

(1927년 10월)
(1928년 1월 <一般> 제4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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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娘舅白相了大世界回来。把两包良乡栗子在桌子上一放,躺在藤椅子里,脸上现出欢乐的疲倦,摇摇头说:

“上海地方白相真开心!京戏、新戏、影戏、大鼓、说书、变戏法,甚么都有;吃茶、吃酒、吃菜、吃点心,由你自选;还有电梯飞船、飞轮、跑冰……老虎、狮子、孔雀、大蛇等……真是无奇不有!唉,白相真开心,但是一想起铜钱就不开心。上海地方用铜钱真容易!倘然白相不要铜钱,哈哈哈哈……”

我也陪他“哈哈哈哈……”

大娘舅的话真有道理!“白相真开心,但是一想起铜钱就不开心”,这种情形我也常常经验。我每逢坐船,乘车,买物,不想起钱的时候总觉得人生很有意义,对于制造者的工人与提供者的商人很可感谢。但是一想起钱的一种交换条件,就减杀了一大半的趣味。教书也是如此:同一班青年或儿童一起研究,为一班青年或儿童讲一点学问,何等有意义,何等欢喜!但是听到命令式的上课铃与下课铃,做到军队式的“点名”,想到商买式的“薪水”,精神就不快起来,对于“上课”的一事就厌恶起来。这与大娘舅的白相大世界情形完全相同。所以我佩服大娘舅的话有道理,陪他一个“哈哈哈哈……”

原来“价钱”的一种东西,容易使人限制又减小事物的意义。譬如像大娘舅所说:“共和厅里的一壶茶要两角钱,看一看狮子要二十个铜板。”规定了事物的代 价,这事物的意义就被限制,似乎吃共和厅里的一壶茶等于吃两只角子,看狮子不外乎是看二十个铜板了。然而实际共和厅里的茶对于饮者的我,与狮子对于看者的 我,趣味决不止这样简单。所以倘用估价钱的眼光来看事物,所见的世间就只有钱的一种东西,而更无别的意义,于是一切事物的意义就被减小了。“价钱”,就是 使事物与钱发生关系。可知世间其他一切的“关系”,都是足以妨碍事物的本身的存在的真意义的。故我们倘要认识事物的本身的存在的真意义,就非撤去其对于世 间的一切关系不可。

大娘舅一定能够常常不想起铜钱而白相大世界,所以能这样开心而赞美。然而他只是撤去“价钱”的一种关系而已。倘能常常不想起世间一切的关系而在这世界 里做人,其一生一定更多欢慰。对于世间的麦浪,不要想起是面包的原料,对于盘中的橘子,不要想起是解渴的水果;对于路上的乞丐,不要想起是讨钱的穷人;对 于目前的风景,不要想起是某镇某村的郊野。倘能有这种看法,其人在世间就像大娘舅白相大世界一样,能常常开心而赞美了。

我仿佛看见这世间有一个极大而极复杂的网。大大小小的一切事物,都被牢结在这网中,所以我想把握某一种事物的时候,总要牵动无数的线,带出无数的别的 事物来,使得本物不能孤独地明晰地显现在我的眼前,因之永远不能看见世界的真相,大娘舅在大世界里。只将其与“钱”相结的一根线剪断,已能得到满足而归来。所以我想找一把快剪刀,把这个网尽行剪破,然后来认识这世界的真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