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소식蘇軾 유경문에게 드림贈柳景文 초겨울 冬景

유경문에게 드림贈柳景文 초겨울 冬景/송宋 소식蘇軾

荷盡已無擎雨蓋 연꽃은 지면 비를 받칠 우산이 없지만
菊殘猶有傲霜枝 국화는 시들어도 서리 견디는 가지 있네
一年好景君須記 일 년의 좋은 풍경 그대는 기억하시게
正是橙黃橘綠時 등자는 누렇고 귤은 푸른 바로 이 때를

이 시는 소식(蘇軾, 1036~1101)이 1090년 55세 때 항주의 지주(知州)를 할 때 지은 시이다. 이 시에 나오는 유경문(柳景文)은 바로 유계손(柳季孫, 1033~1092)을 말하는데 경문은 그의 자이다. 그는 당시 양절 병마 도감(兩浙兵馬都監)으로 재직하면서 소동파가 항주에 있을 때 시문을 주고받은 인물이다. 《소식시집》을 편집하고 주석을 낸 청나라의 왕문고(王文誥)는 이 시에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달았다.

“이 시는 명편이라서 유경문이 감당할 만한 작품이 아니다. 유경문이 충신의 후손이고 그의 형 6명이 모두 사망하였기 때문에 소식이 이 시를 증여한 것이다.”

유계손이 충신의 후손이라는 말은 바로 그의 아버지는 유평(劉平)을 두고 하는 말이다. 유평은 북송 때의 장군으로 1040년에 이원호(李元昊)가 연주(延州)를 쳐들어왔을 때, 작은 군대로 지원을 나갔다가 아군의 도움이 없는 상황에서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잡혔지만 끝까지 항거하다 죽은 인물이다. 이런 내용은 소식이 유계손이 죽었을 때 조정에 부의를 청하는1092년 10월에 쓴 <걸부증유계손장(乞賻贈劉季孫狀)>과 《송사》 325권 <유평전(劉平傳)>에 나오는데 사전에 있는 내용을 대개 이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걸부증유계손장>에 의하면 유계손은 개봉 사람으로 본래 유평의 7명 아들 중 막내인데 위로 형들이 모두 일찍 죽고 혼자 남았다. 역사에 밝고 특이한 책과 석각을 매우 좋아하여 받은 녹봉을 이런 책을 구입하는데 다 썼다고 한다. 또 호방한 기개가 있어 소식이 ‘강개기사(慷慨奇士)’라고 불렀다 한다. ‘강개기사’란 ‘정의감에 불타는 특별한 선비’라는 의미이다.

이 시를 설명하기에 앞서 왜 유경문에 대해 이렇게 장황하게 말하는 것인가? 보통 이 시의 제목이 앞에 ‘유경문에게 드림’ 부분은 생략하고 <초겨울[初冬]>이라고만 된 판본이 많다. 시의 뜻을 대강 이해하고 원의와 상관없이 이해해도 괜찮은 사람들에겐 그런 제목이 오히려 간결해 보여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에 쓴 사람의 의도나 상황을 잘 알지 않으면 엉뚱하게 이해할 소지가 많다.

이 시는 등자, 즉 오렌지와 귤을 일 년 중 가장 좋은 풍경을 연출하는 식물로 찬미한 시이다. 오늘날 오렌지를 등자라고 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오렌지와 사실 같은 것인데 중국 남방서 나는 것은 크기가 약간 작다. 이 등자와 귤을 말하기에 앞서 연꽃과 국화를 대구로 소개하였다. 그런데 이 대구에서 우산의 역할을 하는 연잎은 다 스러졌지만 국화의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남아 있다고 말하여 실상 국화를 높이는 내용으로 서술되었다. 그래서 대구를 역접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시가 국화의 절조를 높이는 데 주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국화가 시들어도 서리에 그 가지를 꼿꼿하게 세운 자태를 드러내는 것을 인용한 것은 등자와 귤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일종의 연출이다. 즉 큰 산 위에 옥 한 덩이를 올려놓고 너른 바다에 달빛을 비추는 방식인 것이다.

지금 이 시를 읽는 사람들의 의식으로는 등자와 귤이 그 단맛과 신맛, 그리고 선명한 색채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소동파의 정신에는 이 등자와 귤이 송백(松柏)의 절조라는 추상적인 이미지가 같이 떠오른다. 이게 무슨 말인가?

굴원이 쓴 <구장(九章)>에 <귤송(橘頌)>이라는 작품이 있다. 초나라 특산물인 귤을 매우 절조를 지닌 나무로 묘사하고 자신이 이 나무를 본보기로 삼고 싶다고 했다. 이 글에 보면 “아, 너의 어린 기개가 다른 식물과 다른 점이 있구나. 홀로 서서 옮겨 가지 않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嗟爾幼志有以異兮, 獨立不遷豈不可喜兮.]”라고 하였는데, 귤이 다른 곳에 가서 살지 않는 지조를 찬미하였다. 회수 이북으로 가면 귤이 탱자로 변하는 것을 보통 잘못 적응하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이는 귤이 지조를 지킨 결과인 것이다. 또 “뿌리가 깊고 든든해 옮기기 어렵고 마음이 비어 구하는 것이 없네. 세상에 깨어 홀로 서 있으니 자신의 마음대로 할 뿐 시류를 따르지 않네. [深固難徙廓其無求兮. 蘇世獨立橫而不流兮.]”라고 하였는데, 귤나무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고 시속에 영합하지 않는 절개를 노래하고 있다. 굴원은 이런 귤의 지조를 백이(伯夷)에 비견하여 자신의 모범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일부의 구절만 보였지만 전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귤에 이런 문화적 전통이 있기에 장구령도 <감우(感遇) 4>에서 “어찌 여기 강남이 따뜻해서이겠는가. 본래 추위를 견디는 마음이 있네[豈伊地氣暖, 自有歲寒心]”라고 한 것이다. 이런 귤에 대한 심상의 전통을 알고 보면 이 시는 귤에 대한 최고의 찬미를 하는 것과 동시에 이 시를 증여받는 유경문(柳景文)의 강개한 품격과 절조를 칭송한 것이 된다.

그런데 조금 더 시를 들여다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시의 구절구절이 유계손의 상황에 맞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꽃이 져서 비를 받칠 우산이 없다는 것은 아버지 유평의 보호막이 없다는 의미가 되고 국화의 오상고절은 혼자 남은 유계손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귤을 말한 것은 바로 유계손에게 아버지의 뒤를 따라 그런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왕문고(王文誥)는 시에 담긴 이런 뜻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유경문이 이 시를 감당할 수 없지만 그의 부친이 충신이고 형 6명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이 시를 준 것이라 적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소식시집> 전체를 주석 내는 내공이 있었기에 왕문고는 이런 견해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놀랍기 그지없다.

이렇게 본다면 이 시의 제목을 <초겨울>이라고만 해 놓으면 되겠는가? 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유경문에 대해 앞에서 서술하고 이어 등자와 귤에 담긴 시문에 축적된 이미지를 서술한 뒤에 마침내 시의 본의를 말한 것이다. 소동파가 이 시에 담은 정밀한 뜻과 그 시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자연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등자와 귤은 시문에서 다양하게 언급되는 것은 물론 그림으로도 그리게 된다. 북송 때 조영양(趙令穰, 1070~1100 활동)은 소식과 동시대 인물인데 이 시의 핵심 소재를 채택하여 <등황귤록도(橙黃橘綠圖)>를 그린다. 이를 필두로 남송 때의 임춘(林椿), 원의 조맹부(趙孟頫), 명의 문징명(文徵明), 청의 양진(楊晉) 등의 그림으로 이어진다.

입동을 앞두고 있는 지금, 등자와 귤에 소나무와 측백나무의 지조가 있는 걸 알고 보면 늘 먹는 귤이나 오렌지가 새삼 새롭게 다가오기도 할 것이다.

宋 趙令穰 <橙黃橘綠圖>

365일 한시 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