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장구령張九齡 감회를 사물에 부쳐感遇十二首 其一

감회를 사물에 부쳐 感遇十二首 其一/당唐 장구령張九齡

蘭葉春葳蕤 봄에는 난초 잎 무성하고
桂華秋皎潔 가을엔 목서 꽃 고결하네
欣欣此生意 생기 발발한 이 생명력
自爾爲佳節 저절로 좋은 계절 만드네
誰知林棲者 누가 알리오 숲의 은자가
聞風坐相悅 풍도를 듣고 좋아하는 줄
草木有本心 다 초목의 천성 때문이니
何求美人折 미인이 꺾기를 왜 바랄까

장구령(張九齡, 678~740)이 737년 60세에 상서령(尙書令)에서 형주 장사(荊州長史)로 좌천되어 있을 때 지은 시라 한다. 즉 중앙의 재상 반열에서 지방의 수령으로 떨어진 것이다. 시에 깔린 군왕에게 더 기대할 것 없다는 체념의 마음은 억울함을 이미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감우(感遇)는 이 시를 포함한 전체 12편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시제 이름이다. 자신의 소회를 어떤 물건에 투영하여 노래할 때 이 제목을 쓴다. 장구령 이전 진자앙(陳子昻)의 38수가 유명하며 장구령 외에도 후대의 많은 시인이 이 제목을 썼다.

난초와 계(桂), 즉 목서는 그 잎과 꽃이 봄과 가을에 아름답다. 난초는 잎만 말하고 목서는 꽃을 말했으나 난초의 꽃과 목서의 잎 역시 그 가운데 있으니 이런 표현을 호문(互文)이라 한다. 또 본디 굴원이 자신을 비유한 사물은 난초와 국화였지만 시인이 국화 대신 목서를 쓴 것은 예전 표현에 얽매이지 않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수법이라 할 수 있다.

자이(自爾)는 자연(自然)의 의미이다. 여기서 이(爾)는 형용사를 만드는 부사로 ‘탁월하게’를 탁이(卓爾), ‘경솔히’를 솔이(率爾)라고 하는 것과 같다. ‘댕그랑’ 하는 것을 갱이(鏗爾)라고 한 것은 동사를 의성어로 만든 것이다,

여기서 ‘누가’는 세상 사람을 말하고 숲에 사는 사람은 시인 자신을 말한다. 시인이 난초와 목서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며 은거하고 있는 것을 누가 알겠느냐고 한 것은 다른 사람은 이 시인이 즐거워하는 고매한 경지를 잘 모를 것이라는 말이다.

문풍(聞風)은 난초와 목서의 풍도를 듣는다는 말이고, 좌(坐)는 ‘이 때문에’라는 말이며, 상열(相悅)은 ‘좋아한다’는 뜻이다.

‘초목이 향기를 발산하는 것은 초목의 본성이니 미인이 꺾어주기를 무엇하러 바라겠는가?’라고 한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산에 핀 꽃은 감상자가 알아주어야 그 존재 의의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존재 의의는 그 꽃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라 미인이 좋아하여 꺾어주고 안 꺾어주는 것은 그 초목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난초와 계화는 종래 누적된 상징으로 볼 때 남이 알아주지 않는 현자이고 미인은 임금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런 언급은 결국 난초와 계화에 비긴 시인 자신은 누가 자신을 알아주어 세상에 이름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주역》 <계사전(繫辭傳) 상>에는 낙천지명(樂天知命), 즉 천명을 알고 즐기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시의 주제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꽃은 시인이 감상하는 것과 무관하게 존재하듯이 시인의 존재 의의 역시 임금이 알아주는 것과 무관하다는 이 말은 그 태도가 아주 온자하다. 그러나 그 의미는 극히 함축적이다. 시인이 정말로 아무도 알아주기를 원하지 않고 난초와 계화처럼 피었다 지려 한다면 무엇 하러 이런 시를 쓰겠는가? 임금을 깊이 원망하는 마음 역시 그 안에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깊이 원망하지만 원망하는 표정이 시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시를 옛날의 평론가들은 시에 성정이 바르게 표출되었다 하여 아정(雅正)하다고 하고, 차분하고 담담히 내면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충담(冲淡)하다고 한다. 그러나 시를 아는 사람은 이 사람이 깊이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시인이 제목을 감우(感遇)라 한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도 싶고 드러내고도 싶은 이런 심리 때문일 것이다.

八大山人 《瓶菊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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