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의 어부江上漁子/송宋 범중엄范仲淹
江上往來人 강가에 오가는 사람들은
但愛鱸魚美 농어 맛을 즐길 뿐이나
君看一葉舟 그대 보게나 작은 배가
出沒風波裏 풍파에 출몰하는 광경을
2015년 5월에 항주의 서호(西湖)에 간 일이 있다. 이 때 <서호도(西湖圖)>라는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3일 정도 서호의 10경을 탐방하였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가로등이 켜질 무렵 고산(孤山) 누외루(樓外樓) 2층에 올라가 농어와 순채탕을 시켰다. 중국 사람들이 먹는 농어가 어떤 것인가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마침 농어가 떨어져 나는 순채탕에 다른 요리로 만족해야 했다. 순채탕은 미끌미끌하면서도 독특한 맛이 났다.
소동파의 <후적벽부>에도 이 농어를 술안주로 들고 적벽선유(赤壁船遊)를 하러 가는 장면이 나오고 한나라 때 장한(張翰) 역시 낙양서 벼슬을 하다가 가을바람이 불자 고향 오중(吳中), 즉 지금 소주(蘇州)의 농어회와 순채국이 생각난다며 고향으로 돌아간 일이 있다. 범중엄(范仲淹, 989~1052)이 이렇게 또 농어를 강가의 대표 생선으로 말한 것은 그의 고향이 소주이기 때문에 이런 풍경이 익숙해서이기도 할 것이지만 당시 중국인들이 농어를 아주 좋아한 것을 짐작하게 한다.
범중엄이 시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구미에 당기는 농어만 알지 말고 그 농어를 잡는 어부들의 고생도 생각해 달라는 것일 것이다. 이런 시를 크게 묶어 애민시(愛民詩)라 하는데 이런 시의 전통도 유서가 깊어 <<시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빈풍(豳風)의 <칠월(七月)> 같은 시가 대표적이다. 이후로 벼나 누에, 길쌈 등을 소재로 삼는 애민시가 많이 지어졌는데 재상들이나 몰락한 사대부의 시에 많이 보인다.
뜻은 있지만 형세가 미치지 못하는 사족들은 사회 비판의 한 방법으로 이런 시를 많이 지었는데 두보도 그런 경우이다. 재상들의 경우는 능력이 있다 해도 개혁이나 교화가 생각처럼 쉽지 않기 때문에 또 이런 시를 지었다.
범중엄은 <악양루기>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마지막은 이런 명문으로 끝난다. “나는 반드시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한다 말하리라.[其必曰,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 이 시인의 큰 포부를 읽을 수 있다. 실제로도 범중엄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펼친 인물이다. 동향의 왕안석이 나중에 그 뜻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악양루기>는 후대의 서법가들이 많이 썼는데 동기창(董其昌)이 행서로 쓴 글씨가 참으로 악양루기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
범중엄의 묘소는 하남성 이천(伊川)에 있다. 이곳에 장자(莊子),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소강절(邵康節), 범중엄의 무덤이 각각 있는데 내가 2004년에 다 가 보았다. 당시엔 차들이 잘 안 가서 범중엄 묘소에는 경운기를 얻어 타고 비를 맞으며 갔다. 당시 동상을 처음 세우고 할 무렵이지만 지역 주민들은 마치 구복 신앙의 장소로 여기는 듯했다.
전에 내가 서안에 있던 동생의 도움으로 연안(延安)에 가서 중국 공산당의 항일 유적지를 탐방한 적이 있다. 연안에는 큰 탑이 있는데 그 뒤편 산 언덕에 범중엄을 칭송하는 큰 글씨가 단단한 황토에 새겨져 있었다. 그 사연을 알아보니 범중엄이 당시 연주(延州), 즉 지금의 연안을 침공하는 서하(西夏)를 제압한 공적이 있었다. 범중엄은 이처럼 시와 산문을 쓰는 문장가이기 이전에 정치가이자 군사 전략가였던 것이다.
이 시는 바로 범중엄의 이런 현실적 자세를 잘 보여준다. 위진시대의 청담(淸淡)을 거치면서 문인들에게 어부는 통상 은거의 이미지로 활용되어 왔다. 그래서 시나 그림에서 어부는 주로 세상을 초월하는 은자의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유종원의 <강설(江雪)> 역시 그런 작품이다. 그런데 범중엄은 이런 은일적 이미지가 아닌 생업 현장에 놓인 어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악양루기>에서 인자(仁者)의 현실적 정치 참여로 제시한 ‘선우후락(先憂後樂)’의 정신과 통한다. 관념적이고 낭만적 세계가 아니라 실제 삶의 현실을 직시하는 시선을 보여준다는 점이 바로 이 시의 핵심 가치가 아닐까 한다.
365일 한시 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