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과 해석 방법론-머리말

머리말

“또 한 권 나왔군!”

이것은 아마 《홍루몽》 애호가들이 본서를 보았을 때의 첫 반응일 것이다.

“뭐가 특별하지? 무슨 새로운 내용이 들어 있지?”

이건 아마 두 번째 반응일 것이다.

본서의 내용을 신속히 파악하고 싶다면 먼저 결론부터 보면 될 것이다. 본서의 특징은 서양문학이론을 틀로 삼아 《홍루몽》이 만들어지고 독자들에게 수용되기까지의 진상을 거슬러 추적하면서 아울러 작자, 텍스트, 독자라는 세 가지 관건과 해석 활동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려는 데에 있다. 여기에 인용된 이론의 범주는 주로 작자 중심 비평(author-centered criticism; author function), 텍스트 비평(textual criticism), 독자 반응 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이며, 여기에 기호학(semiotics) 개념을 추가했다. 각 장을 관통하는 주요 맥락은 해석 활동이 진행되는 방식을 거듭 음미하면서 아울러 의미의 확대 발전 과정과 규칙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본서는 시험적으로 ‘메타 비평’ 또는 ‘포스트 홍학(紅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본서가 나오게 된 연유 같은 책 바깥의 정황에 대해서는 이 글을 빌려 회고하면서, 동시에 본서의 저술 방법에 대해서도 설명할까 한다.

본서가 나오게 된 연유는 원근(遠近)의 두 요인이 있다. 먼저 가까운 이유. 지금 내게는 몇 가지 책의 원고가 있는데, 개중에 세 가지는 《홍루몽》을 중심으로 한 《홍루몽의 영어 번역에 대한 비평[紅樓夢英譯評議]》과 《홍루몽과 해석 방법론[紅樓夢與詮釋方法論]》, 《홍루몽 번역 비평의 연구[紅樓夢譯評之硏究]》이다. 두 번째 원고는 원래 첫 번째 원고를 토대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처음 내가 홍콩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 황자오졔(黃兆傑) 선생님 밑에서 공부할 때에는 《홍루몽의 영어 번역에 대한 비평》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사정이 이렇게 변했다. 졸업논문인 《홍루몽의 영어 번역에 대한 비평》을 준비하기 위해 나는 《홍루몽》 원작을 숙독해야 했고, 《홍루몽》의 판본과 텍스트 가운데 ‘작자의 원작’에 더 가까운 것은 무엇인가와 같이 원작을 둘러싼 각종 기본적인 문제들도 분명히 이해해야 했다. 이러다 보니 곁다리로 빠지는 계기가 생겼다. 당시 나는 황자오졔 선생님께 ‘문학평론’이라는 과목을 막 들어서 중국과 외국의 문학이론에 대한 적지 않은 지식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래서 ‘홍학’의 갖가지 문제들을 대할 때마다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용솟음쳤다. 게다가 홍콩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동문 선배인 리줘슝(李焯雄), 린광타이(林光泰)도 서양문학이론의 연구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내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나는 우선 《홍루몽과 해석 방법론》을 쓰게 되었다. 그러니 내게 이런 자유를 주신 황자오졔 선생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본서가 나오게 된 먼 이유라면 아마 내가 홍콩대학교 1학년에 다닐 때의 우연한 경험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중국문학 과목은 청나라 때 나온 판각본(板刻本) 《시모씨전소(詩毛氏傳疏)》(《시경(詩經)》학의 한 분야임)에 대한 표점(標點)을 실습하는 것이었고, 영문학 과목은 장메이메이(張美美) 선생께서 강의하는 셰익스피어의 명저 《햄릿》이었다. 이 두 과목은 신선하기는 했지만 어려웠고, 특히 영문은 더했다. 왜냐하면 입학하기 전에 나는 영문학이라는 걸 전혀 접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초가 허약했던 내가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대한 논문을 영어로 쓴다는 게 쉬웠을 리 있는가? 하지만 이 과목을 능숙하게 소화하기 위해 나는 바이츠(Morris Weitz)의 《햄릿과 문학비평의 철학(Hamlet and the Philosophy of Literary Criticism)》에 주목했다. 이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 자신도 대상을 중국문학으로 바꿔서 그와 비슷한 책을 써 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하지만 처음에는 ‘홍학’을 주제로 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설명한 본서의 저술 배경을 보면 마치 문학비평과 문학이론이 모조리 ‘내게 영향을 주어서[襲人]’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내게 책을 펼쳐 보여주면서 나로 하여금 자기 대신 글로 써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 결과 본서에 서양 해석이론의 정화를 많이 받아들였다는 특징은 독자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게 타당한가?”와 같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론 운용의 문제를 먼저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신선하고 커다란 정원 같은 이 학술 범주를 이전의 학자들은 왜 경영하지 않았을까? 서양 이론을 운용하는 데에 어떤 위험이 있는 건 아닌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2002년에 나는 홍콩대학교에서 열린 ‘명‧청 학술 국제 토론회[明淸學術國際硏討會]’에 참가했다가, 토론회가 끝난 후 우연히 홍콩 링난대학교(嶺南大學校)의 마여우위앤(馬幼垣) 교수와 같은 차(관광버스)를 타게 되었다. 도중에 할 일이 없어서 소설 판본 문제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그때 마 선생이 잠시 흥이 일어서 나에게 링난대학교에서 열리는 소설 희곡 토론회에 참여하는지, 그리고 참여한다면 발표 제목은 뭘로 할 것인지 물었다. 이에 나는 서양의 학술 경험과 이론을 빌려 《홍루몽》의 텍스트 문제를 분석해 볼까 생각한다고 했더니, 마 선생은 서양 이론을 맹목적으로 적용하는 사람들에 대해 통렬히 비판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살얼음을 밟는 듯 두렵고 조심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나중에 나는 원래의 구상에 따라 글을 써서 링난대학교에 제출하면서 (그 글이 바로 본서의 한 절이다) 마 선생의 반응이 어떤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토론회에서 마 선생은 내 글에 대해서 지적하지 않았고, 거기 참가한 다른 학자나 전문가들도 어떤 문제점을 끄집어 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이 논문도 무난히 인정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위안했다. 사실 나는 이론을 억지로 꿰맞추는 행위에 대해서는 진즉부터 무척 싫어했다. 게다가 마 선생이 미리 경고해 주고 나자 당연히 나도 더욱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토론회에서 공펑청(龔鵬程) 선생이 서양 이론을 억지로 꿰맞추는 사람에게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 모습도 본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서양 이론이라는 부분에 대해 이제까지 가벼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본서에서 이론을 끌어다 쓸 때는 주로 서양 학자들이 문제를 관찰하는 시각을 빌려서 거기 담긴 정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주의하면서 ‘이론이 앞서는’ 경우가 생기지 않게 하고, 또한 서양 이론을 완전히 그대로 가져와서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본서가 정말 이런 목표를 달성했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내가 시종일관 ‘서양’을 피하지도 ‘이론’을 버리지도 않은 이유는 주로 본서가 비교적 충실한 학문 원리를 토대로 함으로써, 그다지 체계적이지도 않고 독선적인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일부 《홍루몽》 관련 저작들이 가진 병폐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다음으로 내가 중국과 서양의 문화가 모여 교통하는 곳에 살고 있으니, 체계적이고 새로운 시험을 통해 서양 학문의 시각에서 보는 홍루몽은 어떠한지를 살펴보고 싶었다.

어쩌면 이런 질문을 제기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론을 ‘억지로 팔’ 생각이 아니라면 대체 당신은 무엇을 한 것인가? 이 책에 어떤 특징이 있단 말인가?”

이에 관해서 알고 싶은 독자는 즉시 본서의 서론과 결론을 살펴보기 바란다. 다만 여기서 본서의 저작 방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는 것도 괜찮겠다. 본서의 일부 장절(章節)은 담론 분석(discourse analysis)에 가깝다.

간단히 말하자면 담론 분석의 관심은 ‘홍학가(紅學家)’ 즉 《홍루몽》 관련 연구자들이 논술 수단과 해석 방법을 이용해 자신들의 논점에서 어떻게 진부한 것을 솎아내고 포장하는지 검토하는 데에 있다. 사실상 많은 《홍루몽》 관련 연구의 관점들이 모두 논술 수단, 심지어 언어폭력을 빌려서 ‘대업을 성취’하고 요충지를 점거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홍루몽 문제 토론집(紅樓夢問題討論集)》에는 “비록……”이나 “다만……”과 같은 말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왜 《홍루몽》의 내용 가운데 일부는 “비록……”에 속하고, 또 다른 일부는 “다만……”에 속하는 것일까? 이렇게 구분하게 된 원인은 정말 탐구해 볼 만하지 않은가! 그렇게 많은 “비록……”과 “다만……”이 있는데 대체 논자들은 어떤 걸 배제하고 어떤 걸 주워 모은단 말인가? 게다가 《홍루몽》의 일실(逸失)된 문장을 찾아내려는 글들 가운데 ‘아마[可能]’, ‘어쩌면[也許]’, ‘대개(大槪)’, ‘듯하다[似]’와 같은 단어의 사용 빈도가 대체 얼마나 높은지 주의해 살펴본 독자가 있는가? 또한 일부 《홍루몽》 및 관련 연구의 전문가 가운데 고증(考證)의 대가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실제 하는 것은 교묘한 말재주로 그럴 듯하게 둘러대고 칭찬하는 해석에 상당히 가까운데, 그 수사(修辭)가 너무 교묘해서 어디가 고증이고 어디가 해석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 ‘원형 찾기 놀이’에 참가한 사람은 그저 소설 《홍루몽》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은 ‘바로’ 실제 역사의 누구이거나 ‘필연적으로’ 실제 역사의 누구일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기 좋아한다. 그리고 아주 많은 《홍루몽》 관련 연구자들이 ‘작자 심리의 재건’에 몰두하는데, 장삼이사(張三李四)가 마구 나서는 상황에서 대체 누구의 설명이 비교적 합리적인가? 여기에다 ‘재건’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논자들은 단장취의나 전면에 내세우기[前景化], 담화(淡化),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취하기, 순환논증 등의 논술 수단 및 해석 수단을 써서 스스로 세대를 뛰어 넘은 지기(知己)로 자처하면서, 《홍루몽》의 작자를 자기들 생각에 필요한 형상으로 ‘분장’시킴으로써 자신들이 추구하는 ‘홍학’을 부연한다. 200년이 넘는 《홍루몽》 관련 연구사에서 이런 현상은 자주 발견된다. 그것들을 들춰내지 않으면 독자들은 대부분 현혹되고 말 것이다. 결국 담론 분석의 각도에서 문제를 분석하면 우리는 《홍루몽》 관련 연구자들의 전기설(傳記說)이나 색은파(索隱派) 학설, 그리고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 사이의 공통점(수단상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홍루몽》의 연구하여 도출한 결론은 다를지라도.

본서는 어쩌면 ‘그다지 전문적이지 않은’ 어휘들을 써서 어떤 《홍루몽》 관련 연구 현상을 설명하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작자를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고 하거나 논자의 수단을 “신성화(神聖化)”했다거나 “주변화(周邊化)”했고, 또는 “역사의 공백을 이용했다”(즉 ‘존재하지 않음’을 증거로 삼음)는 등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나의 목적은 오직 하나이다. 바로 수많은 《홍루몽》 연구자들이 대체 어떤 논술 수단을 썼는지에 대해 간결하고 통속적인 언어로 가차 없이 드러내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관우(關羽)가 5개의 관문을 지나면서 조조(曹操) 휘하의 장수 6명의 목을 벤 이야기를 본 사람은 아주 많지만 모두들 그저 그 수자상의 업적인 ‘5’와 ‘6’만 중시한다. 그러나 나는 관우가 어떻게 관문을 ‘지났고’ 어떻게 ‘목을 베었는가’에만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바꿔 말하자면 나는 그 동작과 과정, 수단이 결국 주목할 만한 큰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목을 현혹하는 ‘《홍루몽》 관련 연구의 거창한 논의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실은 논술 수단에 기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담론 분석’이라는 것을 통해 그들의 원형과 맥락을 투시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를 통해서 우리는 《홍루몽》 관련 학계에 만연된 암도진창(暗渡陳倉)과 과대 코드화(overcoding), 과도 해석, 그리고 해석의 폭력을 발견하게 된다. 본서는 《홍루몽》 관련 연구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을 기본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어떤 제도나 방법을 개선할 필요성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몫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여러 해 동안의 관찰과 분석을 통해 나는 근대 《홍루몽》 관련 연구의 발전이 결국 작자(author) → 저작권(authorship) → 권위 있는 텍스트(authoritative texts) → 권위(authority) → 공인(authorization)이라는 궤도를 따라 진행되었음을 발견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내가 너무 경박하게 색은파의 옛날 기교를 흉내 내서 문자 유희를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독자들이 인내심을 갖고 본서를 완독한다면 대부분 이에 동의할 것이다. 중대한 논쟁을 일으키는 수많은 해석 문제들은 확실히 이 궤도 위의 어떤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런 해석의 사슬은 오랜 기간 동안 존재하며 어쨌든 중국의 해석 관념에 영향을 주었다. 중국의 해석 관념 가운데 작자 결정론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 후스(胡適)의 고증 이래 《홍루몽》 관련 연구는 점차 유명한 학문이 되었고, 이어서 의식 형태의 논쟁에 휘말리면서 명성과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에 수많은 해석자들이 해석의 권위를 쟁탈하기 위해 해석적 권위(interpretive authority)를 놓고 각축을 벌였으며, 텍스트 고증도 저작권(authorship)과 권위 있는 텍스트(authoritative texts)에 대한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리하여 작자를 자신의 구미에 맞춰 억지로 내세우거나, 작자를 끼고 자신의 권위를 추구하는 행위가 자주 나타났다.

역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수많은 해석자들은 스스로 권위를 부여하는 것(authorization)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러 이렇게 하는 이들도 있고, 무의식중에 틀에 박힌 모방을 하는 이들도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새로 출발하여 ‘새로운’ 작자를 빌려 낡은 논점을 해결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바꿔 말하자면 ‘말끝마다 작자를 거론하는 것’은 종종 일종의 담론 전략(discourse strategy)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필자가 담론 분석을 통해 《홍루몽》 관련 연구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결코 과녁도 없이 활을 쏘는 짓이 아니다. 필자의 이 방법이 효과가 어떠한가는 또 다른 문제이니, 본문을 세밀히 읽어보고 나서 독자들이 판단해 주기 바란다. (구체적인 상황은 여기 짧은 글로 다 나타낼 수 없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중국 대륙의 《홍루몽》 관련 학계에서 ‘해석권’ 또는 ‘해석 권위’에 대한 논쟁이 점차 격렬해지고 있다. 바닷가 외진 곳에서 혼자 공부하는 필자는 냉정한 시선으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로 인해 학술의 객관성을 더 유지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본서의 일부 장절들은 편집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서 《홍루몽학간(紅樓夢學刊)》과 《명청소설연구(明淸小說硏究)》 등의 학술지에 발표된 적이 있으며, 또 일부는 홍콩과 타이완의 학술지나 논문집에 수록된 적이 있다. 그런 내용들은 당연히 본서에 포함시키기 전에 보완하고 개선했기 때문에 옛날 모습과는 달라져 있다. 내용의 근엄함을 위해 본서에는 1,000개 남짓한 주석을 달았으나. 오히려 지나치게 세밀하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도 있겠다. 그리고 본서에서 아울러 고찰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제1장에서 밝혀 놓았다.

본서를 준비하는 동안은 혼자 연구에 매진하던 상태여서 학술 문제에 대한 처리도 그저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원고를 다 쓴 뒤에 메이지에(梅節), 천칭하오(陳慶浩) 두 분 선생의 열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 가운데 천 선생은 몸소 추천서를 써서 베이징에 보내 주기도 했다. 메이지에 선생은 나를 위해 여기저기 연락하며 추천하기도 했고, 부족한 원고를 꼼꼼히 읽어서 코멘트를 달아 주기도 했다. 두 분에 대해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외에 두 여성분들께서 본서가 빨리 출판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인멍샤(殷夢霞) 여사께서는 본서가 출간되도록 많은 힘을 써 주셨다. 그녀의 책임감과 효율적인 일처리 능력은 베이징 출판계에서도 비견할 만한 사람이 드물 것이다. 다른 한 분은 뤼치샹(呂啓祥) 선생이시다. 10여 년 동안 우리는 거의 연락이 없이 그저 세 번을 만났을 뿐이지만, 나의 연구에 많은 지지를 해 주었다. 내가 처음 중국 내륙에서 발표한 글은 바로 뤼 선생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글을 모아 출판하여 널리 유통될 수 있게 하라고 여러 차례 격려해 주었다. 이 기회를 빌려 두 분 여사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2007년 7월 홍콩 시립대학[香港城市大學] 자구(紫區) 어문학부(語言學部)에서

홍 타오(洪濤)

孙温, 《红楼梦》插画, 출처 网易博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