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說明 2
단순함은 소책자 쓰기의 기본 원칙이다. 소책자는 글쓰기의 위치를 더 낮게, 더 가깝게 설정한다. 그래서 나는 이 《부, 명예, 권력에 관한 단순한 사색》을 쓰면서 내 자신을 일반적인 상식의 층위에 두었다. 글의 내용, 단어의 선택 그리고 인용한 예와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심오한 것은 전혀 없다(솔직히 내가 심오하지도 않다). 이번에 나는 《월든》, 《몽테 크리스토 백작》, 《80일간의 세계일주》 같은, 누구나 읽어봤거나 적어도 기억이 나는 책들을(더 통속적인 책을 고르는 것은 곤란했다. 정말 인용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최대한 골라 인용했다. 이런데도 분명하게 글을 못 풀어낸다면 단순함은 능력의 문제가 돼버린다.
상식은 공교롭게도 량원다오의 중요한 저서의 이름이기도 하다(나는 특히 그가 쓴 서문을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나 자신은 상식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먼저 그 연원을 보면 본래는 대부분 하나하나가 다 심오하고 고매하여 심지어 사람을 경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통 예지의 영역에서 상식의 영역으로 필수적인 변화를 겪었다. 아주 오랫동안 어떤 사람이나 일부 사람들의 추측, 관찰, 반복적인 사색과 수정 속에만 존재했고, 또 일반인은 오랜 시간을 들여야 겨우 이해되거나 여전히 잘 모르는 상태에서 받아들이던 것이었다. 갈릴레이를(그 전에도 여러 지혜로운 이들을) 죽을 뻔하게 만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오늘날의 상식이 그 예이다. 상식의 결정結晶이 출현하면 그것은 대체로 결론적 성격을 띠며 사색과 발견의 과정은 생략돼 있다. 그렇다는 것만 알려주고 왜 그런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결국에는 공허하고 고립된 한 마디 말, 하나의 교훈, 하나의 명령이고 서로 연결되지 않은 이 상식과 저 상식 사이에는 온통 공백뿐이다.
사실 상식들은 단지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만이 아니다. 하나하나가 특정한 사유의 말단인 그 결론들은, 필연적으로 온갖 우상이 충돌하는 이 인류 사회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리카르도에서 비롯된 기본 상식과 마르크스에서 비롯된 기본 상식이 서로 맞서고 논쟁을 벌인다면 우리는 어느 쪽을 따라야 할까? 물론 우리는 보통 철저히 실용주의적이어서 어느 것이 지금 쓸모 있고, 또 간편하거나 유리한지 따져서 택할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우리가 살다 보면 그렇게 적당히 넘어가기 힘든 특수한 순간과 특수한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조금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는 문제나(최근 몇 년간 내가 좋아하고 골몰해온, 벌거벗은 임금 같은 솔직한 문제는, “타이완은 정말로 계속 이렇게 나아갈 작정인가?”이다.) 더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는 순간과 부딪칠 때도 있다.
상식의 생성 과정을 돌아보면 아마 더 많은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예를 들면 상식은 그래서 부족할 수도, 틀릴 수도 있고 눈치 채기 어려운 시대적 제약일 수도 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참이라고 믿으면 자동적으로 정확해지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정도 그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방해받지 않는 그것의 강력하고 부적절한 힘을 경계해야만 한다. 상식은 끊임없이 업데이트돼야 한다. 그것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들이 믿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명철함을 유지하고 개방적이며 불편부당한 데 있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말은, 무도함에 바짝 따라붙는 상식은 더 적합한 이름을 갖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 집단적인 어리석음이다. 상식도 한계가 있다. 인류 인식의 진전에 비해 지나치게 이른 마무리, 지나치게 이른 결론인 것도 있다. 그것의 경계는 바로 인간의 집단적인 최대공약수적 인식으로서 다른 각도에서 보면 결함투성이여서 인류의 올바른 사유의 성과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상식을 발견하고 가장 먼저 말한 사람을 떠올리고 조금이라도 감사한 적이 있었던가? 아울러 그것을 끊임없이 설명해온 사람들에게는? 나아가 오늘날 여전히 더 깊고 더 정확한 부분을 탐문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양보하고 최소한의 경의와 지지를 보낸 적은 있었던가? 하지만 이것은 급한 일은 아니다.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