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대문학 1

1966년 1월 18일, 구졔강 선생이 중국 고대문학에 대여 이야기했다.

중국의 고대문학 작품은 크게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것과 부를 수 없는 것, 두 가지로 나뉜다. 그리고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것이든 부를 수 없는 것이든 모두 다시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장․단구(长短句)이며, 다른 하나는 정제된 문장이다.

아래에서 나누어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먼저 노래 부를 수 있는 고대문학(古代文学)을 살펴보자.

중국 최초의 문학 작품은 《시경(诗经)》으로 여기에 들어 있는 고시(古诗)는 모두 노래할 수 있는 것들이다. 대부분 넉 자가 한 구(句)를 이루며 삼언(三言)․오언(五言)의 시는 매우 적은 편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당시에 시가(诗歌)로 노래할 때는 박자가 매우 느렸기 때문이다. 《시경》의 시는 비록 짧지만 노래를 거듭 반복해서 다시 부를 수 있어 아주 길게 부를 수 있었다. 또 《초사(楚辞)》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일곱 자가 한 구로서 구의 끝에는 ‘혜(兮)’자를 붙인다. ‘혜(兮)’자를 붙이면 소리를 길게 끌고 갈 수 있다.

초사인물도, 출처 雅昌艺术网

한편 「한위악부(汉魏乐府)」가 있는데, 악부도 노래로 부를 수 있으며 장단구다. 예를 들면 차오차오(曹操)의 「고한행(苦寒行)」 같은 것도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대개 ‘행(行)’ 자가 붙은 것은 모두 노래로 부를 수 있다.

악부는 《시경》에 이어서 나온 것이다. 《시경》은 열다섯 나라의 민가를 수집한 것이다. 이른바 국풍(国风)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가락이며 곡조다. 열다섯 나라는 위(魏), 진(晋) 등 모두 황허(黄河) 유역의 나라들로, 그때는 오(吴)나 초(楚) 등의 남쪽 지방에까지 가서 ‘풍(风)’을 채집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남방의 노래는 없다.

《시경》은 주(周) 왕조의 ‘태사(太师)’라는 악관(乐官)이 사람을 시켜서 각지의 풍(风)을 수집한 것이다. 이른바 각 지방의 가사(歌词)를 기록하고 수집하여 고대 문학작품을 완성했는데, 악부의 상황에 변화가 있었다.

한(汉)이나 위(魏)의 조정에는 ‘악부(乐府)’라는 기관이 설치되었는데, 이 기관의 주요 관리를 ‘협률도위(协律都尉)’라고 했다. 이 악부 기관의 관리가 사방으로 가서 노래를 채집하여 기록한 것이 악부다. 「맥상상(陌上桑)」은 이때 얻어진 것이다. 악부 중에는 남방의 시가들도 있는데 이것은 《시경》과 사뭇 다른 것이다. 《한서(汉书)》 「예문지(艺文志)」의 목록 중에는 오와 초의 작품도 있다. 예를 들면 여남(汝南) 지방의 고시가가 목록 중에 있는데, 이곳은 초에 속한다. 살펴보건대 그러한 남방의 시가는 북방 「악부」의 시가와 격률과 품격 상 차이가 그렇게 많지 않은데, 다만 글로써 전해오는 것이 없을 뿐이다.

《한서》의 「예악지(礼乐志)」중에는 아직도 한의 악부가 조금 전해오는데 이것은 제사지낼 때 불렀던 노래에 관한 것이다.

《진서(晋书)》 중에는 「악지(乐志)」 편이 있는데, 거기에도 한․위의 악부가 기록되어 있다. 악부는 후대의 당시(唐诗)까지 이어지는데, 당시 역시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인(唐人)들의 시를 어떤 것은 ‘오율(五律)’이라 하고 또 어떤 것은 ‘칠율(七律)’이라고 한다. 이것은 모두 음악과 관계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리보(李白)는 「청평조(淸平调)」를 지었다.

구름 같은 의상, 꽃 같은 용모
봄 바람 스치는 울짱에 반짝이는 이슬
군옥, 산정에서 못 본다면
요대, 달 아래에서 만나렷다
(云想衣裳花想容 春风拂槛露华浓. 若非群玉山头见 会下瑶臺月下逢)

리보가 이 시를 짓고 나자, 당 현종(玄宗)은 즉각 음악가 리구이녠(李龟年)에게 명하여 노래를 부르게 했다.

또한 당시 유명한 시인인 왕웨이(王维)의 「양관삼첩(阳关三叠)」이라는 시도 노래로 불렸다. 헤어질 때면 언제나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삼첩’이라는 것은 매번 노래부르다 마지막 구절인 ‘서쪽 양관을 나서면 잔 들어 권할 벗 없음이라(西出阳关无故人)’에 이르면 세 번을 거듭 불렀기에 붙여진 것이다. 옛날 《시경》의 시도 거듭 반복하여 불렸다.

송대(宋代)에는 시(诗)와 사(词)가 있었다. 송대의 시는 노래로 부를 수 없는 것이었고, 사는 노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송사는 모두 노래로 부를 수 있었다.

원대(元代)에는 사의 곡조가 없어지고 원곡(元曲)이 생겨났다. 이 시대의 문자는 주로 원곡이었는데, 역시 노래로 부를 수 있었다. 창을 할 때는 더 이상 시나 사를 부르지 않고, 원곡을 불렀다. 원대에는 ‘북곡(北曲)’이 있었는데, 주로 연희(演戱)로 ‘잡극(杂剧)’이라 불렀다. 또 ‘남곡(南曲)’도 있었는데 ‘희문(戱文)’이라고 했다. 모두 연희를 하는 것이었지만 곡조는 달랐다.

명대(明代)에는 시를 노래하지 않았으며 또한 사나 곡도 노래하지 않았으므로, 남곡이니 북곡이니 하는 것도 없었다. 명 중기에는 가정(嘉靖, 1522~1566) 이후에 ‘곤곡(崑曲)’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곤곡은 쿤산(崑山)에서 나온 것으로서 명대에 전국적으로 성행했다.

청대(淸代) 도광(道光, 1821~1850) 연간 이전에는 계속해서 곤곡이 성행했다. 이때에는 북방의 각 지역에서도 모두 곤곡을 불렀다. 도광 연간 이후에는 한희(汉戱)와 휘조(徽调)가 합쳐져 생긴 ‘경희(京戱)’라는 것이 있었다. 청 말부터 지금까지 경극은 중국 전역에 걸쳐 널리 보급되었다. 동시에 각 지방에는 많은 지방희(地方戱)들도 있었다. 그 둘을 예로 들자면, 경희는 마치 옛 《시경》 중의 ‘아(雅)’와 같은 관화(官话)였던 반면, 지방희는 《시경》 중의 ‘풍(风)’과 같았다.

희곡 속의 노래 가사도 같지 않았다. 경극의 가사에는 일정한 규율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석 자, 석 자, 넉 자로 한 문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곤곡 속의 가사도 모두 고른 자구를 가지고 있었다.

‘고송(古颂)’은 옛 사람들이 큰 제사를 지낼 때 부르던 노래로서 지금의 국가(国歌)와 같은 것이다. 또한 옛날부터 전해온 일종의 ‘방지(旁枝)’가 있었는데, 이것은 공연도 하고 노래도 하는 희곡과 달리 공연은 하지 않고 노래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지는 예부터 줄곧 있어왔다. 송대 시인 루유(陸游)가 시를 지어 그 정황을 묘사했던 적이 있다.

석양에 오랜 버들가지 늘어진 조씨 장원에
북을 둘러멘 장님이 막 판을 벌이누나.
죽은 뒤의 시비를 누가 상관하랴마는
온마을 사람들 차이중랑 창하는 소리 듣노라.
(斜阳古柳赵家庄, 负鼓盲翁正作场.
身后是非谁管得, 满村听唱蔡中郞.)

이 시는 한 사람의 맹인이 북을 두드리며 차이중랑의 이야기를 창하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곧 《비파기》다. 차이중랑은 한 대의 대 문학가인 차이융(蔡邕)이다. 차이융이 과거에 급제한 뒤, 그 처인 자오우냥은 그의 관저를 찾아가나 그는 도리어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실제로 차이융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정녕 ‘죽은 뒤의 시비를 누가 상관할 것인가?’

명대에는 펑멍룽(冯梦龙)이라는 작가가 있어 《괘지아(挂枝儿)》와 《수락산파양(数落山坡羊)》이라는 작품을 썼는데 모두 노래만 했을 뿐 공연되지는 않았던 문학 작품이다. 또한 남방의 ‘탄사(弹词)’와 북방의 ‘대고(大鼓)’ 등도 모두 노래로 부르는 것이었다.

이상 서술한 역대 문학 작품들은 모두 노래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노래할 수 있는 문학 작품은 또다시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노래할 때 악기를 사용하지 않고 부르는 운문으로 당대 이후의 시들과 송대 이후의 사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일반 민가들도 여기에 속하는데, 이 모두가 노래만 부를 뿐 반주를 하지는 않는다.

다른 하나는 노래를 부를 때, 각종 악기를 사용하는데, 혹은 크고 작은 여러 악대로써 반주를 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대의 시, 송대의 사, 한위의 악부, 그리고 고대의 《시경》이 속한다. 이것들은 모두 노래할 때 악기로 반주를 한다.

이상에서 설명한 것은 고대 문학작품이며, 모두 노래로 부를 수 있는 시가와 희곡 등이다.

두 번째로 ‘부(赋)’라는 문학 작품을 살펴보자.

‘부’는 운(韵)을 사용한 문학 작품으로서 이것 역시 운문이다. 부는 전국 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그보다 앞선 주대(周代)에도 부가 있었으니, 전국 시대에 《순자(荀子)》라는 책에 부가 실렸다. 진대(秦代)에도 부가 있었다.

부를 중시했던 한대(汉代)에는 부를 짓는 일이 매우 성행했다. 한대의 유명한 부 작가로는 쓰마샹루(司马相如)가 있다. 부라는 문학 작품은 운을 사용한 것으로 비록 노래로 부르지는 않았지만 읊조렸다.

《한서(汉书)》에서는 ‘노래를 하지 않고 읊조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부라고 한다(不歌而诵 谓之赋)’고 했다. 부는 운이 있는 문자로 어떤 일이나 사물을 묘사한 것으로 묘사에다 과장을 더했다. 매 편의 부는 1000여 자 정도로 매우 길고 용운(用韵)을 하되, 운 역시 항상 변화를 주었다. 나중에 출현하는 사륙체의 변문(四六騈文)도 그 원류는 부에서 나온 것이다.

고대 문학작품 중에는 운을 사용하지 않은 문장인 산문(散文)이 있다. 옛 사람들의 산문은 대략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정해진 자구를 사용하는 산문이다. 예를 들면 《좌전(左传)》 같은 것은 거의 대부분 네 글자가 한 구절을 이룬다. 이러한 산문은 《시경》의 구법으로 문장을 쓴 것으로서 바로 문언문(文言文)의 시초가 된다.

둘째, 글자 수가 들쭉날쭉한 산문으로 《전국책(战国策)》과 《사기(史记)》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른바 《전국책》은 변사들이나 유세객들이 각 국을 돌아다니면서 지은 문장들이다.

《사기》 이후에는 변문(騈文)이 성행했다. 변문은 한대에 시작되어 당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성행했다. 이것은 특히 남․북조 시대에 가장 성행했으며 위신(庾信)․쉬링(徐陵)은 모두 변문가였다.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에 유행한 변체문(騈体文)은 성운(声韵)과 대구(对句)를 즐겨 사용했다. 또한 전고(典故)를 많이 사용하여 4․6형식의 구법으로 문체는 화려했으나 내용은 공허하고 실용적이지 못했다. 이러한 문체는 사람들의 사상을 크게 속박했다.

한위 (韩愈)

이제 당대(唐代)․송대(宋代)의 산문을 알아보도록 하자.

수대(隋代)가 시작되면서 변체문은 반대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당대, 송대에는 한위(韩愈)․어우양슈(欧阳修)․쑤스(苏轼) 등의 산문가들이 출현했는데 이들이 이른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들이다. 이들 팔대가는 다음과 같다.

류쭝위안(柳宗元)

당대(唐代) 허난(河南) 사람인 한위(韩愈)가 그 하나로 조상의 본관이 동북 랴오닝(遼寧)의 창리(昌黎) 지방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한창리(韩昌黎)’라고도 불렀다. 또 산시(山西) 사람 류쭝위안(柳宗元)이 있다.

송대에는 쑤쉰(苏洵)․쑤스(苏轼)․쑤저(苏辙)․어우양슈(欧阳修)․왕안스(王安石)․쩡궁(曾巩) 등 여섯 사람이 있었다. 쑤쉰․쑤스․쑤저의 ‘삼소(三苏)’는 모두 쓰촨 사람이며 어우양슈․왕안스․쩡궁은 모두 쟝시(江西) 사람이었다. 즉 ‘팔대가’는 당나라 사람이 둘, 송나라 사람이 여섯, 이렇게 해서 모두 여덟 사람이었다.

한위가 제일 먼저 ‘고문(古文)’을 주장했다. 그가 말한 고문은 주(周)․진(秦)시대의 문장이다. 그렇다면 주․진 시대에는 어떤 문장들이 있었는가? 여기서 말하는 고문은 꾸밈이나 수식이 없이 사실 그대로를 써나간 것을 가리킨다.

송대에는 쑤쉰(苏洵)․쑤스(苏轼)․쑤저(苏辙)․어우양슈(欧阳修)․왕안스(王安石)․쩡궁(曾巩) 등 여섯 사람이 있었다. 쑤쉰․쑤스․쑤저의 ‘삼소(三苏)’는 모두 쓰촨 사람이며 어우양슈․왕안스․쩡궁은 모두 쟝시(江西) 사람이었다. 즉 ‘팔대가’는 당나라 사람이 둘, 송나라 사람이 여섯, 이렇게 해서 모두 여덟 사람이었다.

한위가 제일 먼저 ‘고문(古文)’을 주장했다. 그가 말한 고문은 주(周)․진(秦)시대의 문장이다. 그렇다면 주․진 시대에는 어떤 문장들이 있었는가? 여기서 말하는 고문은 꾸밈이나 수식이 없이 사실 그대로를 써나간 것을 가리킨다.

송대에는 쑤쉰(苏洵)․쑤스(苏轼)․쑤저(苏辙)․어우양슈(欧阳修)․왕안스(王安石)․쩡궁(曾巩) 등 여섯 사람이 있었다. 쑤쉰․쑤스․쑤저의 ‘삼소(三苏)’는 모두 쓰촨 사람이며 어우양슈․왕안스․쩡궁은 모두 쟝시(江西) 사람이었다. 즉 ‘팔대가’는 당나라 사람이 둘, 송나라 사람이 여섯, 이렇게 해서 모두 여덟 사람이었다.

한위가 제일 먼저 ‘고문(古文)’을 주장했다. 그가 말한 고문은 주(周)․진(秦)시대의 문장이다. 그렇다면 주․진 시대에는 어떤 문장들이 있었는가? 여기서 말하는 고문은 꾸밈이나 수식이 없이 사실 그대로를 써나간 것을 가리킨다.

류쭝위안은 《검지려(黔之驴)》 《포사자설(捕蛇者说)》 《봉건론(封建论)》 같은 유명한 문장을 썼는데, 이것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면서 문장의 모범이 되었다.

당송 팔대가들의 문장은 백화문(白话文)에 가까웠다. 당연히 이러한 백화문은 주․진 시대의 백화문이었을 뿐이며, 당․송 시대로 치면 오히려 고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또한 팔대가들의 산문은 문장이 매우 짧았다.

현대의 중국 산문은 백화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문법 문제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한 발 앞선 것이다. 이러한 신 산문(新散文)은 장스자오(章士钊)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민국 3년에 《갑인잡지(甲寅杂誌)》라는 책에서 문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중국이 해방된 후에 통용되고 있는 산문은 완전히 백화화․문법화된 것으로서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기가 쉽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종합해 보면 중국의 고대문학은 첫째, 악기와 어울리는 운문 둘째, 악기와는 무관한 운문 셋째, 운문이 아닌 산문으로 나눌 수 있다.

다음에는 방언으로 씌어진 문장에 대해 얘기해 보자.

방언으로 씌어진 문장은 송대의 소설로부터 시작된다. 당대의 소설은 문언으로 씌어졌으며 모두 단편이었다.

송대에는 설서인(说书人)이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이러한 설서인들은 먼저 볜량(汴梁)에서 시작되어 나중에는 기타 여러 지방에까지 퍼졌으며 뒤에는 항저우(杭州)에까지 이르렀다. 설서인들은 처음에는 민간 전설이나 민간 고사들을 얘기했다. 후에 그들 각 지방의 구어(口语)를 사용하여 말한 고사를 엮어 놓은 것이 바로 ‘화본(话本)’이 되었다.

예를 들어 송대의 화본 《착참최녕(错斩崔寧)》과 《연옥관음(碾玉观音)》은 모두 매우 짧은 방언소설이고, 《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遗事)》 《오대사평화(五代史平话)》는 역사 이야기를 강(讲)하는 소설이다.

방언소설은 송 이후에도 계속 발전했다. 명대의 방언 백화소설은 대부분 장편인데, 예를 들어 《수호전(水浒传)》 《금병매(金甁梅)》 등은 산둥(山东) 방언 백화로 씌어진 것들이다.

《수호전》은 쑹쟝(宋江) 고사를 쓴 것인데 쑹쟝은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다. 송대의 《대송선화유사》에는 쑹쟝 고사의 대체적인 윤곽이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 남송, 특히 원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사들이 구전되어졌다. 명대 초년에는 쟝쑤(江苏) 사람 스나이안(施耐庵)이 오랫동안 전해져 온 쑹쟝 고사를 100회의 소설로 썼다. 이 소설은 방언 구어에다 문인들의 예술적인 가공을 더해 서술되었는데, 씌어진 문체나 문장이 매우 생동감 있고 정연했다. 산둥 방언으로 씌어진 《금병매》는 산둥 사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

내용은 서문경(西门庆)의 악한(恶汉) 생활을 그린 것으로, 내용이 매우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청대에는 방언으로 쓴 소설이 더욱 발전되어 《홍루몽(红楼梦)》 같은 작품이 나왔는데, 이것은 베이징어(北京语)로 씌어진 것이었다.

청 말에는 쑤저우어(苏州语)로 씌어진 《해상화열전(海上花列传)》이 나왔다. 그리고 자오쯔융(招子庸)의 《월구(粤讴)》는 지방의 운문으로 씌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