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에서 컴퓨터의 발명은 최초에 복잡한 연산을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할 도구를 찾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은 그 기술이 기하급수적인 가속도를 타고 발전하면서 테라비트terabit 단위의 연산 속도를 이용한 고도의 자동화 작업을 수행하고, 신속한 정보 검색 및 통신에까지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인공 지능 수준의 능동적인 전자두뇌는 아직 공상의 영역에서 현실로 다가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어쨌거나 이처럼 편리한 도구에 대한 필요성은 중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다만 수학과 논리에 대한 기본 개념이 다른 문화 체계 안에서 제기된 고대 중국의 컴퓨터에 대한 상상은 서구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원元나라 때의 윤사진尹士珍이 편찬한 《낭현기琅嬛記》에 기록된 다음의 이야기는 그런 상상력의 질적 차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4. 신비한 책상 컴퓨터 1
초여름의 제법 따가운 햇살이 대나무 잎사귀에 반사되면서 여울에서 어지럽게 노니는 물고기들처럼 현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정원의 백일홍 나무에 풍성하게 매달린 꽃망울들은 하나씩 선홍빛 꽃잎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우물가 앵두나무에는 가지마다 제법 실하게 살이 오른 열매들은 벌써 더위를 타는 듯 살그머니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연못을 사이에 두고, 역시 아담한 크기의 서재와 마주보고 있는 가산假山 위에 간단하게 엮은 누각의 난간에 기대선 채, 사상회謝霜回는 연신 터져 나오는 콧노래를 참을 수가 없었다. 실없는 사람처럼 자꾸만 벌어지는 입술에 걸린 만족스러운 웃음을 감출 생각도 없이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손에 들린 장남감에 흠뻑 빠져 있는 그를 보며, 모처럼 낭만적인 산보를 기대하며 남편을 따라 나섰던 그의 아내는 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사상회는 그런 아내의 심사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아내더러 자신의 이 유치한 즐거움에 동참하라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이것 좀 봐요! 정말 신기하지 않소?”
내키지 않는 표정을 애써 숨기며 남편의 손에 들린 기묘한 거울을 쳐다보던 그녀의 눈에도 이내 호기심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둥근 테두리에 여섯 개의 손잡이가 달린 그 거울은 여느 거울과는 외양부터 확연히 달랐다. 게다가 그 거울의 중앙은 어딘지 예사롭지 않은 안개에 싸여 있었다. 또한 남편은 보통의 거울을 쓸 때처럼 똑바로 자기 얼굴을 비쳐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 표면이 위를 향하도록 손바닥에 올려놓고 비스듬하게 안개 뭉치의 중앙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 이것만 보고 있으면,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앞쪽의 풍경이 멀리까지 환히 보이지 않소? 저걸 봐요. 저건 분명 여기서 십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황黃 수재秀才의 집이 아니오? 대문에 붙어 있는 저 대련對聯의 글귀는 그 친구의 돌아가신 조부께서 손수 쓰신 것이 틀림없고! 내리 긋는 획을 저렇게 중간에 살짝 끊어지게 만드는 것이 그 어르신 특유의 필체라는 건 이 근방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이거 정말 신기한 물건이 아니오?”
이렇게 한참 동안 여기저기를 비추며 연신 감탄하던 그는 제법 그럴싸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내를 보고 말했다.
“이것만 있으면 군대를 지휘하고 작전을 짜는 것쯤은 일도 아니겠구려. 적들이 무슨 진용을 펴고, 무슨 무기를 갖추고, 어디에 매복하건 간에 이렇게 손바닥에서 환히 볼 수 있으니 말이오. 안 그렇소?”
“에그, 약해빠진 서생 나리께서 이미 머리카락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데도 전쟁놀이에 관심이 있나 보군요. 하지만 아무래도 그 물건은 제가 압수해야 되겠네요. 안 그러면 며칠 지나지 않아 온 동네 여인네들이 당신에게 속살까지 다 보여줘야 할 모양이니까요.”
“허, 이 사람이 무슨 소릴…. 가만! 그러고 보니, 이게 그런 쪽으로도 아주 쓸모가 있겠는 걸?”
“흥, 마치 내가 가르쳐줘서 알게 됐다는 말투로군요. 어쨌든 엉큼한 사람은 그런 걸 갖고 있으면 안 되니까, 어서 이리 주세요!”
거울을 빼앗으려는 아내의 손길을 이리저리 피하며 난간을 뛰어다니던 그는 문득 동작을 멈추고 연못 건너편의 서재를 바라보았다. 가빠진 숨을 토하며 남편의 손에 들린 거울을 움켜쥐던 그의 아내도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서재의 하얀 벽과 보름달처럼 둥근 창에는 물빛에 반사된 녹음과 백일홍 꽃잎의 연분홍 색깔이 그윽하게 어울려 일렁이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응시하던 두 사람은 갑자기 약속이나 한 듯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둘 만이 의미를 아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설마 이런 게 세상에 또 있진 않겠지요?”
갑자기 눈을 찡긋 하더니 거울을 재빨리 낚아채서 등 뒤로 숨기며 아내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건 모르지…”
사상회는 손가락으로 서재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약 삼백 오십년 전인 남당南唐 때에 왕王 아무개가 갖고 있었다는 이 신기한 거울이 그의 손에 들어오게 된 데에는 그들 부부만이 아는 또 다른 보물의 도움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신비한 기능을 가진 하나의 박달나무 책상이었다. 우연히 그것을 얻게 되었을 때부터 마땅한 이름이 없어서 그 자신이 임의로 ‘칠보령단궤七寶靈檀机’라고 명명한 그 책상은 겉보기에는 그다지 특별한 데가 없는 물건이었다. 그것은 바닥에 앉아서나 쓸 수 있을 만큼 짤막한 다리를 비롯해서, 그다지 눈에 띄는 장식도 없이 그저 박달나무에 진한 옻칠을 입힌 책상이었다. 굳이 한 가지 특별한 곳을 꼽으라면, 그 책상의 표면에 서체書體를 분간할 수 없는, 글자 비슷한 무늬가 어지럽게 그려져 있다는 정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한 무늬는 어느 순간 너무나 또렷한 글자로, 어떤 경우에는 전서체篆書體로 또 어떤 경우에는 날렵한 초서체草書體로 바뀌어 사상회를 놀라게 만들곤 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책상에 그런 글자가 나타나는 것이 아무 때나 제멋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오직 사상회가 무언가를 바라며 책상 표면을 문지를 때에만 나타났으며, 그 경우 글자들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문장의 내용은 항상 사상회가 바라는 무언가에 대한 정확한—사실 그것이 정확하다는 것도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간신히 확인된 것이었지만—해답을 담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사상회가 인생의 도리에 대해 궁금해 하면서 책상 표면을 문지르면, 신기하게도 책상 표면의 무늬들은 저절로 글자 모양으로 변하면서 세상의 인연因緣이나 인간의 타고난 본성과 자질 등에 대한 깨달음을 유도하는 문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마음속으로 무언가 얻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 책상을 문지르면, 책상의 무늬들은 그 물건의 내력과 정확한 쓰임새, 그리고 지금 그 물건의 소재와 그것을 얻는 방법 등을 알려주는 문장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 신기한 책상은 어떤 병이건 그걸 고치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고, 어떤 주문을 외거나 어떤 부적을 통해서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방법까지 알려주곤 했다. 심지어 책을 읽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책상 표면에 올바른 구절과 그에 대한 다양한 주석과 해설까지 꼼꼼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신기한 ‘책상’이 그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은 서른 중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신혼 같은 금슬을 자랑하며, 그의 다른 친구들이 한둘쯤은 거느리고 있는 첩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하는 두 살 터울의 사랑스러운 아내였다. 벌써 어른 티가 나는 열세 살의 딸과 열 살이 된 아들이 가끔 눈치를 줄 정도로 다정한 이 부부가 맺어지는 데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이 신기한 책상은 자상한 월하노인月下老人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던 것이다.
스무 살의 사상회는 나이답지 않게 제법 탈속脫俗한 도사道士의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망해가는 송宋 왕조에 환멸을 느끼고 그나마 작은 지방관의 벼슬조차 내던지고 반쯤 은거의 길을 택한 부친 덕분에 그의 집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금릉錦陵(지금의 쓰추안四川省 청뚜成都)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교외에 자리 잡은 아담한 장원莊園이었고, 어려서부터 그는 따로 서당을 다니지 않고 부친과 당신의 친구들에게 글공부를 해야 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어울릴 만한 친구도 마땅히 없었지만, 다행히 그는 책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특히 부친의 친구들이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명예나 이익, 자질구레한 예의범절 따위는 돌보지 않는 괴짜들이어서, 그들에게 배운 글들은 대부분 유가의 경전보다는 잡다한 박물학이나 불가佛家, 도가道家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나마 이따금 부친이 직접 ‘십삼경十三經’이나 《십팔사략十八史略》 같은 책들을 읽히고 설명해주시지 않았더라면, 그의 머리에는 온통 《황정경黃庭經》이나 《능엄경楞嚴經》 등 이른바 ‘방문좌도房門左道’의 지식만 가득했을 터였다. 게다가 그 자신 또한 호기심이 왕성해서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같은 역사책은 물론이거니와 《전기傳奇》나 《박물지博物志》와 같은 신기한 이야기책에도 깊이 빠져드는 일이 많았다. 또한 그가 ‘술독’이라고 별명을 붙여준 부친의 친구가 선물한 그 신기한 책상은 그런 그의 취향을 만족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날은 계절상으로는 오늘보다 조금 이른 때였다. 흐드러지게 피었다 떨어진 목련 꽃들이 아직 시들지 않은 채 나무 발치에서 눈처럼 쌓여 있을 때였으니 말이다. 아침 일찍 친구들과 어울려 낚시를 떠나면서 부친은 그에게 시내에 나가 종이와 먹을 좀 사오라고 일렀다. 그의 나이가 열다섯이 되면서부터 집안에 필요한 물건이 생기게 되면 으레 이런 식이 되었다. 부친은 그를 데리고 시내에 나갈 때면 항상 들르던 허름한 주막의 주인이었던 장 노인이 이태 전에 죽었고, 그의 아들 장이張二가 그 자리에 이층짜리 새 건물을 지어 기루妓樓를 열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점점 ‘속세’와 담을 쌓고 있었다. 사상회가 알기로 장 노인에게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어떻게 그가 ‘둘째’라고 불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사상회가 일곱 살 때 부친의 손을 잡고 처음 시내에 왔을 때부터 친하게 대해주었던 장이는 스물넷에 어엿한 사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가게 일층에는 제법 호사한 식당을 차리고, 이층에는 얼기설기 칸막이를 한 작은 방들을 열 개 남짓 만들고 기녀들을 고용하여 장사를 하고 있었다. 검은 바탕에 큼지막한 붉은 글씨로 쓴 ‘천화루天花樓’라는 상투적인 간판을 내건 그 가게는 기루치고는 작은 규모인지라 노래와 가무에 뛰어난 청기靑妓보다는 몸을 파는 홍기紅妓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곳을 찾는 손님들도 상류층보다는 자잘한 장사치들이나 놈팽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적어도 낮에는 소박하고 비교적 깔끔한 식당 같은 분위기를 더 많이 풍기는 곳이었다. 장이는 대개 점심 무렵에 가게 문을 열고 자신이 직접 계산대에 앉아 종업원들을 부렸는데, 한적할 때에는 계산대 옆의 벽에 뚫린 창을 통해 길거리를 구경할 수도 있어서 그다지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볼에 살이 더 오른 걸 보니, 요즘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네요?”
주렴을 밀치고 들어오는 그를 발견하고는 눈이 다 감기도록 불룩한 볼을 밀치며 반가운 웃음을 짓는 장이를 보며 사상회가 인사를 건넸다.
“이건 살이 아니라 수면부족과 술독 때문에 부은 것이야. 근데 애송이 도사께선 왜 이리 오랜만에 찾아왔지? 오호라, 이참에 총각 딱지를 떼려고 그 사이 몸을 만들고 있었나 보네? 그제 우리 집에 아주 기찬 애가 하나 들어왔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쉰 소리 말고, 소면素麪이나 한 그릇 말아줘요.”
“내가 언제 그걸 안 준다고 했나? 오늘은 서비스로 시원한 죽엽청주竹葉淸酒도 한 잔 주지. 근데 정말 이런 기회를 놓칠 셈인가? 낮이라 손님도 없고, 내 특별히 자네한테는 은자銀子 한 냥만 받겠어. 우리 사이에 돈을 받는 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총각 딱지를 떼는 일이니까…”
“됐네요, 됐어요! 그 돈이면 황씨네 책방에서 소설 책 두 권은 사겠네요.”
“이 철부지 도사는 그저 책만 읽으면 도가 트이는 줄 아는 모양일세 그려. 거저 들어온 봉을 제가 싫다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달랑 책만 사서 돌아갔다간 두고두고 후회할 거야. 청명淸明(양력 4월 5일 전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오늘 초저녁부터 꽃시장이 크게 열릴 참이거든.”
“정말 그렇군요. 하긴 오륙년 전 이 무렵에 아버님을 따라왔다가 그 꽃시장을 구경한 적이 있는데, 참 대단하더군요.”
“촌 냄새 그만 풍기라고! 작년만 해도 그 규모가 예전에 비할 데가 아니었어. 벌써 길거리에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잖아? 조금만 더 있으면 아마 사람들에 밀려서 걸어 다니기도 힘들어질 걸? 게다가 오늘은 온 시내의 처녀들이 다 꽃 사러 나올 테니……”
끈적한 웃음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리는 장이를 보며 쯧 하고 혀를 차면서, 사상회는 손가락으로 주방 쪽을 가리켰다. 장이는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차호茶壺를 들고 지나가는 점소이를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좀 잽싸게 움직여! 그리고 이 시골 도사한테 소면하고 죽엽청주 한 잔 가져다 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상회의 차분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술은 관두고 녹차나 좀 줘요.”
이튿날 가게 문을 열던 장이는 봇짐 지게도 없이 빈 몸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사상회를 발견하고 적잖이 놀란 얼굴로 농을 걸었다.
“아무래도 어제 그냥 갔던 게 아쉬웠던 모양이지? 하지만 도사 친구, 우리 매향梅香이는 아직 일어나 세수도 안 하고 있다네.”
“쯧, 아직도 그 실없는 소리요?”
“그게 아니라면, 보통 서너 달에 한 번 아니면 대여섯 달에 한 번 들르는 자네가 어떻게 하루 만에 또 나타났단 말인가?”
“그, 그게……”
사상회는 당황하여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험! 그게 아니라, 내 형님께 좀 물어볼 게 있어요.”
“매향이가 몇 살이냐고?”
“그,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다름이 아니고, 시내에서 제일 솜씨 좋은 화방畵房이 어디냐는 거요.”
“난데없이 웬 화방을 찾아?”
“그, 그러니까…… 참 내, 화방이야 그림을 그릴 일이 있으니까 찾는 거 아니오?”
“무슨 그림인데?”
“흠, 그건 알 거 없고, 솜씨 좋은 화방이나 좀 소개해줘요.”
“내가 그딴 걸 어떻게 알아? 하지만 남문 거리에 가면 큼직한 화방들이 줄줄이 모여 있으니, 거기 가서 수소문해보면 될 거야. 근데 무슨 그림인데 솜씨 좋은 화방을 찾는담? 시골 도사도 알다시피 나도 오지랖이 넓어서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인데…”
“흠, 그건 나중에 알려드리리다. 아무튼 남문 거리라고 그랬지요?”
“그래, 그래. 근데 왜 그리 바빠? 점심때도 다 돼 가는데 소면이라도 먹고 가지.”
“나중에 와서 먹을 테니 잘 보관해두시구려.”
남문 거리에 제법 큰 화방이 많을 거라는 장이의 말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한 나절 동안 십여 군데의 화방을 둘러보며 전시된 그림들을 살펴보던 사상회는 크게 낙심하고 말았다. 꽤 유명하다는 화가들이 그렸다는 그림들 가운데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만한 솜씨를 보인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그리려고 하는 것은 한 폭의 인물화였는데, 화방에 전시된 그림들은 하나같이 판에 박히고 생기 없는 그림들뿐이었던 것이다.
청명을 앞둔 꽃시장에 관한 이야기는 책방을 하고 있는 황 노인에게도 한나절이나 들어야 했다. 오랜만에 말상대를 만난 황 노인은 사상회가 뽑아온 두 권의 책값을 계산할 생각은 않고, 연신 침을 튀겨가며 꽃 얘기를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예를 들면, 장미는 왕삼王三 네 집에서 키운 것이 최고인데, 한 가지에 호두만한 크기의 빨간 장미가 많게는 스무 송이까지 달려 있고, 가시도 잘 다듬어서 팔기 때문에 여자들 머리에 꽂고 다니기엔 그만이다. 곽 노인은 원래 수목원을 하던 사람인데, 늦게까지 피고 꽃잎도 큰 목련을 개발해서 여자들 머리 장식으로 인기가 그만인지라, 지금은 시장 입구에 큼지막한 가게를 열어놓고 대목마다 돈을 아예 수레로 실어 나르고 있다. 작년에 부임한 현령縣令 부인과 딸이 올해는 쉰 송이를 예약해놓아서 그것만 팔아도 한 해 장사는 다 한 셈인데, 늘그막에 돈독이 올라서 올해는 또 모란까지 곱게 키워서 가게 가득 채워놓고 아예 밤을 새가며 장사를 하고 있다.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무려 세 시간이나 늘어놓는 바람에 어느새 날이 저물어, 그저 예예 하며 들어주던 사상회는 예정에 없던 꽃시장 구경을 하게 되었다. 길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연신 밀려드는 사람들 물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나섰던 사상회도 꽃시장으로 밀려가고 말았던 것이다.
사상회가 자죽紫竹을 처음 본 것은 곽 노인의 가게 앞에서였다. 벌써 목련 한 송이를 사서 구름 같은 머리에 꽂은 채, 하녀로 보이는 계집애 하나를 데리고 열심히 모란을 구경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한 눈에 사상회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다. 사람들에게 떠밀리며 등에 짊어진 봇짐 상자가 기울어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멜빵을 움켜쥐면서도 그의 눈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다지 크지 않은 체구에 갸름한 얼굴, 목련보다 흰 얼굴과 손, 하얗게 웃고 있는 모란보다 붉은 입술… 비틀비틀 옆 사람의 발을 밟고 자신도 밟히면서 인파에 떠밀리고 있었지만, 흐린 불빛 아래 그녀의 모습이 그의 눈에는 너무도 선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란 속에서 어렴풋이 들은 그녀의 이름이 끝없이 귓전에 메아리쳤다: 자죽!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놀란 눈으로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시선을 뿌리치고 침실로 들어간 그는 당연히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대로 잠들었다간 그녀의 얼굴을 영영 잊어버리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움으로 밤을 지새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긴 시간인 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한결같은 어둠 속에 보일 듯 말 듯 아른거리는 그리운 얼굴은 수마睡魔의 정기를 빨아먹으며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생생해진다. 그리고 그 모습은 꿈인 듯 현실인 듯 더욱 생생해진다. 바로 그런 환상의 언저리에서, 사상회는 문득 언젠가 《문기록聞奇錄》(당나라 말엽에서 오대五代 사이에 편찬된 필기집筆記集으로, 편찬자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음)에서 읽었던 낭만적인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그에 따르면, 당나라 때의 조안趙顔이라는 진사進士가 진진眞眞이라는 미녀의 초상화 한 장을 얻었는데,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말이 그녀의 이름을 백일 동안 부르다가 그녀가 대답할 때 온갖 색깔을 뒤섞은 술을 그림 위에 뿌리면 그림 속의 미녀가 실제 사람으로 변해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순진한 조안은 착실하게 화가의 말대로 따라했고, 그 결과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녀를 아내로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림이라, 그림….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화가가 필요하겠군. 설명만 듣고도 직접 본 것처럼 사실적이면서, 금방이라도 살아나올 것처럼 생동감 있게 그리는 화가가…. 하지만 이내 눈살이 찌푸려진다. 과연 인간 세상에 그런 화가가 있기나 할까? 과연…?
갑자기 그가 튕기듯 방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래, 맞아! 영단궤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지? 어둠 속을 발길로 더듬어 대충 신을 꿰고, 그가 마당을 가로질러 십여 미터 떨어진 서재로 달려가기까지는 겨우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뱉는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간신히 촛불을 켜고, 떨리는 손으로 칠보령단궤의 표면을 더듬었다. 순식간에 책상 표면은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잠시 후, 손가락 끝에서 벌레가 기어가듯 글자들이 움직이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리고 거칠어진 그의 숨결에 흔들리는 촛불의 노르스름한 빛이 창호지로 스미는 새벽의 여명에 흐려질 무렵, 책상 위에는 두 줄의 수수께끼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한낮의 남쪽 거리에 인연이 있나니,
보배로운 거울이 무산의 선녀 모습 비추네.
南街有緣日正午, 寶鏡照畵巫山姑.
청명절이라고는 해도 아직 점심 무렵도 되지 않은 시각의 거리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행상들은 이제 막 좌판을 설치하며 대목의 절정에 대비하고 있었고, 간밤의 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또 하루의 거나한 하루를 위해 술동이를 들고 술집으로 가는 어느 집 머슴이며, 모자란 점심 찬거리를 사러 나온 몇몇 아낙들이 벌써 지친 표정으로 서로 지나치며 이런저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바지런한 아이들은 지난 밤 어질러진 거리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간간이 때 이른 폭죽을 요란하게 터뜨리며 와! 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
죽이라도 좀 먹고 나올걸 그랬어. 간간이 스치는 새털구름 외에는 푸르기 그지없는 하늘에서 제법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벌써 스멀스멀 먼지를 머금고 거리에 어른어른 피어오르는 후끈한 열기에 흐릿한 현기증을 느꼈다. 벌써 이틀째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붙잡으며 식당으로 끌고 가려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나온 것이 내심 후회스러웠다. 한낮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장이의 가게에 들러서 소면이라도 먹어두는 게 좋겠어. 그러나 이백 걸음쯤 떨어진 천화루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다리에 맥이 풀리며 길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젊은이, 무슨 병이 있는 모양인데, 이런 날 혼자 돌아다니다간 병풍 뒤에 누워 향 연기 맡기 십상이라네.”
사상회가 간신히 고개를 조금 치켜들어 돌리고 눈동자를 옆으로 밀어 보니, 뒤편에서 허름한 차림의 도사 하나가 혀를 차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풀어 헝클어진 반백의 머리카락 사이로 슬쩍 보이는 늙수그레한 얼굴에는 도무지 코를 제외하고 주름으로 덮이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도사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지만, 얼굴 근육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이러고 있다간 큰일 나겠군. 집이 어딘가? 내가 데려다줌세.”
“도사님, 지금 집으로 돌아갈 순 없고, 수고스럽지만 절 천화루까지만 좀 데려다주시겠습니까?”
“엥? 그 몸으로 기루를 가자는 것인가? 허허,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기껏 홍루의 기생에게 빠져 몸을 망치려 들어서야 되겠는가?”
사상회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 가끔 거기 들러 소면을 먹곤 해서, 장 사장과 안면이 좀 있거든요.”
“이런, 미안하네! 하긴 미간에 색기色氣가 약한 것으로 보아 그런 걸 밝힐 사람은 아닌 듯하네만, 그래도 기루의 사장하고 친하다니 이상하게 들리는구먼.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