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정국-세계 제국 2

5-2 밀입국자

당 무종 개성 4년(839) 4월 5일, 일본으로 가는 배 한 척이 해주(海州. 지금의 장쑤성 롄윈강連雲港)에 정박했다. 그런데 본래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한 일본 승려가 3명의 시종을 데리고 몰래 하선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당시 그 승려는 대담하면서도 경솔한 결정을 내렸다. 당나라에 남아 불법체류를 하기로 했다.
그 승려는 바로 엔닌圓仁 법사였다.12

엔닌은 일본 불교 천태종 산몬파山門派의 창시자로서 사후에 세이와淸和 천황에게서 자각대사慈覺大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는 오늘날 대단히 유명한 인물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일본 사절단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간 청익승請益僧에 불과했다. 청익승은 학문승學問僧과 마찬가지로 당나라에 불법을 배우러 간 승려였다. 다만 학문승은 유학생 신분으로 당나라에 장기 체류할 수 있었지만, 청익승은 사절단을 따라갔다가 다시 사절단을 따라 돌아와야 했다. 비자 기한이 정해진 일종의 방문학자였던 셈이다.

엔닌의 스승인 사이초最澄도 옛날에 청익승이었다. 그는 귀국할 때 임해臨海의 용흥사龍興寺에서 《법화경》 등 불경 128부 345권을 가져갔고 왕희지 등 명가의 비첩碑帖과 탁본 17종도 몸에 지니고 돌아갔다. 그래서 정식으로 일본 불교 천태종을 창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이초는 함께 당나라에 갔던 진언종眞言宗의 창시자 구카이空海 법사처럼 장안에서 정통 밀교密敎를 배우지는 못한 탓에 훗날 일본 천태종의 세를 확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3

당나라에 간 엔닌은 그 결함을 보완하고자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엔닌이 양주에 도착한 뒤, 당국은 그로 하여금 개원사開元寺에서 산스크리트어만 공부하게 하고 관내를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게 했다. 그는 스승이 방문했던 천태종의 성지 천태산天台山에 꼭 참배를 가고 싶었지만 역시 허락을 얻지 못했다. 그랬으니 장안으로 공부를 하러 가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엔닌은 중국에 온 목적을 한 가지도 못 이루게 되었다.
귀국을 코앞에 두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밀입국자가 되었다.

圓仁 頭像

밀입국은 위험이 뒤따랐다. 실제로 엔닌은 하선한 뒤, 현지인에게 신분이 들통 나서 관부에 의해 다시 배로 호송되었다. 그러나 엔닌은 포기하지 않았다. 6월 7일, 그가 탄 견당사遣唐使의 배가 적산포(赤山浦. 지금의 산둥성 원덩시文登市 칭닝향靑寧鄕 츠산촌赤山村)에 정박하자, 그는 이튿날 또 배에서 내렸다.
운 좋게도 그는 신라인의 사원에 몸을 숨겼다.

신라는 일찍부터 중국과 왕래가 있었으며 한반도의 주인이 된 뒤에는 왕래가 더 잦아졌다. 더욱이 유교 경전이 신라 국학의 시험 과목이었기 때문에 많은 귀족 자제들이 장안에 가서 유학생이 되었다. 그중 최치원 같은 사람은 성적이 탁월해서 18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그가 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14

두 나라는 해상무역도 매우 활발했다. 물류를 담당하는 상선이 지금의 산둥반도, 장쑤 연해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 열도 사이를 짐을 가득 싣고 오갔다. 그 상선들은 화물선이자 여객선이었으며 엔닌이 탄 배는 일본 견당사가 고용한 신라 배로서 모두 9척이었다.15

그것은 확실히 국제화된 방식이었다.

그와 동시에 적지 않은 신라인들이 중국 연해 지역에 거주지를 조성했는데 그것을 신라방新羅坊이라고 불렀다. 엔닌이 2번째로 상륙한 적산포는 바로 신라인의 촌락이었으며 그가 몸을 숨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도 신라인이 세운 불교 사원이었다. 그리고 그 사원을 세운 사람은 신라 교민들의 수령, 장보고였다.16

장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국제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장보고는 정치적인 두뇌와 군사적인 재능도 뛰어나서 국내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한편, 탄탄한 배경과 군사력 그리고 인맥까지 겸비했던 풍운아였다. 엔닌이 그의 사원에 들어간 것은 청말과 민국 시기에 상하이탄의 조계지에 들어가 유력자의 보호를 받게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17
확인된 바에 따르면 8개월 뒤, 엔닌은 지방정부가 발급한 통행증을 받아 밀입국자에서 합법적인 여행자로 바뀌었다. 엔닌의 신분을 바꿔주려고 상부와 소통한 사람은 현지 정부 파견기관의 말단 관리였다. 본래 그는 신라 교민들과의 협조와 연락 업무를 담당했는데 관직명은 ‘구당신라압아勾當新羅押衙’였다.
한 일본인의 소망이 그렇게 신라인과 중국인의 도움으로 실현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국제합작이었다.

새 신분을 얻은 엔닌은 바라던 대로 천태산에 참배를 하러 갔고 그 다음에는 장안에 가서 5년 가까이 공부에 매진했다. 당시 그의 경험은 한문으로 쓴 《입당구법순례기入唐求法巡禮記》에 서술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현장 법사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나란히 이야기하지만 진정으로 비교 가능한 것은 역시 현장과 엔닌이다.

그렇다. 현장도 밀입국자였다.

사실 현장은 서쪽으로 떠날 때 신청만 했지 허가는 받지 못했다. 그가 떠난 뒤, 당국은 막으려고 나섰지만 막지 못했다. 막지 못한 것은 당연히 누가 도와줬기 때문이었고 그중에는 제국의 관리도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현장이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과주(瓜州. 지금의 간쑤 안시安西)에 도착했을 때, 과주자사 독고달獨孤達은 기뻐서 잔치를 열어 그를 환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관리 이창李昌만 홀로 미심쩍어 하며 그에게 물었다.

“여기, 양주(凉州. 지금의 간쑤 우웨이武威)에서 급히 보내온 문서가 있는데 멋대로 국경을 넘은 현장을 체포하라는군요. 혹시 법사님이 그 현장인가요?”

현장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창이 또 말했다.

“법사님이 사실대로만 말씀해주시면 제가 돕겠습니다.”

현장이 말했다.

“빈승이 바로 현장입니다.”

이창은 그 문서를 찢고 말했다.

“법사님, 어서 떠나십시오!”

현장은 그제야 계속 서쪽으로 걸음을 재촉할 수 있었다. 여전히 길은 험난했지만 이오(伊吾. 지금의 신장 하미哈密)에 도착하자 사정이 한결 나아졌다. 고창왕이 그곳까지 사람을 보내 맞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본서의 제4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종교의 힘이 국경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 후의 여정은 줄곧 파란불이었다. 당시 서역 각국은 불교를 믿었고 고창왕이 현장에게 통과증뿐만 아니라 후한 예물까지 선사했기 때문이다. 현장 법사는 그때부터 합법적인 여행자가 되었다.

현장과 엔닌은 실로 처지가 흡사했다!

다만 한 사람은 나가기가 힘들었고, 한 사람은 들어오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당시 중국 제국이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거꾸로 대외개방은 수당의 기본 국책이었고 그것은 수 양제 때 이미 정해졌다. 그리고 사실상 수 양제의 장려에 힘입어 일본 사신 오노노 이모코의 2차 중국 방문이 이뤄졌다. 이번에 그는 유학생과 학문승을 각 4명씩 데려왔으며 한문으로 적은 국서의 첫 마디는 “동쪽의 천황이 서쪽의 황제에게 고한다.”(東天皇敬白西皇帝.)였다.

그것은 일본이 최초로 천황의 명의로 중국에 보낸 국서였다고 한다.19

이에 대해 중국의 사서에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었으며 이후 두 나라의 대화도 별로 진전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일본인의 열정은 늘어만 갔다. 정관 4년(630) 8월, 즉 당 태종이 천카간이 된 지 4, 5개월 뒤, 일본은 처음으로 견당사를 파견했고 그들 일행은 장안에서 꼬박 2년을 머물렀다.20

그 후로도 견당사의 파견은 계속 이어져서 당나라 때만 도합 19번에 달했다. 일행의 인원이 가장 많았을 때는 당 문종文宗 태화太和 8년(834)이었는데 651명이었고 그 다음은 당 현종 개원 20년(732)과 개원 4년(716년)으로서 각기 594명과 557명이었다. 그들 중 다수는 중국 땅을 밟았지만 중간에 조난을 당하거나 객사해서 사랑하는 조국에 못 돌아간 이들도 있었다.21

그렇게 많은 일본인들이 왜 위험을 무릅쓰고 당나라에 가려 한 걸까?

공부와 교류를 위해서였다.

실제로 견당사 일행의 인원이 많았던 것은 유학생과 학문승이 따라갔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누구는 학업을 마치고 귀국해 일본 문명에 공헌했는데 가타카나를 만든 기비노 마키비吉備眞備가 그 예이고, 또 누구는 중국에 정착해 중일 친선의 가교가 되었는데 당나라의 관리가 된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吕가 그 예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구카이와 사이초처럼 귀국해 종파를 창립한 고승도 있었다.

이 지점에서 종교가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특히 불교가 가장 일본인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오노노 이모코는 자신들이 중국의 ‘보살 천자’가 불법을 중흥시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중히 배우기 위해 중국에 온 것이라고 명확히 밝힌 바 있다.22

사실 당나라 때 성행한 외래 종교는 불교뿐만이 아니었다. 천교(祆敎. 배화교拜火敎라고도 하며 조로아스터교를 뜻한다), 경교(景敎. 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파), 마니교, 심지어 이슬람교도 있었다. 그들은 당나라의 도읍과 다른 주요 도시에 사원을 짓고 신도를 모집했는데, 당나라 정부는 그들을 보호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도자에게 관직을 주거나 그 관직과 동일한 등급의 대우를 해주기까지 했다.23

확실히 그것은 세계성을 띤 개방주의였다. 그리고 수당의 세계적 문명은 여러 나라 사람들이 공동으로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문명의 중심은 장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