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노래秋詞/당唐 유우석劉禹錫
自古逢秋悲寂寥 예로부터 가을은 쓸쓸해서 슬프다지만
我言秋日勝春朝 나는 가을이 봄보다 낫다고 말하노라
晴空一鶴排雲上 맑은 하늘 학 하나 구름 헤치고 올라
便引詩情到碧霄 나의 시정 벽공으로 이끌어 올리기에
이 시는 유우석(劉禹錫, 772~842)이 806년~814년 무렵, 낭주 사마(朗州司馬)를 지낼 때 쓴 시로 알려져 있다. 동일 제목의 2편 중 첫 번째 시이다. 30대 중후반 유우석의 지기(志氣)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오랜 옛날부터 가을을 배경으로 쓸쓸하거나 실의에 찬 문학 작품이 많이 있었다. 그 비분과 영탄은 대개 정의감과 포부는 있지만 현실적 힘이 부족해서 생긴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더욱 애절하여 그 슬픔이 가슴을 파고든다. 그러나 이 시인은 다른 목소리를 낸다. 나는 가을이 좋다! 아니, 나는 가을이 봄보다 더 좋다! 그 이유가 매우 시적이라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지 모르겠다. 학 한 마리가 구름을 헤치고 공활한 가을 창공으로 아득히 날아오른다. 푸른 하늘에 뜬 하나의 흰 점! 나의 마음도 그에 이끌려 저 벽공 높이 솟아오른다고 한다. 약자의 울분과 비탄에 젖지 않고 역경을 헤치고 불굴의 기상을 떨치며 저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하고 싶다는 말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듯이.
유우석이 가을을 두고 이전 사람과 정반대 생각을 하고 또 그것을 시로 쓰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유우석은 본래 당시 정권을 장악한 왕숙문(王叔文)과 가까이 지냈는데 805년에 반대당이 집권하여 이듬해 왕숙문이 사사되고 유종원 등과 함께 좌천을 가게 된 것이다. 낭주는 바로 그가 10년간 귀양 비슷한 좌천 생활을 한 곳으로, 오늘날 호남성 장사(長沙)의 서북방에 위치한 상덕(常德)이란 곳인데 장가계에서 흘러오는 완수(沅水)가 동정호를 향해 구불구불 흘러가는 아주 깊은 산골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 푸른 하늘 높이 구름을 헤치고 날아오르는 한 마리 학은 시인 자신이 투영된 일종의 우의(寓意)인 것이다. 구름을 헤친다고 할 때 배격한다는 ‘배(排)’ 자를 놓은 것에서 시인의 투지를 읽을 수 있다.
뒤의 한 수도 이 시와 내용면에서 서로 보완되어 있어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山明水淨夜來霜 맑은 산 깨끗한 물 밤에는 서리 내려
數樹深紅出淺黃 몇 그루 짙은 홍색 황색 속에 빛나네
試上高樓淸入骨 높은 누각 오르면 맑은 기운 파고드니
豈知春色嗾人狂 사람 마음 들띄우는 봄빛 어찌 알겠나
가을이 되면 산이 맑아지고 물은 깨끗해지며 밤이 되면 서리가 내린다. 그 때문에 산은 어느새 옅은 낙엽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가운데 몇 그루 단풍나무는 아주 진한 붉은 색으로 물들어 특별히 눈에 띈다. 출(出) 자는 빨간 단풍나무가 참나무 등의 황색 단풍에서 도드라져 보인다는 의미로 쓴 글자이다. 이 부분 역시 가을의 풍경이기도 하지만 시인의 우의 역시 담겨 있다.
나의 말을 못 믿겠으면 한 번 높은 누각에 올라 보라. 그러면 그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고 맑은 기운이 뼈에 파고들 것이다. 이러한 가을의 품격을 제대로 알게 되면 더 이상 사람 마음을 미치게 하는 봄빛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들뜬 봄빛은 명철한 가을과 비교해 존재 의의가 무색하다는 의미를 ‘어찌 알리오[豈知]’라고 표현하였는데 ‘기여(豈如)’라고 된 판본도 많다. 중화서국의 《유우석집(劉禹錫集)》에는 ‘기지(豈知)’로 되어 있다.
‘맑음이 뼛골에 파고든다.’는 말은 앞 시의 ‘시정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는 말과 함께 이 시인이 가을이 슬프지 않고 봄 보다 좋은 이유를 집약한 말이다. 좌천되어 온 시인의 입장에서 좌절과 비탄에 젖지 않고 불굴의 기개를 떨치고 있는 점을 시로 이렇게 녹인 것이라고나 할까. 확실히 유우석의 말처럼 가을은 사람의 기상을 키우고 지기를 맑게 해주는 특징이 있다. 고난의 극복을 통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보다 먼저 느끼고 말하게 된다. 이 시에 철리적인 성격이 농후하여 우리를 사색으로 인도하고 또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 것은 시인의 이런 고난을 극복하려는 투지가 글자마다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365일 한시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