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정관의 노선
돌궐을 멸함과 동시에 당나라는 정관의 치貞觀之治를 맞이했다.30
정관의 치의 대표자는 위징이었다.
위징은 본래 이건성 쪽 인물이었고 관직이 종오품從五品 태자세마太子洗馬였다. 비록 지위는 높지 않았지만 ‘태자당’의 핵심인물로서 일찍이 이세민을 빨리 해치우라고 이건성에게 적극 권유했다. 그래서 현무문의 변이 일어난 뒤, 이세민이 그를 보자마자 꺼낸 첫마디는 이랬다.
“너는 왜 우리 형제를 이간질하려 했느냐?”
그것은 대단히 신랄하고 기세등등한 문책이었다.
위징은 대답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잡아떼기는 어려웠다. 그의 입장과 한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변명하기도 어려웠다. 변명을 하면 할수록 통하지 않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었다. 더구나 이세민이 말한 것은 근본적으로 거짓 질문이었다. 그들 형제는 본래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이였는데 또 누가 이간질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면 이세민은 왜 그런 질문을 한 것일까?
자신의 죄를 회피하고 그 엄청난 유혈 사태를 슬그머니 넘어가기 위해서였다. 그 질문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현무문의 변은 그의 정당방위였고 이건성과 이원길이 그를 제거하려 한 것은 소인배의 꼬드김에 넘어간 결과였다.
그런데 그 질문을 왜 하필 위징에게 한 것일까?
위징이 입장을 밝히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징은 태자당에서 가장 영민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대답은 이건성 집단의 잔여 세력의 정치적 태도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정국과 운명을 좌우할 만했다. 만약 그가 현무문의 변의 정당성에 의문을 표시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지 몰랐다.
위징의 태도는 어땠을까?
태연하고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先태자께서 일찍이 제 말을 들으셨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31
모두 질겁해서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이세민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는 즉시 태도를 바꿔, 위징에게 자기 곁에서 일해 달라고 부탁했다. 왜냐하면 자기가 바라던 답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 답은 바로 태자와 진왕의 다툼은 옳고 그름이 없었고 도덕과도 무관했으며 오로지 누가 먼저 손을 쓰느냐는 문제만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사건은 성공하면 왕이요, 실패하면 역적이라는 논리에 따라 다들 해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징의 개인적인 태도와 입장도 매우 명확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는 것이었다.
차기 어려웠던 공을 수월하게 차서 돌려보냈다.
의심의 여지없이 위징의 그 대답은 매우 위태로웠다. 만약 이세민이 말 뒤의 숨은 뜻을 읽어내지 못했다면 위징은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태자가 비록 자기를 알아준 사람은 아니어도 어쨌든 잘 대접해준 은혜가 있으므로 그를 위해 죽는 것이 옳은 듯했다.
위징은 운명을 하늘에 맡겼다.
이세민은 공을 받자마자 즉시 반응하고 판단을 내렸다. 위징을 죽여 이건성을 위해 죽게 하느니, 차라리 중책을 맡겨 자기를 위해 죽게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지어 위징의 건의를 받아들여, 태자당의 잔여 세력이 이건성과 이원길의 장례에 참석하는 것까지 허용했다. 이렇게 너그러운 태도로 적을 친구로 바꿈으로써 신속하게 정국을 안정시키고 세력을 확대하여 마침내 정관의 치를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이세민의 정치적 지혜였다.
위징도 자신을 알아주는 이 사람을 위해 온 힘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보기에는 나라의 이익이 개인의 은원보다 위에 있었고 당나라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도 이씨 형제 중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그래서 이세민이 올리브 가지를 내밀었을 때, 답례로 그 새 황제를 도와 정치노선을 확립했다.
그러면 정관의 노선은 핵심이 무엇이었을까?
왕도王道였다.
이것은 그저 케케묵은 유가 윤리 같아 보이지만 당시에는 범상치 않은 의미가 있었다. 왜냐하면 서위, 북주부터 수, 당에 이르기까지 관롱집단은 계속 패도霸道를 바탕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지금 왕도로 갈아탄다는 것은 일정 정도 관중 위주의 정책에서 멀어지는 것을 뜻했다. 아직 토대가 불안했던 당 태종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그는 토론을 하기로 결정했다.
무덕 9년 10월, 그러니까 이세민이 등극한 지 2달 뒤, 정치노선에 관한 토론이 대신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먼저 당 태종이 “바야흐로 지금은 대란이 지나간 직후여서 천하를 다스리기가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물었다.
하지만 위징의 생각은 달랐다.
“난세의 백성은 천하가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오히려 사치와 안일로 오래 편안히 지낸 백성보다 더 다스리기 쉽습니다. 이것은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만 주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주장은 명확했다. 왕도를 행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봉덕이封德彝이라는 인물이 펄쩍 뛰며 반대했다.
“왕도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서 실현하고 싶어도 실현할 수 없습니다. 진시황이 가혹한 형벌과 법률을 펼치고 한 무제가 패도를 섞어 쓴 것은 그들이 무위의 정치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옛날 같지 않고 세상의 풍속이 날로 나빠져 수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위징은 책상물림에 불과하니 탁상공론으로 국정을 그르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위징은 바로 반박을 가했다.
“요와 순은 제도帝道를 행하여 대동大同의 이상을 이뤘고 탕왕과 무왕은 왕도를 행하여 소강小康의 안정을 이뤘습니다. 어떤 정치노선을 실행해야 어떤 사회형태가 나타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습니다. 만약 봉덕이가 말한 대로 날로 나빠졌다면 세상은 진작 귀신의 땅으로 변했을 텐데 어떻게 다스릴지 논의하는 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봉덕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대부분 봉덕이의 편을 들었다.
그러면 위징과 봉덕이 중 누가 옳았을까?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당 태종은 위징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도를 시행했다. 정적들과 화해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 생활을 안정시켜줌으로써 4년 만에 천하의 안정을 이루었다. 4년 뒤 당나라의 영토 안에서는 누구나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했고 집집마다 의식이 풍족했으며 사형을 받는 사람이 일 년에 겨우 29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태종 본인은 북방 민족 사람들의 천 카간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봉덕이는 그것을 볼 수가 없다고 당 태종은 탄식하며 말했다.32
위징은 성공했다. 그러나 봉덕이가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관중 위주의 정책을 저버리는 것은 다소 위험했다. 수 양제가 바로 그 예였다. 그러나 봉덕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수나라에 개황의 치開皇之治가 있었던 것은 수 문제가 어진 정치를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수 양제는 단지 관롱집단과 멀어진 것뿐만이 아니라 잔악무도한 정치를 펼친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그는 관롱집단과 백성들, 양자에게 동시에 버려졌다.
그러나 수 양제의 정책 변화와 남북 대운하의 개통은 옳은 일이었다. 단지 낙양 건설을 조금 천천히 소박하게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확실히 낙양의 지리적 위치는 장안보다 나았다. 진정한 ‘천하의 중심’으로서 물자 보급, 군대 파견, 명령 시행 등 모든 면에서 장안보다 빨랐다. 낙양으로 도읍을 정하는 것이 중앙집권적 대제국을 건설하는 데 더 유리했다.
그래서 정관 4년(630) 6월, 그러니까 당 태종이 천 카간으로 추대된 지 3개월 뒤, 낙양을 건설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제국을 관리하고 비용을 절감하는 데 유리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당 태종은 반대에 부딪쳤다.
반대한 사람은 장현소張玄素였다.
장현소는 당 태종에게 긴 편지를 썼고 반대의 이유는 주로 백성의 혹사와 재정의 낭비였다. 그는 심지어 당 태종에게 상세한 명세서까지 제시했다. 예를 들어 옛날에 수 양제가 낙양을 건설했을 때 기둥 하나를 운반하는 데만 수십만의 인력이 소요되었다고 했다. 또한 지금 당나라의 국력은 수나라 때보다 못하고 수나라 멸망의 교훈이 바로 가까이 있는데, 그런데도 똑같은 전철을 다시 밟는다면 수 양제만도 못한 셈이라고 했다.
이에 태종은 물었다.
“내가 수 양제만도 못하다면 하나라의 걸왕이나 상나라의 주왕에 비견된단 말인가?”
당시 그가 잔뜩 화가 났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장현소는 굽히지 않았다.
“낙양을 건설하신다면 별로 차이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장현소는 이어서 또 말했다.
“당년에 폐하가 낙양을 점령했을 때 태상황께서는 궁전을 파괴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지만 폐하는 떼어낸 기와와 목재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자고 제안하셨지요. 이 일을 백성들은 아직까지 칭송하고 있는데 폐하는 설마 잊으셨습니까?”
당 태종은 마지못해 말했다.
“내 생각이 짧았네.”33
낙양 건설은 그렇게 흐지부지되었지만 당시 당 태종의 결정은 결코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심지어 수 양제가 간 길을 되밟으려고까지 했는데 사실 그 두 사람은 상당히 흡사했다. 모두 황자들 중 둘째로서 기존 황태자를 누르고 제위에 올랐고 관롱집단 이외의 세력에 의지해야 했다. 그렇다. 오랫동안 원정을 다니면서 이세민은 ‘산동山東 호걸들’과의 관계가 무척 긴밀해졌다.
이에 모든 것이 수나라 때와 똑같이 변했다. 태자당은 관중을 위주로 하여 장안을 고수했고 ‘2인자파’는 관동(關東. 함곡관函谷關 동쪽 지역이며 오늘날의 허난성과 산둥성에 해당됨)을 기지로 삼아 낙양을 주목했다. 그래도 다른 것이 있었다면, 장현소의 기개 넘치는 주장 때문에 장안과 낙양의 경쟁은 왕도와 패도의 구별로 변했고 당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중간노선을 택해 관중에 근거를 두고 어진 정치를 펼쳤다.
이에 대해 위징은 찬성한 듯하지만 근거지가 관중이어야 하는지, 관동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더 신경을 쓴 것은 역시 새로운 정치의 수립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그것이야말로 평생을 바쳐 추구해야 할 것이었다.35
그러면 새로운 정치는 또 어떤 것이어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