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림사의 벽에題西林壁/송宋 소식蘇軾
橫看成嶺側成峰 횡으로 보면 준령 옆에서 보면 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 원근과 고저에 따라 제각각 다른 모습
不識廬山真面目 여산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只緣身在此山中 다만 내 몸이 이 산 속에 있기 때문에
횡으로 본다는 말은 산줄기가 뻗어간 것을 T자 형으로 본다는 말이다. 가령 태백산맥을 남북방향에서 보지 않고 동서에서 보게 되면 길게 이어지는 정상의 능선을 마주하는데 이것을 시인은 령(嶺)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이 시에서의 의미는 길게 이어진 산 능선을 정면에서 마주한 것을 말한다. 그 고개의 봉우리를 보려면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하니 이를 ‘옆에서 본다.’라고 한 것이다. 가령 고양시 쪽에서 북한산을 보면 정상부의 준령이 웅장하게 이어져 보이지만 시청 쪽에서 보면 보현봉, 인수봉 등이 하나씩 조망되는 것과 같다.
‘各不同’은 판본에 따라 ‘總不同’으로 된 것도 있고 ‘無一同’으로 된 곳도 있다. 대체로 의미가 같지만 저마다 낫다고 여기는 표현이 있는 모양이다. 峰, 同, 中이 운자인데 峰은 冬자 운목(韻目)이고 同, 中은 東자 운목이다. 이처럼 동일 운목은 아니지만 비슷한 운을 사용하는 시가 많다.
서림사(西林寺)는 여산(廬山)의 서쪽 산록에 동림사(東林寺)와 이웃하여 있다. 필자는 여산에 가 보았지만 이 서림사에는 가지 못하였다. 그 때 도연명 생가, 백록동 서원, 여산 폭포 이런 데도 갔지만, 소동파가 쓴 <이군산방기(李君山房記)>의 산방(山房)을 찾으려고 비를 맞으며 하루 종일 산을 헤매 다니느라 시간을 탕진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여산의 크기를 실감하였다.
여산은 우리나라 지리산처럼 실제로 규모가 매우 크고 다양한 면모를 지닌 산이라 이 여산에 가보면 소동파가 왜 여산에서 이런 시를 쓰게 되었는지 이해가 된다. 이 시는 왕력(王力)의 《고대한어(古代漢語)》 에도 실려 있는 중국인의 명시인데, 우리나라에도 ‘여산진면목’이라는 구절과 함께 퇴계, 허균 등 많은 사람들의 글에 인용되고 있다.
이 시는 청나라 왕문고(王文誥, 1764~?) 집주 《소식시집(蘇軾詩集)》 고안(誥按 왕문고 자신의 의견)과 공범례(孔凡禮, 1923~2010)의 《소식연보(蘇軾年譜)》 등을 참조하면, 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1084년(원풍7년) 49세에 4월 24일부터 여산을 10일 정도 여행하고 여러 편의 시문을 지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지은 시이다.
이 시는 시각과 인식의 제약으로 사물의 실체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깨달음을 준다. 또 당사자는 오히려 잘 모르고 방관자가 더 잘 알 수 있다는 의미도 전해 준다. 고정된 인식으로 사고의 지평이 제약될 때 교훈으로 삼을만하다. 사물의 내부에 갇혀 그 진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남북이 나뉘고 대결하는 지리적, 정치적 현실이 그대로 사람들의 인식과 사고도 구속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소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북한을 왜곡하고 적대시하며 심지어는 북한에 쌀을 지원해 주거나 경제 협력을 하는 것조차 ‘퍼주기’ ‘안보 불안’ 등으로 선동하여 우리 사회에 자꾸만 불안과 대결 의식을 전염시키며 이익을 꾀하는 반민족 무리들은 이 시의 죄인이라 하겠다.
이 시의 안목과 교훈으로 보면, 6.25도 외세에 휘둘려 증오와 적대감을 부추기는 날이 아니라 불행한 민족사를 반성하며 화해 협력을 모색하고 희생자를 위로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이 시는 매우 명료하면서도 인생의 어떤 화두를 던지고 있는 데다 소동파라는 대문호와 아름다운 여산이 결합되어 있어 앞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은 물론이요, 점점 문화 상식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높다.
365일 한시 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