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의 상징적 의미 2-손오공

2 손오공

『서유기』의 등장인물들 가운데서는 다른 누구보다 손오공의 존재가 특별하면서 두드러진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학자들은 원숭이의 모습을 닮은 회수淮水의 신 무지기巫枝祁의 모습과 하늘의 신[帝]과 신통력을 겨룬 형천刑天의 이야기 등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자생적 인물 형상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다가 1920년대부터는 인도의 옛 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na(羅摩衍那)」에 등장하는 하누만Hanumān(哈奴曼)의 형상이 불교와 함께 중국에 전래되면서 중국화된 형태의 손오공을 만들었다는 새로운 설명이 더 인정받는 추세이다. 그렇다고 이른바 ‘자생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특히 오랜 옛날부터 도교의 수련을 통해 정령精靈이 된 원숭이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논란의 빌미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사실 『서유기』의 문학적 이해라는 측면을 놓고 보면, 굳이 손오공 형상의 연원을 따지는 일은 그다지 필수불가결한 일이 아니다. 그 원류가 무엇이건 간에 이미 중국화된 손오공은 원래의 모습과는 거의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유기』를 좀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한 안내를 목적으로 하는 이 글에서는 작품 자체에서 손오공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그리고 왜 그렇게 묘사했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설명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먼저, 『서유기』의 화자(작자)가 설명하는 손오공의 탄생 과정을 검토해보자.

(화과산의) 이 바위는 하늘과 땅이 열린 이래로 항상 하늘의 참된 기운과 땅의 빼어난 기운, 그리고 해와 달의 정화를 받아들였지요. 그런데 오랫동안 그런 것들에 감응하다 보니 마침내 신령하게 통하는 마음이 생겨나서, 안으로 신선의 태胎를 키우게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돌이 쪼개지면서 돌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나 모양새가 둥근 공과 비슷했어요. 그 돌알은 바람에 노출되어 깎이다가 모양새가 돌 원숭이처럼 변했지요.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와 촉감을 느끼는 오관五官이 다 갖춰지고, 두 팔과 두 다리가 모두 완전해지자, 이 녀석은 기고 달리는 법을 배웠고, 사방을 향해 절을 했지요. 녀석의 눈에서는 두 줄기 금빛이 발산되어 하늘나라의 관청에까지 뚫고 올라가…(제1회)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출생의 과정에서는 손오공이 윤회의 수레바퀴와는 상관없이 대자연의 정기가 감응되어 형성된 자생적이고 순수한 생명체라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그에 비해 나중에 그와 함께 서역으로 가는 삼장법사를 보호하게 된 저팔계와 사오정은 각기 하늘나라의 신으로서 천봉원수天蓬元帥와 권렴대장捲簾大將라는 직위에 있었다는 점만 밝혀져 있을 뿐, 그 최초의 출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 더욱이 외모가 원숭이를 닮았다는 점은 손오공의 자유롭고 장난기 많은 본성을 암시한다.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가지에 매달려
꽃을 따고 과일을 찾는다.
열매를 던지는 놈,
돌팔매질을 하는 놈,
모래 위를 뛰는 놈,
탑을 쌓는 놈.
잠자리를 쫓는 놈,
벌레를 때려잡는 놈,
하늘 보고 절하는 놈,
보살에게 절을 하는 놈.
칡이나 등나무 넝쿨을 잡아당기는 놈,
풀로 머리띠를 짜는 놈.
이를 잡는 놈들은 깨물고 손톱으로 누르기도 하고
털을 고르거나 손톱을 깎는 놈도 있다.
밀치고,
비비고,
떠밀고,
짓누르고,
잡아당기고 야이다.
푸른 솔밭 아래서 제 멋대로 장난치다가
푸른 물 흐르는 계곡 옆에서 내키는 대로 씻고 목욕한다.(제1회)

출처 Baidu

이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원시의 본능에 따라 삶을 즐기던 그는 왕성한 호기심을 뒷받침하는 용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의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숭이 왕으로서 누리는 권력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능력과 불로장생의 열망을 품게 된다. 그리고 용감하게 미지의 바다 너머로 모험을 떠남으로써 전형적인 신화적 영웅의 길을 걷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의 인간들에게 바다는 대개 인간세상의 지리적 경계이자 죽음의 공포로 넘실거리는 곳으로 여겨졌으니, 그 모험의 무게는 자아의 존재에 대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큰 시험이라 하겠다. 또한 “지극한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라는 유명한 『노자老子』(제8장)의 정언定言을 생각하면 바다는 지극한 선과 지혜가 모이는 궁극의 장소이니, 바다로 향한 모험은 곧 지혜를 얻기 위한 지난한 고행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수보리조사와의 만남은 그의 이러한 용기와 포기를 모르는 강인한 정신으로 갖은 고난을 이겨낸, 모험에 대한 정당한 대가처럼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수보리조사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얻은 것이 바로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름이란 흔히 존재에 대한 인식의 통로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니, 이 사건을 통해 손오공은 본능적 존재에서 이성적 존재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원리[道]와 삶의 구체적 양상[德]을 설파한 상징적 철학서인 『노자』의 제1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길이란 임시방편으로 다닐 수 있을 뿐이지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란 임시방편으로 부를 수 있을 뿐이지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름이 없는 상태는 세상을 만들 준비를 하는 처녀에 해당하고
이름이 있는 상태는 만물을 낳아주고 길러주는 어머니에 해당한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꽃도 꽃이 아니듯이, 세계란 자아가 인식하기 전까지는 실존한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름을 갖게 됨으로써 즉, 세계와 나를 인식함으로써 자아는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고, 나아가 세계 안에서 온전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름과 실존적 인식 사이의 관계는 『서유기』 제34회에서 통렬하게 풍자된다. 이 이야기에서 금각대왕金角大王과 은각대왕은 손오공과 공오손, 오공손을 전혀 다른 인물로 인식한다. 하지만 부르는 이름에 대답하는 모든 존재를 잡아 가두는 효능을 지닌 호로는 공오손이라는 가짜 이름에 대답하는 손오공도 빨아들여버린다. 결국 이 재미있는 이야기는 인간의 주관적 이성과 객관적(혹은 기계적) 진실 사이의 차이를 교묘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이름과 인간의 생명 사이에 신비하고 주술적인 끈이 묶여있다고 생각했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 가운데에는 귀신이나 못된 요괴가 이름을 이용하여 사람을 해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남아있다. 예를 들어서 『태평광기』제318권에는 『광금오행기廣古今五行記』라는 책에서 뽑았다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본래부터 별로 길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거기에서도 번거로운 부분은 몇 줄 삭제하고 나머지 부분도 원래 내용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당히 다듬어 인용해보겠다.

진晉 나라 원제元帝 말년에 초군譙郡 땅에 주자문周子文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어릴 때에는 귀여운 생쥐라는 뜻으로 ‘아서阿鼠’라고 불렸다.

한번은 그가 산에 들어가서 사냥을 하다가 동료들과 헤어져서 길을 잃고 헤매던 차에, 문득 산봉우리 사이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키가 다섯 척尺이나 되었고, 손에는 활과 화살을 들고 있었다. 화살촉은 넓이가 두 척 남짓이나 되어 보였고 색깔은 눈처럼 흰색이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아서야!”하고 부르는 바람에, 주자문은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 사람이 즉시 시위를 당겨 겨누었고, 주자문이 땅에 쓰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 사람은 어디론가 다시 사라져버렸다.

같이 사냥을 나섰던 동료들이 온 산을 뒤진 끝에 주자문을 찾았는데, 그는 말을 전혀 못하는 상태였다. 동료들은 그를 들것에 실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며칠 후에 죽고 말았다.

위 이야기에서 보듯이, 옛날 중국인들에게 이름이란 그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목숨 자체와 연관된 것이다. 특히 재앙을 몰고 오는 요괴에게 이름이 알려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어린아이에게 특별히 본명과는 다른 아명兒名 또는 아호兒號를 지어주어 재앙을 피하도록 배려했고, 성인이 된 후에도 군주와 부모, 스승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남으로 하여금 자신의 본명을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다른 복잡한 이유도 있겠지만, 중국인들이 그처럼 복잡한 자호字號 즉 별명을 갖게 된 데에는 이 주술적인 끈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이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중대한 ‘이름 갖기’를 『서유기』의 화자(작자)는 다분히 해학적으로 묘사한다. 옥황상제나 석가여래, 태상노군 등 널리 알려진 최고의 초월자들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듯하면서도 그들과 어울리지 않고 은거하여 조용히 제자를 양성하는 이 스승은 손오공이 원숭이[猢猻]를 닮았다는 데에 착안하여 그의 성을 ‘손孫’으로 지어준다(제1회). 이렇게 성姓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곧 그가 비로소 성性 즉 수양을 통해 깨달아야 할 내면의 자질을 지닌 몸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 장난스러운 성은 그 글자를 쪼개서 풀어보면 ‘아이[子]’와 ‘계系’—중국어로 읽으면 ‘세細’와 발음이 통하는—로 이루어져 있으니, 곧 ‘영세嬰細’—작은 어린애—라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도가에서 ‘영아嬰兒’가 ‘내단內丹’을 상징한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제 그는 본격적으로 초월자를 향한 자신의 길을 걸어가며 수련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행복한 결말을 제시해버린다면, 그는 능숙한 이야기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화자(작자)는 여기서 새로운 격동의 실마리를 끌어낸다. 그것은 첫째, 손오공의 성인 ‘손’이 그와 발음이 유사하면서도 의미상 ‘모자람’을 가리키는 ‘손遜’과 통한다는 것이다. 수행의 첫 단계부터 암시된 이 안배 때문에 손오공은 결국 일흔두 가지—8×9=72이니, 결국 9×9=81에서 한 단계가 모자란—의 변신술과 근두운을 타는 능력을 익힌 단계에서 수행을 중단하고 추방당한다. 물론 이런 종류의 추방은 대개 회귀가 약속되어 있거나, 본질적으로 같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새로운 수행의 시작을 의미하기 마련이다.

하누만 출처 简书

이야기꾼의 두 번째 단서는 하필 그의 이름을 ‘오공悟空’이라고 지어준 것이다. 글자 그대로 이것은 불교에서 세계의 모든 현상[色相]을 관통하는 본질적 속성인 ‘공空’을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교묘하게도 그 이름 앞에 얹힌 성이 ‘모자람’을 뜻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서유기』의 화자(작자)는 특히 손오공으로 하여금 세속적 의미의 권력이 허무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 그리고 이런 설교 투의 주제에 청자(독자)들이 식상하여 물리지 않게 해주기 위해, 한 바탕 신나는 활극을 준비한다. 즉,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해 능력을 획득한 경험으로 인해 손오공이 기성 세계의 권위를 뒤흔드는 파격적인 생각을 해내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리하여 손오공은 불경스럽게도 최고 지위의 초월자인 옥황상제에게, “황제는 돌아가며 하는 법, 내년엔 우리 집 차례(皇帝輪流做, 明年到我家)”(제7회)라고 당돌한 도전장을 던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손오공에게 이름을 부여한 수보리조사가 전통적으로 알려진 초월자—이들은 모두 옥황상제의 명망과 권위 아래 각기 그럴 듯한 직위를 갖고 있는데—가 아닌 은둔자라는 데에서부터 암시되었던 결과이다. 『서유기』의 화자(작자)는 현실에서 제도적으로 공인되고 권력화된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는 은밀한 비판 의식을 은둔하면서 세상의 모든 도문道門을 꿰뚫고 있는 수보리조사라는 존재를 통해 넌지시 던져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이념이 없었던 명나라의 시대적 환경에서 손오공의 반란은 사실상 처음부터 실패가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제도적인 권력을 획득한 지식 역시 쉽게 깨뜨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더욱이 초월자 혹은 신들의 능력이 그가 쌓은 수행과 공덕의 양에 비례한다는 힘의 논리가 여전히 유효한 상황에서 사실상 ‘어린’ 원숭이 왕의 도발은 처음부터 무모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도발로 인해 하늘나라에서 안일하게 명예와 평안을 누리던 많은 신선 벼슬아치들의 능력 또한 한계가 있는 것임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것은 분명 관료와 사대부들의 명분 놀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봉건시대 백성들에게 통쾌한 대리만족을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손오공의 도발을 최종적으로 잠재운 존재가 옥황상제나 그의 궁궐에 있는 벼슬아치가 아니라 석가모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석가모니와 옥황상제 사이에는 군신君臣 관계와 같은 엄격한 위계질서가 정해진 것이 아니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석가모니의 힘을 빌려서야 손오공을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이 옥황상제로서는 체면이 깎이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서유기』의 화자(작자)는 최고 초월자들 사이의 이러한 미묘한 입장을 그다지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당시의 민간 종교에서도 그런 서열 관계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화자(작자)가 이야기의 뒷부분(제13~99회)에서 손오공을 서역으로 가는 삼장법사의 보호자 겸 안내자로 등장시키기 위한 안배를 미리 해두려는 의도가 강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극락 또는 유토피아를 향해 모험을 떠나는 주인공의 안내자로 등장하는 동물의 형상은 동·서양의 많은 이야기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같은 동물의 형상일지라도 손오공은 대단히 특별한 존재인데, 그것은 비단 그가 도를 수행하여 여러 면에서 인간화한 존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선 그는 삼장법사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영생불사의 능력을 이룬 존재이며, 석가모니를 비롯한 최고 반열의 몇몇 초월자들에게만 한 수 양보할 정도로 상당한 경지에 오른 존재이다. 또한 그는 단순히 삼장법사—평범한 인간의 몸이기 때문에 구름을 탈 수 없는—를 서천의 석가모니에게로 데려다주는 안내자가 아니라, 그 자신도 더 높은 초월자의 경지로 오르기 위해 수행하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서역을 향한 모험—도의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인도자 가우데 하나로서 손오공은 그 자신이 개별적으로 도를 수행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수행자의 마음을 이루는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그리고 백마는 모두 서역으로 가는 모험에서 개별적인 역할을 갖고 있는 배역들이기도 하고, 아울러 그들은 모든 어느 한 수행자의 마음에 담긴 중요한 특성들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서유기』의 화자(작자)는 종종 도를 향한 수련은 음양과 오행五行을 조화롭게 유지하여 단丹을 완성해가는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손오공은 ‘금金’—이 때문에 화자(작자)는 손오공을 ‘금공金公’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사실 손오공은 때로 (미약하기는 하지만) 화火를 대표하기도 한다—의 기운을 대표하는 존재로서 ‘목木’의 기운을 대표하는 저팔계—목모木母—나 ‘토土’의 기운을 대표하는 사오정 및 삼장법사 등과 끝없이 상생상극相生相剋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화자(작자)는 손오공을 지칭할 때 자주 ‘마음속의 원숭이[心猿]’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가령 제30회의 제목은 “사마침정법邪魔侵正法, 의마억심원意馬憶心猿”이라고 되어 있는데, 『서유기』의 줄거리를 토대로 이것을 풀이하자면 “사악한 요마가 올바른 불법을 침범하고, 백마는 원숭이를 그리워하다”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결국 독립적 존재로 묘사된 손오공이나 저팔계 등이 좀 더 심층적 층위에서는 ‘마음의 주인[心主]’인 삼장법사의 내면세계 가운데 일부분을 상징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앞서 삼장법사에 대한 설명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사실 이 작품의 인물 설정과 묘사는 대단히 교묘하게 복합적인 양식으로 설정되어 있다. 『서유기』의 이런 인물 설정 기법은 제84회에서 화자(작자)가 직접 제시한 ‘이성동거異姓同居’라는 한 마디로 대표될 수 있다. 여기서 ‘성姓’은 ‘성性’과 통하는 중의적 표현이기 때문에, 이 말은 곧 성씨姓氏가 다른 여러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성격(성품)이 한 사람의 몸에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심지어 남녀로 나뉜 주인공들조차도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의 마음에 내재하는 음양陰陽—대립적이면서도 하나의 조화로운 개체를 위해서는 서로 필수불가결한 어떤 것—을 의미하고 한다.

특히 ‘가짜 손오공’—석가여래에 의해 밝혀진 그의 정체는 ‘여섯 귀의 미후獼猴’였다—을 등장시킨 제56~58회는 이러한 상징을 좀 더 명확히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혹시 어렵다면 어렵다고도 할 수 있는 이런 상징 장치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청자(독자)를 위해 친절하게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은 시로 요약해주기도 했다.

도중에 헤어져 오행이 어지러워졌으나
요괴를 항복시키고 다시 모여 깨달음의 몸[元明]으로 합쳤구나.
신神은 되돌아오고 마음은 버렸으니 수행[禪]이 비로소 안정되고
육식六識이 제거되니 단丹의 수련이 저절로 이루어지는구나.(제58회)
中道分離亂五行 降妖聚會合元明
神歸心舍禪方定 六識祛降丹自成

손오공 출처 新浪网

위 시에서 “신은 되돌아오고 마음은 버렸다”고 했을 때, ‘신’은 수행을 추진해나가기 위한 힘—신통력—을 지닌 손오공을 의미하고, ‘마음’은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지닌 가짜 손오공을 의미한다. 특히 삼장법사를 때려눕히고 봇짐을 빼앗아 수렴동으로 도망쳐 요괴들의 왕으로 군림하며, 자신이 직접 서역으로 가 경전을 얻어서 당나라로 돌아가 영원히 빛날 업적을 쌓고 싶어 하는 가짜 손오공은 바로 손오공 자신의 심리적 갈등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갈등은 일차적으로 요괴를 없애버림으로써 세상을 깨끗이 청소하려는 그의 생각과 생명을 아끼는 삼장법사의 덕성[好生之德]과 끊임없는 충돌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런 충돌은 곧 삼장법사에 대한 손오공의 불만을 증폭시킨다. 변덕스럽고 무능력한 데다 자기를 보호해주는 손오공의 은혜를 망각하고 걸핏하면 ‘못된 원숭이 놈’이라고 멸시하며 내치는 삼장법사는 자존심 강한 손오공의 분노를 유발한다. 그러므로 삼장법사에게 여의봉을 휘두르고 봇짐을 빼앗아가 차라리 자신이 경전을 얻어 전하여 명예를 이루겠고 생각하는 가짜 손오공은 사실 머리 테를 조이는 주문에 괴로워하며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고 진실한 충성을 맹세하며 용서를 구하는 진짜 손오공의 마음 저편에 숨겨진 욕망과 충동을 나타낸다. 결국 이 이야기는 손오공이 자기 마음의 그늘 속에 자리 잡은 또 하나의 자기를 부정하고 털어버리는 과정에 대한 상징인 셈이다. 그리고 더할 수 없이 자비로운 석가여래 앞에서 감히 ‘여섯 귀의 미후’를 때려죽여 완전히 씨를 말려버림으로써 그는 철저한 마음의 정화淨化를 결연히 이뤄낸다.

사실 이와 유사한 상징은 이미 손오공이 양계산兩界山에서 삼장법사의 제자로 입문하는 순간에 이미 제시되었던 것이다(제14회). 양계산이란 결국 두 개의 경계를 나누는 산이라는 뜻이니,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본능적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던 과거의 손오공과 참된 진리를 얻기 위해 절제하고 수양하는 이후의 손오공을 구분하는 경계점이 된다. 여기서 손오공이 수보리조사가 아닌 삼장법사를 새로운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가 일종의 야만적 세계에서 벗어나 고차원적인 질서의 체제 속으로 편입될 수 있는 단초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손오공이 ‘여섯 도적[六賊]’을 때려죽인 것은 그가 ‘육근六根’ 즉 모든 죄업의 근원이 되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마음[意]의 욕망을 버림으로써 온갖 번뇌의 뿌리인 ‘육진六塵’ 즉 색色, 소리[聲], 향기[香], 맛[味], 접촉[觸], 염려念慮를 없앴다는 것을 상징한다. 다만 그런 정화가 한 순간의 발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는 머리 테[緊箍兒]라는 일종의 제동 장치가 필요했다.

그런데 전반부 여덟 회에 묘사된 손오공과 제13회 이후 삼장법사의 제자로 묘사된 손오공의 성격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와 모순이 발견되는 점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다른 설명들이 있다. 어떤 이는 손오공이 석가여래에 의해 오행산五行山 아래에 갇힘으로써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나서 삼장법사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성격 변화는 당연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양자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반면, 또 어떤 이는 오승은으로 대표되는 편찬자가 애초에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이야기를 무리하게 짜 맞추느라 연결의 틈새가 생겼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삼장법사를 호위하는 시종으로서 원숭이 형상 즉 손오공의 기원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명이 있는데, 주로 중국 자체의 이야기 전통에서 발전된 형상이라는 주장과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 이야기에서 비롯된 형상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들은 대개 문학 작품을 지나치게 ‘학술적’으로 재단하려 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 작품이 만들어지게 되는 과정과 사회적, 문학적 의의를 따지는 일이 중요하겠지만,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그런 논의는 오히려 작품을 편안하게 감상하는 것을 방해하는 벽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이른바 ‘학술적’임을 표방하는 전문 연구자들의 논의들은 아직까지 대부분 서양 소설의 이론을 토대로 텍스트 분석을 진행하거나 원형原型 분석 따위에 매달리고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서유기』를 비롯한 중국의 모든 고전 소설들은 그저 엉성하고 미숙한 골동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중국 고전 소설의 고유한 창작 원리와 수용 양상을 올바로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실은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지만)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자유로운 해석과 ‘전혀 학술적이지 않은’ 논의들도 허용되어야 마땅하다.

어쨌든,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서유기』의 손오공은 그 자신이 초월자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존재이자, 평범한 인간으로 윤회하여 다시 태어난 삼장법사를 서역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기도 하고, 아울러 광범한 의미에서 수행자의 ‘마음’을 구성하는 한 부분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유기』 속에서 그의 이런 다중적多重的 역할은 개별적으로 떨어져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대개 모험이라는 외피에 덮인 채 동시에 나타난다. 청자(독자)들로서는 피곤한 일이지만, 이런 복잡한 함축을 자연스럽게 구현하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에, 『서유기』는 단순한 모험담을 넘어선 ‘깊이’를 가진 고전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