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적 시공간時空間의 성격
『서유기』의 제1회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실은 중국을 가리키지만—의 구체적인 형성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반고盤古가 이만 천육백 년에 걸쳐 하늘과 땅을 열고, 전설적인 성왕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나타나 윤리와 기강을 정하자, 세상은 드디어 네 개의 큰 대륙[洲]으로 나뉘었으니, 바로 동쪽의 동승신주東勝神洲와 서쪽의 서우하주西牛賀洲,남쪽의 남섬부주南贍部洲,북쪽의 북구로주北俱蘆洲가 그것이다.
그런데 독자들도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이 대륙들은 지리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당나라 왕조가 존재하는 남섬부주가 인간들의 현실 세계를 비유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사실 ‘바다’로 상징되는 아득하고 지난한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차원을 달리하는 일종의 관념적 세계에 대한 상징인 것이다. 실제로 작품에서 손오공이 찾아가 사부로 모신 수보리조사須菩提祖師가 사는 서우하주의 영대방촌산靈臺方寸山 사월삼성동斜月三星洞은 그 지명들에 담긴 상징을 통해 이미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어떤 곳이 아님이 암시되어 있다. ‘영대’는 도가에서 사람의 마음을 비유하는 표현이며, ‘영부靈府’라고도 한다. ‘방촌’ 역시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또한 ‘사월’ 즉 비스듬히 기운 달의 갈고리 모양과 ‘삼성三星’ 즉 ‘세 개의 점點’이 합쳐지면 ‘심心’ 즉, 마음을 의미하는 글자 모양을 나타내게 된다. 이것은 결국 신선의 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대륙을 둘러싸고 바다가 있고, 그 바다의 끝에는 바닥 모를 낭떠러지 혹은 미지의 시공간이 있다는 생각은 인류의 고대 문명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상상이다. 특히 중세 유럽의 기독교에서는 대륙을 둘러싼 바다의 바깥쪽 끝에 있는 낭떠러지 아래에 저승이나 지옥이 있다고 상상했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물리적 세계와 관념적 세계가 뒤섞이기 시작한다. 특히 중국인들에게 이런 식으로 차원이 중첩된 시공간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오랜 전통을 가진 것이어서, 이미 한漢나라 무렵부터 상당히 구체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대 중국에서는 그런 뒤섞임이 더 현저하고 복잡한 양태로, 그리고 대단히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면서 나름대로 체계를 갖춰갔다.
예를 들어서 오늘날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부근에서 발굴된, 흔히 ‘마왕퇴馬王堆’라고 알려진 한나라 때 어느 제후 부인의 무덤에서 관을 덮은 T자형의 비단 그림에는 저승과 이승, 하늘나라라는 세 개의 시공간과 그곳을 지키는 존재, 혹은 각 시공간 사이를 오가는 존재들에 대한 상징적인 그림들이 매우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산해경』에 나타난 지리적 묘사는 그런 세계관의 기본 양식을 대단히 잘 보여주고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산해경』과 『장자莊子』를 비롯한 고대의 문헌에 나타난 세계의 모습을 그림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위 그림에서 중원은 중국이기도 하고 인간 세계이기도 하다. 옛 중국인들은 그들의 세계를 둘러싸고 크고 험한 산맥과 큰 바다가 있으며, 다시 너머에 큰 산맥과 끝을 알 수 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육체적 능력과 과학 기술의 한계로 쉽게 넘어갈 수 없는 경계에 해당하는 이 산맥과 바다는 달리 표현하자면 세계의 경계 혹은 차원의 경계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경계들은 완전히 닫힌 체계가 아니며, 특히 바다와 산은 어느 부분에서는 경계가 뒤섞여 있다. 산에는 큰 호수가 있고, 바다에는 큰 섬이 있는 것이다. 또 그 바다나 호수 안의 어딘가에는 항상 큰 섬이 있다. 어쨌거나 이것들은 인간 세계를 둘러싼 이중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평면 위에는 겹겹이 층을 이룬 하늘이 뒤덮여 있다. 구체적인 유형은 조금 다르지만 이런 상상은 바이킹 족이 생각했던 세계와 상당 부분 유사하다. 바이킹 족은 인간 세계를 세계의 한가운데 놓인 나라 즉 ‘미드가르드Midgard’라고 했으며, 그 안에는 신들의 고향인 ‘오스가르드Åsgard’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미드가르드의 앞에 놓인 바깥 세계인 ‘우트가르드Utgard’에는 툭하면 비열한 속임수로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하는 위험한 요괴들 즉 ‘혼돈의 힘’이 존재했다.
물론 옛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세계의 경계에 있는 산맥과 바다, 섬에도 인간과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지적인 존재들이 있다. 『산해경』에서는 이처럼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승 세계를 제외한 다른 시공간을 사는 존재들에 대해 각종 동물과 인간의 신체 부위를 조합한 기괴한 모습으로 설명했는데, 그것은 사실 외모 자체보다 그 존재들의 특별한 능력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훗날 도교나 불교 같은 종교들이 구체적 모양새를 갖추면서 마침내 이들 산과 바다, 섬은 각종 초월적 존재들의 거처로 성격이 변모하게 되며, 그 안에 사는 초월자들은 각종 신神과 귀신[鬼], 신선[仙], 요괴 등으로 분화된다. 다만 이들은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위협하는 우트가르드의 혼돈의 힘들과는 달리 신비한 힘에 의해 유기적으로 얽힌 거대한 시공간의 틀 안에서 인간과 공존할 것을 지향했다. 상생상극相生相剋하는 오행五行의 기운처럼 그들은 기꺼이 서로 존재의 이유가 되어주는 세 세계—지상(인간 세계), 지하(저승 세계), 천상 혹은 천외天外(신선의 세계)—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 옛 중국인들의 세계관에 대해 더 자세히 얘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옆길로 새는 일일 터이니, 다른 기회를 약속할 수밖에 없겠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특별한 상상력의 산물처럼 보이는 『서유기』의 각종 요괴들의 모습은 적어도 전통시기 중국인들에게는 적어도 문학 작품의 등장인물을 만들어내는 데에서는 대단히 친숙한 방법이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16~17세기에는 『서유기』의 성공을 계기로 이런 식의 등장인물을 내세운 소설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이른바 ‘신마神魔’ 또는 ‘신괴神怪’라는 말로 아우를 수 있는 특별한 하위 장르를 형성하기도 했다. 가령 『봉신연의封神演義』와 같은 ‘신마소설’은 줄거리만 조금 세련되게 다듬는다면 현대의 판타지 소설들보다 오히려 더 기발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서유기』에 묘사된 이들 관념의 세계들도 결코 정적으로 고립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삼장법사 일행이 경전을 가지러 가는 모험을 감행하는 현실적 무대이자 인간들 및 각종 요괴들이 생활하는 시공간인 지상과 옥황상제 및 여러 신들의 거처가 있는 하늘나라, 그리고 죽은 인간의 영혼[鬼]들이 죄업을 씻거나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윤회전생輪廻轉生을 준비하는 시공간인 저승—죽음을 상징하는 음산陰山 뒤편의 세계 및 용궁龍宮—은 다양한 방식으로 연계되어 있다. 비록 ‘구름과 안개’를 타는 능력을 갖춘 이들만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특별한 경계에 의해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세 개의 시공간은 끊임없이 상호 작용을 주고받음으로써 동전의 앞뒷면처럼 조화롭고 단단한 유기체로 결합되어 있다. 삼장법사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서천이 있는 남섬부주 대륙 내부의 지리 역시 이런 유기체적 시공간의 한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