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규 마을 남쪽 복사꽃下邽莊南桃花/ [唐] 백거이
촌 남쪽에 끝도 없이
복사꽃 피어
정 많은 나만이
혼자서 왔네
저녁 바람에 붉은 꽃잎
땅 가득 해도
누굴 위해 피는지
아무도 몰라
村南無限桃花發, 唯我多情獨自來. 日暮風吹紅滿地, 無人解惜爲誰開.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백거이는 중당 문단을 장식한 대문호다. 시마(詩魔) 또는 시왕(詩王)이라 불릴 정도였으니 당시에 그의 명성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는 특히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시를 쉽게 썼는데, 이는 그의 신악부(新樂府)뿐 아니라 모든 시에서 드러나는 경향이다. 이 때문에 북송 문호 소식(蘇軾)도 “원진은 경박하고 백거이는 속되다(元輕白俗)”라고 평했다. 하지만 소식도 만년으로 갈수록 백거이 시와 행적에 심취하여 “출처는 그럭저럭 낙천과 유사해도, 어찌 감히 쇠약함을 전현에 비하리요(出處依稀似樂天, 敢將衰朽較前賢)”라고 하며 백거이를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이는 소식이 항주 서호에 백거이의 백제(白堤)를 본받아 자신의 소제(蘇堤)를 건설한 것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이 시에도 백거이 시의 속된 경향이 도저하게 노출되어 있다. 하규(下邽: 백거이의 증조부 때부터 거주한 본적지) 마을 남쪽에 흐드러진 복사꽃을 구경하러 다정한 내가 혼자서 왔다는 표현은 고아한 선비가 언급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속되다. 붉은 복사꽃잎이 가득 떨어진 곳에서 이 꽃이 누굴 위해 피는지 이해하고 애석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표현한 구절에도 도화기(桃花氣)가 짙게 배어 있다. 아무도 없다는 표현은 자신만이 복사꽃의 깊은 정을 이해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붉은 등불 찬란한 기루(妓樓)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수사다. 앞에서 읽은 이백의 「산중 문답」이나 사공도의 「고향 살구꽃」과 비교해보시라.
그러나 이 점이 바로 백거이의 백거이다움이다. 그는 신악부 시로 백성의 실상과 고통을 매우 쉽고도 절실하게 묘사한 것과 같이 한적시(閑寂詩)를 쓸 때도 표현의 아속(雅俗)을 가리지 않았다. 아속(雅俗) 겸비로 아속을 초월하여 시왕(詩王)이란 명성을 얻은 이가 바로 백거이다.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사진출처: 詮撮滙)
한시, 계절의 노래 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