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루에서 광릉으로 가는 맹호연을 전송하고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당唐 이백李白
故人西辭黃鶴樓 오랜 벗님 내가 있는 황학루를 작별하고
煙花三月下揚州 봄도 무르익은 삼월에 양주로 내려가네
孤帆遠影碧空盡 멀리 떠가는 배 푸른 허공으로 사라지고
唯見長江天際流 장강 물결만이 저편 하늘가에 흘러갈 뿐
이 시 때문에 예전에 황학루를 보기 위해 무한을 찾았고 황학루에도 올라가 이 시를 읊조리며 주변의 풍광을 감상해 본 적이 있다. 이 시를 깊이 있게는 몰랐지만 무언가 알지 못할 감정이 풍부하게 서려 있는 게 좋았다. 이 시는 728년 이백이 28세 때에 쓴 작품이다.
맹호연(689~740)은 이백(701~762)보다 12살이 많아 당시 40세였다. 요즘 한국인의 개념으로는 ‘맹호연 선생’을 전송한다고 말해야 하겠지만 당시로서는 서로 벗으로 오래 사귄 모양이다. 친구로 사귄다 해도 나이가 많은 형님에 대한 마음은 이 시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양산박 호걸들도 나이가 많은 사람을 ‘꺼거(哥哥)’ ‘따꺼(大哥)’라고 부르며 손아래 사람은 ‘씨웅띠(兄弟)’라고 부르지 않는가.
양주는 수나라 때 생긴 이름이고 그 전에는 이 곳을 광릉이라 불렀다. 지명이란 한 번 생겨나면 잘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고호(古號)로 남아 생명력을 유지한다. 특히 수사를 중시하는 문헌에는 고호의 사용이 당대 지명보다 더 빈번하게 쓰인다. 이 시도 보면 당시 광릉으로 불리는데 운자 때문에 일부러 양주라는 말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전체가 경치를 묘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글자를 뜯어보면 모두 감정이 묻어 있다. 첫구의 ‘서사(西辭)’라는 말도 맹호연이 단순히 동쪽으로 가기 때문에 이렇게 썼다기보다는 이백이 강가에서 읍을 하며 전송하고 있고 맹호연이 배에서 손을 흔들며 그만 가라고 손짓하는 장면이 상상된다. ‘연화삼월(煙花三月)’이란 말도 단순히 안개 속에 꽃이 피어있다는 말 보다는 봄이 무르익어 모든 게 좋은 이러한 때에 오래 사귄 마음에 맞는 형제를 이별하는 마음이 담긴 말이다. ‘원영벽공(遠影碧空)’이 ‘원영벽산(遠映碧山)’으로 된 판본도 있는데, 이 경우는 ‘떠가는 배의 그림자가 산에 비친 것’을 말한다. 처음에 이렇게 썼을 가능성이 많다.
이 시의 제목을 <~ 전송하며>로 하지 않고 <~ 전송하고>로 번역한 것은 이 시가 이별할 때 지어서 상대에게 준 것이 아니라 이별을 하고 나서 너무도 가슴에 감정이 많이 남아 시로 쓴 것임을 보인 것이다.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강변에 서 있는 이백, 그 곳에 장강의 푸른 물결만이 아득히 출렁거리는 것을 바라보는 허전한 마음. 마음으로 사귄 사람을 떠나보내는 순수한 마음이 한 없이 느껴지는 시이다. 두 사람 모두 아직 세상의 쓴 맛을 보지 않아 순수하게 만나고 정을 나누다 서로 이별하니, 풍경을 말한 글자마다 그 감정이 절로 깃들어 있는 듯하다. 시의 여미(餘味)가 당시 이백의 마음만큼이나 무궁하다.
《당시배항방》에는 40위에 랭크되어 있다.
365일 한시 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