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계절의 노래-[唐] 유언사劉言史 왕우군 묵지右軍墨池

왕우군 묵지右軍墨池/ [唐] 유언사劉言史

영가 시절 인간만사
모두 공空으로 귀착됐고

일소가 살던 옛집
덩굴 속에 남아 있네

지금도 못물이
남은 먹색 품고 있어

다른 여러 샘물과
색깔이 같지 않네
永嘉人事盡歸空, 逸少遺居蔓草中. 至今池水涵餘墨, 猶共諸泉色不同.

여러 해 전에 루쉰(魯迅), 추진(秋瑾),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중국 근현대 유명 인물들의 발자취를 확인하러 중국 저장성(浙江省) 사오싱시(紹興市)에 간 적이 있다. 상하이(上海)에서 직통버스를 타고 사오싱에 내렸다. 터미널에는 관광객을 잡으러 나온 삼륜차 기사들로 넘쳐났다. 그 중에서 한 기사를 선택하여 내가 가고 싶은 코스를 죽 설명했다. 일반적인 관광코스와 많이 달랐던지 기사가 살짝 난감해하다가 자신이 사오싱의 유명한 코스를 보태겠다고 했다. 결국 내가 가고 싶어하는 곳을 모두 넣고 기사의 추천도 가미한 절충안으로 사오싱 여행을 시작했다.

그 기사의 첫 추천지가 바로 왕희지 옛집이었다. 사오싱 사람들이 왕희지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짐작할 만했다. 왕희지는 본래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린이(臨沂) 출신인데 사오싱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가 「난정서(蘭亭序)」를 쓴 ‘난정(蘭亭)’도 사오싱 남쪽 교외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시에서는 왕희지의 옛집이 덩굴 속에 남아 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사방에 다른 집들이 들어서서 그런 운치를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그의 집 앞에 묵지(墨池)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 고가의 특색을 느껴볼 수 있다. 왕희지가 붓글씨를 쓴 후 벼루와 붓을 씻어서 그의 집 앞 연못이 검은색으로 변했다고 한다.

왕희지는 동진(東晉)의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냈으므로 흔히 왕우군(王右軍)으로 불린다. 일소(逸少)는 그의 자(字)다. 영가(永嘉)는 서진(西晉) 회제(懷帝)의 연호(307~312)다. 서진이 팔왕의 난 이후 국력이 약화되어 민심이 이반되자 흉노 왕 유총(劉聰)이 쳐들어와 도성 낙양(洛陽)을 점령하고 회제를 잡아가서 죽였다. 이것이 이른바 ‘영가의 난(永嘉之亂)이다. 이후 서진 왕족은 동남쪽 강남으로 도주하여 진나라를 부흥했다.

영사시(詠史詩)나 회고시(懷古詩)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당 역사를 알아야 한다. 또 관련 유적지를 찾아 당시의 흔적을 더듬어보면 나름대로 마음으로 느껴지는 바가 없지 않다. 묵지를 단지 신기한 관광거리로만 본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터이다. 수백 수천 개의 벼루에 구멍이 나도록 먹을 갈았다던가, 수많은 붓의 털이 다 빠져 그것을 모아 붓무덤(筆塚)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같은 의미가 묵지에도 담겨 있다.(사진출처: 圖行天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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