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건너며渡漢江/ 당唐 송지문宋之問
嶺外音書斷 오령의 남쪽이라 서신도 끊어진 채
經冬復歷春 겨울을 지내고 다시 봄을 지났구나
近鄕情更怯 고향이 가까울수록 더욱 겁이 나
不敢問來人 오는 사람에게 소식도 묻지 못하네
우리나라에서 많이 읽은 <<오칠당음>> 첫 장을 펴면 송지문(宋之問, 656~712)의 <도중한식(途中寒食)>이라는 시가 나온다. 그리고 4번째에 바로 이 시가 나온다. 이 책은 저자별로 작품을 배치해서 몇 수 연이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영외(嶺外)는 고개의 바깥을 말한다. 바깥은 당시 수도인 장안의 시각에서 볼 때 바깥을 말하고 영(嶺)이란 오령(五嶺)이라 해서 중국 남방에 있는 5개의 큰 산맥을 말한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죄를 지은 관원을 지방의 낮은 관리로 좌천시키거나 유배를 보냈는데 이 5령의 남쪽으로 많이 보냈다. 영외를 달리 영표(嶺表)라고도 하는데, 영외, 영남, 영표 이런 말은 우리나라의 영남에도 그대로 썼던 말이다.
송지문은 시적 역량으로는 대단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측천무후 때 출세를 하느라 그가 몰락하자 바로 그 이듬해인 705년에 이 오령 남쪽으로 유배를 온 것이다. 그 지역이 바로 광동(廣東) 나정현(羅定縣)이라는 곳이다. 나정이라는 곳은 지금 광조우 시 서쪽 우저우(梧州)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사방 큰 산이 있어 교통이 아주 불편하니 편지를 못 받았다는 말이 사실과 부합한다. 이 시는 그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 고향 집으로 돌아가며 지은 것이다.
내가 며칠 전에 누구의 부탁으로 우연히 김흔(金訢, 1448~1492)의 <번역두시서(翻譯杜詩序)>을 보게 되었는데, 그 책에 “위로는 <<시경>>으로부터 아래로는 심전기(沈佺期), 송지문(宋之問)에 이르기까지 포괄하여 여러 작가들의 장점을 모아 크게 완성한 것이니, 시는 두보에 이르러 극에 이르렀다 할 만하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보면 송지문이 두보의 집대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을 두시를 번역한 조선 초기의 한국 문인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신당서>> <송지문전>을 보면 송지문은 바로 심전기와 함께 초당 때 율시를 정착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지만 측천무후시기에 간교하고 음험한 일을 많이 꾸민 인물로 그려져 있다. 송지문의 아버지 송영문(宋令文)은 문장과 서법에 능하였는데 송지문은 부친의 문재를 물려받고 동생 지제(之悌)는 서법으로 이름이 났다. 송지문은 외모도 듬직하고 말도 잘한 스타일이었는데 다소 재승덕박(才勝德薄)한 인물로 평가되어 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당시배항방>>과 <<천가시>>에는 그의 시가 한 편도 수록되지 않았고 <<당시삼백수>>에 1수 실려 있을 뿐이다. 이는 <<오칠당음>>과는 다른 선록 기준인데 중국 문인들이 시인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일생을 감안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 이 시를 보면 실제의 자기 체험을 녹여 쓴 시라 쉬운 말 가운데 절실한 정을 표현하고 있어 이 시인의 재주를 알 수 있다. 자신이 귀양 간 사이 집안에 화가 닥친 것은 아닌지, 혹 그동안 무슨 상사라도 있었던 것은 아닌지 별별 생각이 떠올라 고향 쪽에서 오는 사람을 봐도 선뜻 물어보지 못하는 불안한 인간 심리의 한 자락을 묘하게 낚아챈 것이다.
송지문의 고향이 산서성 분주(汾州)라고도 하고 괵주(虢州) 홍농(弘農), 즉 오늘날의 하남성 영보(靈寶)라고도 하는데 이 시로 보면 영보가 맞을 듯하다. 한강은 <<시경>>에도 많이 나오는 한수(漢水)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장강의 큰 지류로, 황화와 장강 사이에 위치해 있어 만약 고향을 분주로 잡으면 우리나라 지리 개념으로 환산해 볼 때 얼추 서울서 부산이나 의주까지 가는 거리니 대충 잡아도 아직 보름은 족히 가야 한다.
이는 시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고향을 영보로 잡으면 이제 거리도 몇 백리 정도로 서울서 평양 정도 거리에 지나지 않고 또 평탄한 길을 갈 뿐 아니라 큰 도로가 나오니 위의 시 내용과 아주 잘 맞게 된다. 이 시가 송지문의 고향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준다.
당나라 때 교통로를 참조하면 송지문은 일단 광주로 간 다음, 여기서 장사, 악양을 지나 형주, 양양을 거쳐 이제 정주, 동관으로 가는 길을 잡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한강을 건너 양양(襄陽) 부근에서 썼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자신의 집이 있는 홍농 방면으로는 큰 도로가 나 있으므로 오는 사람이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 말씨 등으로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고 산천 풍물이 자기 고향과 비슷해지기 때문에 고향이 가깝다는 정서적 반응이 실제 정황과 부합한다.
이 시를 보면 아주 진정을 토로하여 시를 쓰는 사람인데 송지문은 무슨 생각으로 처신을 그렇게 하여 후세의 박한 평가를 자초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연구가 필요하다.
365일 한시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