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용의 부활>, 전통의 재해석 통해 모색하는 중화의 꿈

2008년에는 삼국지가 ‘용의 부활’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선보였다. 삼국지와 용이라는 조합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도 잠시, 스크린이 열리면 곧 조자룡에 관한 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는 그 동안 삼국지에서 주목받아오던 유비나 조조, 손권 같은 군주들이나 관우와 장비 같은 장수들, 또는 제갈량 같은 참모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쟁쟁한 인물들은 모두 엑스트라가 되어 이내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영화는 조자룡이라는 한 장수의 시선을 통해 삼국지를 재해석하고자 시도한다. ‘용’의 부활이란 바로 ‘조자룡’의 부활인 것이다.

삼국지 용의 부활 三國志之見龍卸甲, 출처 weibo.com

용은 중국의 수많은 신화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중국 사람들은 용이 양(陽)의 기운이 충만한, 강한 생식력을 가진 동물로 비와 바람을 몰고 다니며 천지의 기운을 주관한다고 믿는다. 시대가 흐르면서 신비와 경외의 이미지로 덧입혀진 용은 결국 황제의 상징이 되고 유일무이한 지존의 자리에 오르면서 보통 사람들은 범접할 수조차 없게 된다. 상상의 동물이었기에 분명한 생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황제의 예복에는 다섯 발톱을 가진 용을 그려 넣었고 왕자에게는 네 발톱, 일반 관리들에게는 세 발톱을 그렸다고 한다.

어차피 실존하지 않는 동물이므로 범접할 수 없는 두려움이란 곧 친근함과도 상통하는 감정을 낳았을 것이다. 용이라는 상징은 황제와도 같은 으뜸의 존재를 표현하기도 했지만, 중국인 누구에게나 ‘용의 자손(龍的傳人)’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주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중국 사람들은 자신이 ‘용의 자손’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일종의 국민 통합을 위한 상징 이미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조자룡의 원래 이름은 ‘운(雲)’이고 ‘자룡(子龍)’은 성년이 될 때 붙여주는 이름인 자(字)이다. ‘자룡’이라는 이름은 중국어의 성어인 ‘망자성룡(望子成龍)’을 떠올리게 한다. 아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표현이다. 우리 속담에도 “조자룡이 헌 칼 쓰듯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뛰어난 무사의 표상으로 각인되어 왔다. 이 쯤 되면 이름을 지어준 사람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영화 역시 조자룡이 남긴 가장 유명한 활약상을 지나치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에 덧칠을 한다. 봉명산에서 조조 군에게 쫓기던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하기 위해 준비하던 조자룡은 유비가 하사한 갑옷을 챙겨 입으면서 한 입 가득 게걸스럽게 만두를 집어넣는다. 하지만 영화 막바지에서는 위나라 조영과의 대결에서 심한 부상을 당하고서도 이를 병사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장면도 그려진다. 인간적 모습과 영웅적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삼국지는 우리 사회에서도 많은 화제와 인기를 몰고 다니는 이야기이지만, 중국에서도 역시 그 위력은 대단하다. 60년도 되지 않는 세 나라의 건국과 멸망의 이야기 속에서 파란만장하게 펼쳐지는 권모와 술수, 의리와 배신, 전략과 전투를 그리고 있는 이야기, 삼국지는 그 때문에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거나 너무 통달해 있는 사람과도 역시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등의 말을 남길 정도였다.

위․촉․오 세 나라의 역사를 그린 삼국지는 본래 진수(陳壽)에게서 시작됐다. 명대에 이르러 나관중(羅貫中)에 의해 소설로 변신한 ‘삼국연의’가 완성됐고, 이후에는 각 지역의 고유한 연극으로 탈바꿈하면서 더더욱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1905년 중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 두 편도 역시 삼국지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 영향력을 짐작할만하다. 최초의 중국 영화 <정군산(定軍山)>은 유비의 장수 황충이 하후연, 장합 등 조조의 장수들을 맞아 승리를 거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조조가 ‘계륵’이라는 표현을 내뱉게 한 바로 그 전투였다. 같은 해 제작된 영화 <장판파(長坂坡)> 또한, 예의 조자룡이 유비의 아들을 구해내는 이야기다. 1929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수입된 중국 영화도 삼국지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지는 이래저래 한국과 중국 두 나라 영화와도 인연이 깊은 셈이다.

‘용의 부활’이 삼국지를 다루면서 다른 인물들을 모두 제쳐두고 조자룡에 초점을 맞춘 것이나 조자룡을 다루면서도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것 등은 모두 전통을 재해석하려는 최근 중국 사회의 흐름과 관련이 있다. 이 영화는 비록 흥미나 완성도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뤄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오늘날 중국 사회가 어떻게 전통을 다루고자 하는가에 관한 하나의 사례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청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중국을 꿈꾸던 많은 지식인들에게 1919년 일어난 5․4 신문화운동은 근대 중국을 건설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5․4 운동의 집약된 기치는 ‘민주’와 ‘과학’, 그리고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였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기치를 실현함으로써 서구 열강에게 여지없이 무너진 중화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진정한 근대화로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들 구호 중 ‘반봉건’이 문제였다. ‘봉건’에 반대하자는 주장은 이후 전통 중국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인식과 태도를 동반했다. 사실 중국에서 ‘봉건’이 제도로서 존재했던 적은 고대 주 왕조 시절뿐이었다. 이후 그 어느 왕조도 천자가 각 지역에 제후들을 분봉하는 봉건제를 시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당시 지식인들은 ‘봉건’이라는 명목으로 전통을 부정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주의 중국이 수립된 뒤 더욱 강화됐고, 급기야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전통 사상과 이념은 물론 수많은 문화유산마저 ‘봉건’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되는 역사를 겪어야 했다. ‘인습’과 ‘전통’을 구분하지 못하고 ‘봉건’이라는 말로 뒤범벅 해 놓은 채 관습적으로 이를 사용한 비참한 결과였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의 시대를 맞이한 지 올해로 40년, 한 세대를 지나 왔다. 그리고 지금,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경제적 부흥을 일궈온 중국인들이 다시 전통을 재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쏟고 있다.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10채널이 2001년부터 방송하기 시작한 ‘백가강단(百家講壇)’은 전통의 재해석을 선도하는 대중적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다양한 주제들을 섭렵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고전을 다룬 ‘강의’들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베이징사범대학 위단(于丹) 교수가 진행한 ‘논어’와 ‘장자’의 재해석은 중국인들 자신이 전통에 얼마나 무지했는가를 깊이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녀의 ‘논어’는 책으로 출판된 뒤 중국에서만 400만 부가 넘게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오늘날 중국인들의 전통에 대한 목마름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게 해 준다. 삼국지를 다룬 이중티안(易中天) 샤먼대학 교수의 강좌도 한 몫 거들었다. 조조와 제갈량 등 삼국지에 얽힌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 위에서 그들의 세세한 잘잘못보다는 삼분된 천하의 이야기를 큰 스케일로 엮어내는 것이 특징이라고들 한다.

전통과 절연하는 것만이 근대화(중국어로는 ‘현대화’라고 한다)를 통해 부강한 중국을 만드는 길이라는 믿음이 태어난 지 어느덧 한 세기가 흘렀다. 이제 중국은 서구적 근대화라는 가치에는 거의 도착했다는 판단과 자신을 얻게 된 것일까. 전통의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중화의 도약을 꿈꾸는 도전이 중국 사회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영화도 예외가 아니다. ‘삼국지: 용의 부활’에 이어 2008년 하반기에는 오우삼 감독의 ‘적벽’이 개봉되어 기대되만큼 사랑받은 중화권 영화가 되었다. (*)

* 박스

이중티안(易中天)과 품삼국(品三国)

올해 만 60이 되는 이중티안은 중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대중적 지식인이다. 문학과 예술은 물론 심리학이나 역사학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대중적 글쓰기와 강연을 병행하고 있다. 2005년부터 중국중앙텔레비전의 ‘백가강단’에 참여했고, 2006년에 삼국지에 대한 새로운 비평인 <품삼국>으로 이름을 날린다. 그는 마치 저자거리에서 이야기를 팔며 생계를 이어갔던 중국의 옛 이야기꾼, ‘설화인(說話人)’처럼 중국의 고전을 쉬운 현대적 언어로 풀어낸다. 2007년부터 우리 출판계에도 많은 이중티안의 저작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