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화의-저광희儲光羲 농민 따라 격량湨梁에 행차했다가 지으며行次田家澳梁作>

농민 따라 격량(湨梁)에 행차했다가 지으며行次田家澳梁作/저광희儲光羲

田家俯長道, 농민은 먼 길 내려와
邀我避炎氛. 날 폭염에서 구해주노라.
當暑日方晝, 폭서에 마침 한낮이라
高天無片雲. 높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도다.
桑間禾黍氣, 뽕밭 사이로 벼, 기장 향기 감돌고
柳下牛羊群. 버드나무 아래 소와 양떼 쉬노라.
野雀栖空屋, 참새들 빈집에 깃들고
晨昏不復聞. 아침저녁으로 새소리 다시 들리지 않는다.
前登澳梁坂, 앞의 격량 제방에 올라
極望溫泉分. 어둑한 제수의 수원을 바라본다.
逆旅方三舍, 여관은 90리 밖에 있는데
西山猶未曛. 서산의 해는 아직 지지 않았다.

[해제]

이는 성당 시인 저광희의 산수전원시다. 그는 여민동락(與民同樂)하며 손수 농사지었던 시인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농민의 고통과 농경생활을 묘사한 작품이 많이 들어 있다.

이 시에서는 격수(湨水: 하남성 제원현濟源縣에서 발원하여 황하로 흘러드는 강, 지금의 南蟒河)의 격량(湨梁)을 묘사했다. 송대 시인 문언박(文彦博)의 <격수에 적노라(题湨水)>, 사마광(司馬光)의 <제원 사람 소경 이장의 원림에 부쳐(寄題濟源李少卿章園亭)> 시도 이곳을 묘사했다. 저광희의 이 시를 ≪전당시≫에 넣을 때 ‘격량(湨梁)’을 ‘오량(澳梁)’으로 잘못 적었다. 다른 판본에는 ‘온천분(溫泉分)’을 ‘온원훈(溫原曛)’으로 표기했다.

시인은 농민의 초청을 받아 제원으로 피서 갔다가 본 모습을 이 시에 담았다. 시구 ‘전등격량판(前登湨梁坂)’으로 볼 때 당시 격량 제방이 상당히 컸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제방에 올라서서 멀리 보이는 제수 수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조망할 수 있었다.

이 시의 ‘澳梁(溴梁)’, ‘溫泉(溫原)’은 모두 지명이거나 지명의 별칭이다. 그러나 고금의 지명 가운데 ‘오량(澳梁)’이나 ‘추량(溴梁)’이란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오(澳)’, ‘추(溴)’와 ‘격(湨)’자의 형태가 비슷하여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온천분(溫泉分)’이란 시구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온원훈(溫原曛)’은 제수(濟水)의 수원(水源)과 연관이 있다. 제수는 고대 사독(四瀆) 가운데 하나다. 역대 제왕들이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문인들이 이곳을 소재로 시를 짓기도 했다. 그 수원이 제원성(濟源城) 서북쪽의 제독묘(濟瀆廟) 안에 있었는데, 물이 땅속에서 샘솟아 겨울철에도 따뜻하고 안개가 자욱하다고 한다. 청대 ≪제원현지(濟源縣志)≫에 북위 문제의 <제독에 제사 드리는 글(祭濟瀆文)>을 실었는데, 그중에 ‘온천에서 상서로움이 넘쳐나고 윤수의 수원이 제수로 들어온다.(溫方涌瑞,沇源導濟.)’는 구절이 있다. 이곳의 온천은 제독묘 북해지(北海池)를 가리킨다. 이를 보면 저광희의 시에서 ‘온원’은 제수의 수원임을 알 수 있다. ‘원(原)’은 ‘원(源)’의 옛글자다.

격량은 성의 동남쪽에 있고, 제수의 수원은 성의 서북쪽에 있다. 두 곳은 그리 멀지 않아서 작자가 해질 무렵에 격량에 올라 서쪽으로 ‘온원(溫原)’을 바라볼 수 있었다. 후에 90리[먼] 길을 걸어 여관에 도착하니 서산의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다.

오언고시 상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