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를 찾아探梅/ [宋] 석원조釋元肇
빙설이 시 재촉해
몸조차 여위도록
산 뒤와 산 앞을
몇 번이나 돌았던가
나뭇가지 끝에서
봄소식 못 만나서
부질없이 난간에 기대
작년을 추억하네
氷雪催詩瘦入肩, 幾回山後又山前. 枝頭不見春消息, 空倚闌干憶去年.
남녘에서 매화 소식이 끊임없이 전해지는지라 오늘 나도 집 근처 매화나무 인근을 맴돌았다. 옛 사람들의 탐매(探梅) 활동을 흉내낸 것이나 아직 이곳의 매화는 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시를 쓴 송나라 원조(元肇) 스님은 빙설이 시를 재촉해 봄소식을 찾아 나섰다고 했다. 빙설은 왜 시를 재촉했을까? 바로 빙설 속에 핀 매화를 읊도록 재촉했음이다. 몸조차 야윌 정도라고 했으니 빙설에 덮인 매화를 보려고 이 스님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마음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반야(般若)의 길이라 했거늘 원조 스님은 어찌 이리 매화에 집착한단 말인가?
우리나라도 절집의 고매(古梅)가 유명하다. 통도사 자장매, 화엄사 화엄매, 백양사 고불매, 선암사 선암매가 모두 나이, 향기, 자태, 기품으로 볼 때 가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매(名梅)라 할 만하다. 나는 화엄사의 붉은색 매화와 백양사의 연분홍 매화를 볼 때마다 왜 저런 향기롭고 고혹적인 매화를 절집에 심었는지 참으로 의구심을 풀 수 없었다. 겨울 가고 봄이 오는 초입에 저처럼 가슴 아리도록 어여쁜 매화가 절집을 밝히면 모르긴 몰라도 많은 스님들이 뭔가 아련한 마음에 젖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해탈의 길이라면 절집의 매화 심기는 너무 가혹한 시험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에덴동산의 선악과와 같은 원죄의 장치인지도 모르겠다. 아담과 이브는 끝내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이 시의 시인 원조 스님도 몸소 매화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역대로 많은 시인이 매화 찾기에 성공하여 멋진 탐매시(探梅詩)른 남긴 것과 달리 원조 스님은 그리던 매화를 찾지 못하고 허탈한 심정으로 절집 난간에 기대 작년 매화를 추억한다. 우리는 성불에 이른 여러 고승들의 명성을 익히 들었다. 하지만 그런 고승 뒤에는 성불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한평생 오온(五蘊)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입세와 출세의 경계를 방황하는 항하사수의 스님들이 있다. 이 시가 그런 스님들의 인간다운 고통을 보여주는 것일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말처럼, 승즉시속(僧卽是俗), 속즉시승(俗卽是僧)이란 말도 성립할 수 있을까? 하긴 뜰 앞의 잣나무는 늘 그 잣나무가 아니던가?
한시, 계절의 노래 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