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종사>: 정치와 이념의 틈바구니 끼인 무협

중국영화라고 하면 곧 무협을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중년의 나이를 넘긴 분들에게는 잊지 못할 ‘명화’로 남아있지 않을까. 호금전과 장철, 이소룡과 성룡, 주윤발과 유덕화, 그리고 장이머우에 이르기까지 중국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바로 무협이었다.

왕가위 감독이 올해 개봉한 영화 <일대종사>는 그래서 더 주목을 받았다. <동사서독>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인 무협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멜로드라마를 통해 발현된 그의 영화적 스타일이 어떻게 무협과 결합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도 컸다.

<일대종사>는 이소룡의 스승이기도 했던 엽문(葉問)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20세기 초 격변하는 중국의 시대상을 함께 그려내고 있다. 엽문(1893-1972)은 어려서부터 영춘권(咏春拳)의 제3대 전수자인 스승 진화순(陳華順)의 문하에서 무술을 익혔다. 스승이 죽은 뒤 사형의 뒤를 따르기도 했으나 대륙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뒤 홍콩으로 건너가 영춘권으로 이름을 날렸다.

무협영화는 1928년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시작됐다. 당시 대중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던 무협소설 <강호기협전>을 원작으로 만든 <불타는 홍련사>(火燒紅蓮寺)가 최초의 무협영화로 일컬어진다. 1930년대 초까지 같은 이름의 속편이 18편이나 제작되면서 무협은 중국영화의 중요한 장르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당시 영화에 열광하는 대중을 두려워했던 국민당 정부는 무협을 제작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일본의 만주 및 상하이 침공 등 불안한 정세와 맞물려 무협은 이후 홍콩으로 넘어가 꽃을 피우게 됐다.

무협이 소설이나 영화의 형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20세기 전후에 걸친 일이지만, 중국에서 그 문화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무협 문화는 실제로 중국의 도가 사상과 인연이 깊다. ‘무’(武)라는 말이 싸움의 기술을 뜻한다면, ‘협’(俠)이라는 말은 인간관계의 의리를 의미한다. ‘협’은 어떤 제도나 정치, 이념에 얽매이는 정신이 아니다. 상대방이 나를 믿고 도와줬다면, 나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철저한 개인 간의 의리에 바탕을 둔다. 자유분방한 상상의 세계를 꿈꾸는 동가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까닭이다. 강호에 의리가 떨어졌다면, 협사들이 나서야 하는 까닭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 홍콩으로 건너간 무협은 ‘쿵푸영화’를 만들어냈다. 이소룡의 절권도는 ‘쿵푸’의 대명사가 됐다. ‘쿵푸’(工夫)를 우리말 한자 독음으로 읽으면 ‘공부’가 된다. 중국어에서는 원래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시간과 정력을 쏟는다’는 뜻이다. 무술을 연마할 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로 수준에 오를 수 없기 때문에 ‘무술’을 가리키는 별명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 남부 지역, 특히 광둥 지역에서 주로 그렇게 많이 불렀다.

<일대종사>를 비롯해 최근에는 엽문에 관한 영화가 여럿 상영됐지만, 사실 쿵푸나 무협이라고 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인물로는 이소룡이나 황비홍이 훨씬 더 가깝다. 이소룡은 아직도 팬덤을 가지고 있을 만큼 그 인기를 가늠하기 어렵다. 황비홍 캐릭터는 <황비홍> 시리즈로 1980년대 중반부터 인기를 모았다. <황비홍2>를 놓고 당시 영화 수입상들이 벌인 과열 경쟁으로 <황비홍3>가 먼저 수입된 일화는 유명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방세옥(方世玉)도 꽤 유명한 무술인이다.

이들을 살았던 시대 순으로 나열해 보면, 방세옥(1739-1763), 황비홍(1847-1924), 엽문(1893-1972), 이소룡(1940-1973)이 된다. 이들은 각각 청나라 중엽부터 근대 이후 중국에 살면서 파란만장한 무술을 선보인다. 방세옥은 청나라 정부가 말살하려고 했던 남부 지역 소림파의 무술을 이어 받아 청 왕조에 대항했다. 황비홍과 엽문은 청 왕조 말기와 중화민국 시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항했다. 이소룡은 홍콩에서 영국을 앞세운 외세에 대항했다. 탈정치적이고 탈이념적인 무협의 정신이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민족과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습으로 뒤바뀐 것이다. 특히 20세기 초, 중국은 외세에 의해 ‘동아병부’(東亞病夫)라고 손가락질당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수치스런 일들을 자주 겪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일군의 적수를 추풍낙엽처럼 해치우곤 했다. 무술로 속 시원하게 민족의 자존심을 드높이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중국이 수립된 뒤 무협은 철저하게 금지됐다. 사회주의는 노동의 가치와 현실의 계급투쟁을 중시하는 이념이기 때문에 무한한 상상의 세계 속에서 강호의 의리를 운운하는 도가적 이념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현실적 가치를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주의는 오히려 도가보다는 유가에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이 사회주의 중국에서 인정될 까닭이 만무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중국이 꼭 그런 이유 때문만으로 무협을 금지했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청나라 때부터 이미 무협의 문파들은 일종의 사병(私兵) 같은 역할을 했고, 이들의 세력화는 때때로 기존 권력에 큰 위협이 됐기 때문이다. 이념과 현실을 벗어난 무협에게 주어진 아이러니컬한 어떤 운명이랄까.

왕자웨이의 <일대종사>는 소재를 무협에서 취했을 뿐, 무협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전히 그의 장기인 멜로와 스타일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사회적 의미를 되새긴다기보다는 한 인물의 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건 어쩌면 대륙으로 반환된 홍콩에서 무협을 찍어야 하는 감독에게 주어진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왕자웨이는…

왕자웨이王家卫 출처1905.com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계에 입문한 왕자웨이는 1987년 <열혈남아>(旺角廈門)라는 누아르 영화로 감독에 데뷔했다. 이후 <아비정전>, <중경삼림>, <타락천사> 등 청춘의 사랑과 시대의 불안을 그린 영화들로 이름을 얻었다. 아시아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불릴 정도로 그의 영화는 아름다운 화면 구성과 그에 알맞은 사운드트랙으로 유명하다. 최고의 화제작 <화양연화> 이후에는 유사한 영화적 시도가 반복된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번 영화 <일대종사>가 그의 새로운 출구가 될 수 있을지 주목받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