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티>:혁명의 주체에서 사회 부적응자로 전락한 중국의 노동자들

솔직하게 말해 보자. 지아장커 영화는 재미없다. 그에게서 할리우드식 스펙터클을 기대한다면 실망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사람들은 왜 지아장커가 새 영화를 만든다고 하면 기대감에 들뜨는 걸까? 왜 그의 영화들은 내로라하는 영화제들에서 아낌없는 찬사를 받는 걸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보자. 지아장커 영화는 중국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어쩌면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중국을 다룬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다보면 “어 중국에 저런 면도 있었어?”하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게 지아장커 영화의 매력이다.

지아장커 영화는 불편하다. 누군가의 탁월한 비유처럼 분칠하지 않은 중국의 ‘맨얼굴’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지아장커가 내보이는 ‘맨얼굴’은 오늘날 중국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하층민들을 통해 그려진다. 작은 시골 마을의 소매치기(<소무>), 터전을 잃고 떠도는 오락쟁이들(<플랫폼>), 사라지는 싼샤 댐 공정에 투입되어 불안하게 살아가는 막일꾼들(<스틸 라이프>), 퇴락한 군수공장에서 물러나 생계가 막막한 노동자들(<24시티>), 분노를 참지 못하고 연쇄 살인을 벌이는 범죄자들(<죄의 손길>)이 주인공이다.

이들이 사건을 벌이는 지역도 대부분 작은 시골 마을이다. 보통 사람들은 들어본 적도 없는 산시성(山西省) 펀양(汾陽)이나 다퉁(大同), 충칭(重慶)의 펑지에(奉節), 후베이성(湖北省)의 이창(宜昌) 같은 곳들이다. 중국에 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름조차 생소한 동네들이다. 지아장커는 이런 동네에도 중국인들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도 베이징이나 상하이, 선전(深圳) 같은 곳과는 아주 다르게, 꽤 불편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24시티>의 주인공들이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지아장커는 개혁개방 이후의 시간들을 주로 다루어 왔다. 그리고 다시 이 영화를 통해서 중국 사회를 보는 자신의 눈을 역사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영화는 1950년대 초반 동북 지역에서 청파그룹(成發集團)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전투기 제조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을 인터뷰한 기록이다. 이들은 각각 ‘그룹’의 조립공, 수리공, 의장공, 보위과장, 품질검사원 등으로 평생을 바쳤던 노동자들이다. 영화에는 실제 노동자 5명의 인터뷰와 허구의 인물 4명의 인터뷰가 등장한다. 노동자들은 젊은 시절 자신이 조국을 위해 몸 바쳐 일했던 기억들을 회한인 듯 추억인 듯 격렬하게 쏟아 놓는다.

잘 아는 바와 같이 1950년대 초 동아시아의 정세는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중국은 전쟁 발발 꼭 넉 달 만에 참전을 결정했고, 다시 막대한 군수품의 지원을 필요로 했다. 1840년 영국과의 사이에 벌어진 아편전쟁 이래 한 세기 동안을 전쟁과 혁명의 역사를 거쳐 온 중국에게 새로운 나라가 건국된 지 한 해만에 다시 발발한 이웃 나라의 전쟁 참여는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부담을 초래했다. 사실 새로운 나라라고는 했지만 아무런 기반도 갖춰져 있지 못한 상황에서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일은 여러 가지 사회적 비용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새나라, ‘신중국’에 대한 ‘인민’들의 환호와 기대를 어떻게 참전의 명분을 설득하는가도 관건이었다.

민심의 이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중국으로서는 ‘인민’들의 정신을 애국적이고 전투적으로 고취할 필요가 있었다. 노동자들의 자부심과 자존감을 드높임으로써 의식화하는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하는 노래는 그 과정을 표상적으로 보여준다.

“바람에 나부끼는 오성홍기. 승리의 노랫소리 얼마나 우렁찬가! 사랑하는 우리 조국을 위해 노래하자. 이제 번영과 부강의 길로 나가자. 사랑하는 우리 조국을 위해 노래하자. 이제 번영과 부강의 길로 나가자.”

1949년 중국이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했을 때, 그것은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따르면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계급이 자본계급을 전복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 당시 중국의 인구는 약 90%가 농민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혁명을 중국적으로 해석해서 중국의 사회주의를 농민혁명으로 조직해 냈다. 하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분포해 있던 노동자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혁명의 주체를 이야기할 때에도 ‘노농병(工農兵)’이라며 노동자를 앞세웠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는 신생 국가의 생산력 증강을 위해서 노동자의 역할은 거의 신성시 되다시피 했다. 국가의 주축이자 인민의 대표가 바로 노동자였다.

청파그룹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58년 청두(成都)로 이주해서 최근까지 50년 동안을 역시 비밀 생산을 수행했다. 공장의 이름도 420이라는 의미 없는 숫자로 붙여졌다. 그런데 개혁개방 30년을 맞이한 지금, 이제 군수공장의 역사적 임무가 끝나가고 있다. 공장 부지는 부동산 업자에게 팔려나가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그 아파트의 이름이 바로 ‘24시티’다. 노동자들은 늙었고, 공장에서 쫒겨나다시피 퇴직 당했다. 일거리를 잃고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는 그들에게는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쳤던 향수 밖에 남은 건 없다.

이제 더 이상 국가는 노동자를 인민의 대표로 여기지 않는다. 중국 사회에서 그들은 이제 철저한 주변부로 밀려났을 뿐이다. 오성홍기가 나부끼는 조국의 번영과 부강을 위한 노래도 의미 없다. 노동은 다시 소외됐고, 자본이 노동을 점령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지 60년이 지난 지금, 노동자는 중국 사회의 가장 큰 지위의 추락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그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기에 ‘농민공(農民工)’ 문제까지 더하면 사회주의 중국의 노동자에 대한 대우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지아장커의 영화들은 그렇게 혁명의 주체 노동자가 어떻게 사회 부적응자들로 전락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아장커는…

지아장커賈樟柯, 출처 360doc.cn

1970년 중국 산시(山西省) 펀양현(汾陽縣)에서 났다. 베이징영화대학 문학과를 졸업한 이른바 ‘6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1995년 단편영화 <샤오산의 귀경(小山回家)>이 홍콩에서 호평을 받으면서 일약 스타 감독으로 부상했다.

이후 지금까지 <동(東)>, <무용(無用)> 등 다수의 단편영화와 <소무(小武)>, <플랫폼(站台)>, <임소요(任逍遙)>, <세계(世界)>, <스틸라이프(三峽好人)>, <24시티(二十四城記)>, <해상전기(海上傳奇)>, <죄의 손길(天注定)> 등 일련의 장편영화를 통해 중국 사회의 평범한 소시민들의 삶을 그려오고 있다.

<스틸라이프>는 2006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최우수영화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최근작인 <죄의 손길>은 올해 제66회 칸영화제 최우수각본상을 수상하는 등 내놓는 작품마다 관객과 평론가들의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