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장천사가 도교를 부흥시키고 부교를 탄압하니
벽봉장로가 남쪽으로 와서 고난을 구제하다
張天師興道滅僧 金碧峰南來救難
璠璵琢就質堅剛 아름다운 옥 쪼아 만드니 재질도 단단하고
布命朝廷法制良 조정에서 명을 반포하니 법제도 훌륭하구나.
寶盒深藏金縷鈿 보배로운 상자에 깊이 담아 금실을 박아 장식했고
朱砂新染玉文香 주사(朱砂)를 새로 묻히니 옥 무늬 향기롭구나.
宮中示信流千古 궁중에서 신임 보여 천고에 전해지고
闕下頒榮遍四方 대궐 아래 영화가 사방에 두루 퍼지네.
却憶卞和三獻後 돌이켜보니 변화(卞和)가 세 번 바친 뒤
到今如斗鎭家邦 지금까지 북두칠성처럼 나라를 지키고 있네.
그러니까 황제는 그 옥새를 보고 무척 기뻐했는데, 다만 그 도장에는 ‘구로선도지인(九老仙都之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옥새가 훌륭하긴 하지만, 짐이 쓸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구려.”
장천사가 대답했다.
“쓰실 수 있사옵니다.”
“짐은 사해 안의 부(富)를 모두 갖고 있고 천자의 몸인데, ‘구로선도지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도장을 쓴다면 짐이 도사가 돼버리는 셈이 아니오?”
비록 황제의 반박이긴 했지만 그다지 심각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천사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폐하를 모독하는 셈이 되지 않은가!’
그는 혼비백산 놀라서 황망히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린 다음, 이렇게 아뢰었다.
“폐하, 이 옥도장은 조정에서 쓰실 수 있사옵니다. 하지만 옥새만 쓸 수 있다는 말씀이지 ‘구로선도’라는 글자를 쓸 수 있다는 뜻은 아니옵니다.”
“그 글자가 쓸모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되겠소?”
장천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용상 왼쪽에 시립해 있던 요태사가 아뢰었다.
“시비는 그걸 제기한 사람이 해결해야 하는 법이오니, 이 문제 역시 얘기를 꺼낸 장진인에게 맡기시옵소서.”
“그렇구먼. 이 문제도 장천사께서 해결하셔야 되겠소.”
이에 장천사가 대답했다.
“폐하,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사온데 부디 윤허해 주시옵소서.”
“어디 말씀해 보시구려.”
“이 도장의 글자는 그저 예전에 새겨진 것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그러니 이제 폐하께옵서 솜씨 좋은 장인을 선발하여 폐하의 자호(字號)를 새기게 하여 조정에서 쓰시면 되지 않겠사옵니까?”
“일리 있는 말씀이구려.”
황제는 즉시 어명을 내려 상보시(尙寶寺)의 책임자[正堂]인 전(錢) 아무개로 하여금 하루 종일 지키게 했다. 그리고 다시 공부상서(工部尙書) 마(馬) 아무개의 감독 하에 도장에 글자를 다시 새기게 했다. 또 문화전(華殿掌)의 중서사인(中書舍人) 유(劉) 아무개로 하여금 ‘봉천승운지보(奉天承運之寶)’라는 글자를 전서(篆書)로 쓰게 했다.
어명이 내려왔으니 누가 감히 어길 수 있겠는가? 상보시경(尙寶寺卿)은 이 옥새를 받든 채 밤낮으로 그 곁을 떠나지 않았고, 공부상서는 즉시 수많은 문서와 패표(牌票)를 발부하여 다섯 개의 성과 두 개의 현(縣)에서 옥을 다듬는 장인을 선발하여, 다시 여럿이서 함께 시험을 치러서 최상의 솜씨를 가진 이를 뽑았다. 다섯 개의 성에서 각기 다섯 명을 뽑으니 오오는 이십오 즉 스물다섯 명이요, 두 개의 현에서 각기 다섯 명을 뽑으니 이오는 십 즉 열 명이었다. 그들은 즉시 공부로 들어와 대기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얼마 후 이들 지역에서 장인들을 이끌고 찾아오자 공부상서가 말했다.
“관리들은 문서를 부서에 제출하고 각자 본래 직무로 돌아가라. 장인들은 명단을 기록하여 제출하라. 이들을 한 명씩 시험하여 공이 있는 자에겐 상을 내리고 죄를 지은 자에게는 벌을 내리게 될 것이다. 명단을 기록하고 나면 궁궐 밖에 나가 대기하도록 하라.”
원래 이 옥새는 함부로 깎거나 손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담당 관리가 공부의 대청에 두 개의 탁자를 마련하고 그 위에 부용꽃을 수놓은 비단을 깔았다. 또 흠천감(欽天監)으로 하여금 길한 날짜와 좋은 시간을 정하게 하고, 마상서는 조회복과 모자를 차려입고 향을 사르며 천지신명에게 절을 올렸다. 그런 다음 다시 옥새를 향해 절을 올리고, 몸소 상보시로 가서 옥새를 받아와서 공부의 대청에 마련된 탁자 위에 놓았다. 장인들도 각자 천지신명께 절을 올리고 지전을 태우고 향을 사르고 나서야 탁자로 다가가 보니, 옥새에서는 아름다운 노을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거기에 손을 대지 않자니 어명을 어기는 것이고, 손을 대자니 너무 무서웠다. 그때 당상(堂上)에서 운판(雲板)이 울리더니 공부상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되었으니 장인들은 작업을 시작하라!”
장인들은 어쩔 수 없이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 이 장인들은 함부로 손을 대지 않고 먼저 상, 중, 하의 세 반으로 나누었다. 아홉 명이 한 반이 되어 모두 삼구 이십칠 즉 스물일곱 명이 되었으며 나머지 여덟 명 가운데 두 명은 모래를 보충하고, 두 명은 물을 교환했고, 두 명은 빈자리를 보충했으며, 두 명은 문제 있는 부분을 지적해 주었다. 각 반이 돌아가며 작업하고, 한 바퀴를 돌면 다시 처음부터 순서대로 작업을 진행했다. 그렇다고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작업을 계속한 것은 아니었다. 인시(寅時: 새벽 3~5시)에 장인들이 공부 관아로 들어가서 묘시(卯時: 아침 5~7시)까지는 작업을 시작하지 않고 있다가,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작업을 시작하고,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또 시작하고,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에는 옥을 갈고 씻는 작업을 하고, 미시(未時: 오후 1~3시)에 다시 가는 작업을 하고. 신시(申時: 오후 3~5시)에는 깎는 작업을 쉬었다. 하루 동안에 왜 이리 여러 단위로 나누어 일을 했을까? 원래 인시와 묘시는 해가 막 떠서 햇빛이 아직 비스듬히 비치고 진시와 사시, 미시에는 해가 머리 위에 있다가, 신시 무렵에는 해가 서쪽으로 기운다. 그러므로 하루에도 작업을 해야 할 시간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마상서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옥새를 잘 갈면 금의환향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면 어쩌지?’
장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옥새를 갈아 공을 세우면 호의호식할 수 있겠지만, 실수를 저지르는 날에는 말도 못할 재앙을 당할 거야.’
그들은 모두 머리통을 손에 들고 있는 듯, 심장과 쓸개를 칼날 위에 올려놓고 있는 듯한 심정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면서 삼십 일이 지났다. 한 달이 지나서야 작업이 모두 끝난 것이었다. 상보시경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옥새에 새겨진 ‘봉천승운지보’라는 글자를 살펴보았다. 마상서도 그걸 보고 둘이 함께 기뻐하며 파총(把總)을 불러 옥새에 임시로 황금으로 만든 꽃 한 쌍을 장식하고 붉은 주단을 걸쳐놓았다. 또 장인들을 불러 임시로 몇 가지 상을 내리고, 어명이 내려오면 별로도 후한 상을 내리기로 했다.
상보시경은 다시 이 옥새를 받쳐 들었고, 마상서는 곧장 조정 대문 밖에서 어명을 기다렸다. 오경 삼점(五更三點)에 황제가 대전에 오르고 문무백관들이 조정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어명을 전하는 이가 소리쳤다.
“문무 관원들이 모두 모였는가?”
그러자 문무 반원을 인솔하는 압반관이 나아가 아뢰었다.
“문관도 빠진 사람이 없고 무장들도 마찬가지인데, 이미 서열에 따라 정렬해 있사옵니다.”
“보고할 일이 있는 관리는 나와 보고하고, 별일 없으면 물러가도록 하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문관이 아뢰었다.
“공부의 마상서가 어명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들라 하라.”
어명이 전해지가 마상서가 대전으로 들어와 다섯 번 절을 올리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린 다음 만세삼창을 했다.
“수고가 많았소. 작업은 어찌 되었소?”
“하늘같으신 폐하의 홍복으로 옥새를 다듬는 작업이 모두 끝났사옵니다.”
“지금 어디 있는가?”
“오문에 있사옵니다. 괜찮은지 살펴보시옵소서.”
“옥새를 들여오도록 하라.”
상보시경이 두 손에 옥새를 받쳐 들고 예부상서에게 건네자, 다시 조정의 원로대신과 사례감 태감에게로 전해졌고, 태감이 황제에게 바쳤다. 황제가 살펴보니 과연 ‘봉천승운지보’라는 글자가 전서로 새겨져 있었다.
“사례감은 종이 위에 옥새를 찍어보도록 하라.”
붓을 들고 있던 태감이 황급히 옥새에 주사를 바르고, 종이를 담당하는 태감이 하얀 종이를 펼치자 그 위에 연달아 두세 개의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황제가 펼쳐 보니 ‘구로선도지인’이라는 전서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었다. 황제는 기분이 조금 상해서 상보시의 관리를 부르지도 않고 그냥 공부상서로 하여금 다시 작업을 하라고 분부했다.
마상서는 옥새를 받아 관아로 돌아가면서 너무 슬퍼 눈물을 줄줄 흘렸다.
‘십년 동안 애써 공부한 게 도로아미타불이 되었구나. 정이품의 벼슬이 오늘 이 옥새 때문에 날아가게 되었어!’
그는 어쩔 수 없이 담당 관리를 불러 비표를 작성하게 하고 공문을 보내 원래의 장인들을 다시 소집했다. 장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들 통곡하며 형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하지만 관아에서 부르니 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다시 예전과 같이 반을 나누고 예전처럼 임무를 나누어 맡았다. 그리고 예전처럼 인시에 공부 관아로 들어가 묘시까지는 쉬고 있다가 진시에 작업을 시작하고, 사시에 또 작업하고, 오시에 옥새를 갈고, 미시에도 갈고, 신시에 작업을 마쳤다.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욱 박차를 가했기 때문에 한 달이 되기 전에 작업을 마쳤다. 마상서가 자세히 살펴보니 분명히 ‘봉천승운지보’라고 새겨져 있는지라,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 어명을 기다렸다.
그때 황제는 근신전(謹身殿)에서 정사를 논의하고 있었는데, 마음이 급해진 마상서가 근신전으로 달려갔다. 이에 황문관이 보고했다.
“공부상서가 대전 밖에서 어명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들라 하라.”
어명이 전해지기도 전에 마상서가 황급히 들어왔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성급한가?”
“옥새 작업이 끝나서 보고하러 왔사옵니다.”
“옥새는 어디 있는가?”
“대전 문밖에 있사옵니다.”
“들여오도록 하라.”
즉시 명이 전해져서 옥새가 근신전으로 들여졌다. 황제가 살펴보니 분명히 ‘봉천승운지보’라고 새겨져 있어서 얼른 주사를 바르고 종이에 찍어 보게 하니, 또 ‘구로선도지인’이라고 찍히는 것이었다. 황제는 전보다 더욱 불쾌해져서 공부상서에게 다시 들고 나가 작업을 하도록 분부했다.
마상서는 다시 장인들을 소집해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 작업에 상서는 정이품이 벼슬이 걸려 있고 장인들은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마상서가 말했다.
“이번에는 옛날 글자를 말끔히 지우고 새 글자를 또렷하게 새기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끔히’ 지우라는 바람에 옥새를 절반 가까이 갈아버렸고, ‘또렷하게’ 새기라고 했으니 ‘봉천승운지보’라는 글자가 명명백백하게 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작업이 끝나서 이튿날 아침 조회가 열리자 마상서는 다시 옥새를 바쳤다. 하지만 종이 위에 찍어 보니 다시 ‘구로선도지인’이라고 찍히는 게 아닌가! 황제는 산악을 무너뜨릴 듯 대노하여 옥새를 들어 궁전 섬돌 아래로 내던졌다.
“재간이 있다 한들 기껏해야 초선(草仙)에 지나지 않거늘, 어찌 감히 황제를 희롱한단 말인가!”
황제는 즉시 금의위 책임자를 불러 옥새를 오문 밖으로 가져가 곤장 마흔 대를 후려쳐서 영원히 쓰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라고 어명을 내렸다. 금의위 도지휘(都指揮)는 교위(校尉)에게 다섯 개의 곤장을 새것으로 바꾸게 하여 마흔 대를 준비하게 하고, 여덟 명의 교위를 바꾸어가며 옥새의 운명이 저승으로 돌아가 다시는 쓸 수 없도록 내리치게 했다. 그런데 어떻게 옥새의 운명이 저승으로 돌아가 다시는 쓸 수 없게 만든단 말인가? 원래 이 옥새는 살아 있어서 밤에는 네 냥(兩)의 주사를 먹고 한 번에 천 장의 종이에 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마흔 대의 곤장을 맞고 나서는 주사를 먹지 않고 한 번에 한 장의 종이에만 도장을 찍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운명이 저승으로 돌아가 다시는 쓸 수 없게 된 셈이 아닌가? 지금도 이 도장은 모산의 영관이 관리하고 있다.
한편 황제가 자리에서 떠나자 문무백관들도 조회를 파했다. 그야말로 이런 격이었다.
靑天白日 청천백일에
撞着一個顯歹子 아주 못된 놈 하나 만났으니
莫道無神也有神 신이 없느니 있느니 말하지 말지라!
한밤중이 되어 갈 때 삼모조사는 자신의 옥새가 곤장 마흔 대를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삼형제가 분노하여 각자 주먹을 내지르고 발길질을 하여 화양동을 무너뜨려 버렸다. 원래 이 화양동 안에는 백여 명이 들어갈 수 있으며 연단(煉丹)을 할 수 있는 아궁이와 솥, 돌침대와 돌 의자 등등 기이한 물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 세 조사가 무너뜨려 버리니 이제는 동굴 입구만 남아 있게 되었다. 세 조사는 화양동을 무너뜨린 것은 그렇다 치고, 즉시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눈부신 노을빛을 빛내며 금릉(金陵) 건강부(建康府, 지금의 난징시[南京市])로 달려갔다. 사실 그들은 못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당시 황제는 건청궁(乾淸宮) 침실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정수리 위쪽에 진신(眞身)이 나타나 있었다. 삼모조사는 그제야 그 황제가 바로 옥허사상현천대제(玉虛師相玄天大帝)께서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난 존재임을 알았다. 원래 현천상제는 삼모조사보다 훨씬 급이 높은 존재인지라 감해 대적할 수 없는 상대였다. 삼모조사는 자기 주제를 알고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닭이 울면서 새벽이 밝아 황제가 대전에 오르자 문무백관들도 조정에 들어왔다. 이야말로 이런 격이었다.
鐘聲紫禁纔應徹 황궁에 종소리 비로소 퍼지니
漏報仙衛儼已開 시각 알리자 궁궐 대문 벌써 열려 있네.
雙闕薄烟籠菡萏 대궐의 희미한 안개 피어나는 연꽃을 덮고
九成初日照蓬萊 높은 누대에 떠오른 햇빛 봉래전(蓬萊殿)을 비추네.
朝時但向丹墀拜 조회할 때는 그저 붉은 섬돌 향해 절을 올리고
仗下方從碧殿廻 의장(儀仗)이 내려지면 황제 따라 찬란한 궁전으로 돌아가네.
聖道逍遙更何事 성인의 길 유유자적하니 또 무슨 일이 있으랴?
願將巴曲贊康哉 바라건대 파곡(巴曲) 불러 태평성대 칭송하리라!
황제가 대전에 오르자 문무백관들이 조정에 들어왔고, 정편(淨鞭)이 세 번 울리자 문무 양반으로 나뉘어 정연하게 늘어섰다. 황제는 어명을 내려 용호산 정일사교도합무위천조광범 장진인을 불러오라고 했다. 장천사는 어명을 받고 황급히 조정으로 들어와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린 다음 만세삼창을 했다. 이에 황제가 말했다.
“저번에 삼모산에서 가져온 도장은 곤장 마흔 대를 쳐서 쓸모가 없어져 버렸고, 그대 도관의 도장은 또 도솔천 청허부에 있어서 쓸 수가 없소. 그러니 이제 짐은 어느 옥새를 쓴단 말이오?”
“폐하께서 쓰실 수 있는 전국새가 있지 아니하옵니까?”
“전국새는 먼 곳으로 가 버렸다고 하지 않았소!”
“서쪽 외국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난하여 금방 다녀올 수는 없사옵니다.”
“어쨌든 유능한 관리 하나를 선발해 한 번 다녀오도록 해야 되겠소.”
장천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용상 왼쪽에 시립해 있던 요태사가 아뢰었다.
“시비는 그걸 제기한 사람이 해결해야 하는 법이오니, 이 문제는 얘기를 꺼낸 장진인이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옵니다.”
이에 황제가 말했다.
“장진인, 아무래도 이 옥새는 그대가 가져다줘야 되겠소.”
장천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요태사는 나하고 원수진 일도 전혀 없는데 한사코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애쓰는군. 어떻게든 계책을 마련해서 갚아줘야 되겠어. 그런데 어떻게 한다? 옳지! 요태사는 본래 승려이니, 이제 옥새를 가져오는 일을 핑계로 불교를 없애서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려야 되겠다. 나중에 모진 꼴을 당하고 나서 후회해 봐야 소용없게 만들어주마.’
이에 그는 황제에게 아뢰었다.
“폐하, 전국새를 가져오는 것은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는 것처럼 쉬운 일이옵니다.”
“어떤 계책이 있는지 말씀해 보시오.”
“저의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시면 그 계책을 아뢰겠사옵니다.”
“무엇이든 말씀해 보시구려.”
“옥새를 가져오시려면 우선 남경과 북경, 열세 개 성(省)의 암자와 절에 있는 승려들을 모두 없애 주시옵소서. 그러면 제가 계획을 세워 서양으로 가서 그 옥새를 구해 오겠나이다.”
황제는 오로지 그 옥새를 얻고 싶은 마음뿐이었는지라 그 청을 들어주기로 하고, 즉시 불교를 멸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예부에서는 그 명을 받자 곧 남경과 북경, 열세 개 성에 공문을 보내서 지역이 멀고 가까운 것에 상관없이 공문을 접수한 날로부터 이레 안에 천하의 모든 승려들을 산에서 내려 보내 환속시키라고 지시했다. 이레 안에 하산하지 않는 자는 만리장성 바깥의 구외(口外)로 강제이주를 시켜서 평민으로 살게 하고, 이레가 지난 뒤에도 하산하지 않는 자는 어명을 거긴 죄로 본인과 속가(俗家)의 가족 모두를 참수형에 처하라고 했다. 또한 주위에 승려가 있는데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변방의 군대로 보내 복역하게 했다.
예로부터 ‘불 가까이 있는 사람이 먼저 데인다.’고 했듯이, 이곳 금릉 건강부는 바로 황궁 근처인지라 예부에서 고시를 내리자마자 오성병마사(五城兵馬司)에 승려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천하의 명산은 대부분 승려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남조 이래 세워진 사백팔십 개의 사원에 있던 수많은 승려들은 지위와 인품을 막론하고 모조리 내쫓겨 하산해야 했다. 하물며 엄중한 어명이 내려졌으니 어찌 인정을 베풀 수 있었겠는가? 승려들은 누구도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짐을 싸서 둘러메고 통곡하며 떠나야 했다. 제자 앞에서 통곡하는 사부와 사부 앞에서 통곡하는 제자, 사손(師孫) 앞에서 통곡하는 사조(師祖)와 사조 앞에서 통곡하는 사손, 다른 이의 제자와 사손 앞에서 통곡하는 사부와 사조, 다른 이의 사부와 사조 앞에서 통곡하는 제자와 사손, 이 승려의 모자를 저 승려가 쓰고 가고, 저 승려의 나귀를 이 승려가 타고 가기도 했다. 또한 기생집에 가서 한없는 이별의 회포를 푸는 이도 있고, 비구니들의 암자에 찾아가서 젊은 비구니를 끌어안고 애석해하는 이도 있었다. 그야말로 “삭발하고 또 법을 어기고, 집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削髮又犯法, 離家又到家]” 상황에 이런 모습이 겹친 격이었다.
袖拂白雲歸洞口 흰 구름 소매에 스치며 동굴 입구로 돌아가서
杖挑明月浪天涯 지팡이에 밝은 달 짊어지고 하늘 끝을 떠도네.
可憐樹頂新巢鶴 가련하다 나무 꼭대기에 새로 둥지 튼 학이여!
辜負籬邊舊種花 울타리 옆에 심어둔 꽃도 외로이 남겨둘 수밖에.
어쨌든 이 승려들은 어쩔 수 없이 하산하게 되었으니 누군들 원망하지 않았겠는가? 사람 수가 많으면 원망도 그만큼 많아지는 법이니, 이 일은 오대산(五臺山) 청량사(淸凉寺)에서 불경을 강설하고 있던 저 벽봉장로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자리에 올라앉아 현묘한 설법을 하고 있다가 이 소문을 듣자 곧 속사정을 알아챘다.
‘마하승기가 과연 이런 액운을 몰고 왔으니, 내가 가지 않는다면 불교는 영원히 일어설 수 없게 되겠구나. 내가 원래 속세에 내려온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니던가?’
그는 즉시 경전을 덮고 강당을 담당하는 승려를 불렀다.
“승려들에게 도량을 잘 간수하라고 당부해 놓아라. 나는 남경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그러자 좌선세(左善世)와 우선세(右善世), 좌천교(左闡敎), 우천교(右闡敎), 좌강경(左講經), 우강경(右講經), 좌각의(左覺義), 우각의(右覺義), 정제과(正提科), 부제과(副提科), 정주지(正住持), 부주지(副住持), 정승회(正僧會), 부승회(副僧會), 정승과(正僧科), 부승과(副僧科), 정승강(正僧綱), 부승강(副僧綱), 정승기(正僧紀), 부승기(副僧紀) 등등이 모두 간청했다.
“스님, 한참 현묘한 부분을 강설하고 계셔서 저희들이 진정으로 고해에서 벗어나 영원히 지옥문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사온데, 어이해 갑자기 떠나려 하십니까?”
그리고 모든 비구승과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사중(四衆)들이 저마다 간청했다.
“스님, 한참 현묘한 부분을 강설하고 계셔서 저희들이 진정으로 고해에서 벗어나 영원히 지옥문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사온데, 어이해 갑자기 떠나려 하십니까?”
또한 제자 비환과 사손 운곡도 만류했다.
“여러 집을 돌아다니느니 한 집에 계속 머무는 게 나은 법인데, 무슨 일로 또 남경에 가시려는 것입니까?”
“걱정 마라. 금방 다녀오마.”
그러자 모든 이들이 물었다.
“언제쯤 돌아오시렵니까?”
“이삼일이면 될 게다.”
오대산에서 남경을 다녀오는데 어떻게 이삼일밖에 걸리지 않는단 말인가? 원래 벽봉장로는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난 연등고불인지라, 금광이 번쩍 일면 어디든지 가고 그 빛을 누르면 멈출 수 있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스님, 저희에게는 하루가 일 년 같아서 이삼일도 기다리기 어렵사옵니다.”
하지만 벽봉장로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보라. 그는 둥근 모자를 쓰고 색을 물들인 도포에 노란색의 가는 허리띠를 매고, 여름 양말에 승려의 신발을 신고 어깨에 구환석장을 멘 채 금빛을 번쩍 일으키더니 어느새 오대산을 떠나 순식간에 남경의 상청하(上淸河)에 이르렀다.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남경은 정말 용이 똬리를 틀고 호랑이가 쪼그려 앉은 제왕의 도읍이었다. 이를 증명하는 〈제경첨망(帝京瞻望)〉이라는 노래[詞]가 있다.
漢室金陵吳建業 한나라 금릉 땅에 오나라가 세워지니
盤囷百里帝王國 구불구불 백 리를 둘러싼 제왕의 나라일세.
三山二水壯皇圖 세 산과 두 강물 황도(皇圖)에 장엄하니
虎踞龍蟠旺地脈 호랑이 웅크려 앉은 듯 용이 똬리 튼 듯 지맥도 왕성하구나.
鐘陵佳氣鬱葱葱 종산(鐘山)의 아름다운 공기 속에 녹음이 울창하고
萬歲嵩呼遺劍弓 우렁찬 만세삼창 뒤에 칼과 활이 남겨졌구나.
紫霧寒浮山月曉 자줏빛 안개 차갑게 떠 있을 때 산 위 달은 새벽을 맞고
紅雲晴挾大明東 붉은 구름 황궁 동쪽에 맑게 걸렸구나.
巍峨闕殿隱靈谷 드높은 궁궐 대전 신령한 골짝에 숨어 있고
星列辰分環輦轂 늘어선 별자리들 도읍을 둘러쌌네.
天上淸虛廣寒宮 하늘에는 청허광한궁이 있고
人間玉藻瓊枝屋 인간 세상에는 옥으로 장식한 집이 있지.
閱江樓下撫紅泉 열강루(閱江樓) 아래에서 홍천(紅泉)의 물을 뜨고
鸛鳥臺上眺靑天 관조대(鸛鳥臺)에서 푸른 하늘 바라보았네.
分服不殊周鎬洛 백성들이 따름은 주(周)나라의 호락(鎬洛)과 다르지 않고
授時猶守舜璣璇 벼슬 내릴 때는 순 임금의 선정(善政)을 따랐다네.
主家戚里連朱戶 황궁과 외척 거주지에 귀족들 저택 늘어서고
執戟三千食帝祿 삼천 개의 창을 세우고 황제의 녹봉 받아 살았다네.
長楊校獵疾飛雲 장양궁(長楊宮)에서 사냥할 때는 나는 구름처럼 빨랐고
熊館驅馳如破竹 사비관(射熊館)에서 말 달릴 때는 파죽지세였지.
鐘鼓堂皇肅未央 웅장한 음악소리 미앙궁(未央宮)에 엄숙히 울렸고
嚴更蹕道儼周行 엄격한 시간 맞춰 황제는 의젓하게 돌아갔지.
帶礪共盟千古石 황실의 은총 몸 바쳐 갚으리라는 맹서는 천고의 돌처럼 굳었고
金甌永稱萬年觴 황금 주발 같은 강토 영원하리라 술잔 들어 칭송했지.
此時天子尊文敎 이때 천자는 문교(文敎)를 존중하여
求賢直下金門詔 현명한 인재 구하는 어명을 내리셨지.
草茅願策治安書 초야의 인재는 편히 다스릴 대책을 썼고
葵曝敢揮淸平調 백성들은 감히 태평성대의 노래를 불렀지.
石渠天祿宛蓬瀛 하늘의 복을 받은 석거각(石渠閣)은 삼신산처럼 아름다웠고
經筵御日對承明 경연(經筵)이 열리는 날 승명전(承明殿) 앞에 나아갔지.
作賦未能遭拘監 시를 짓지 못하면 구금을 당해야 했고
注書甘自老虞卿 책을 해설할 때에는 기꺼이 우경(虞卿)을 자처했지.
吁嗟! 世人嗜竽不嗜瑟 아! 세상 사람들은 피리만 좋아할 뿐 거문고는 싫어하니
眞贋繽紛誰鑒別 어지러이 얽힌 참과 거짓을 뉘라서 감별할까?
安貧獨有子雲賢 안빈낙도의 즐거움은 오직 양웅(揚雄)만이 누려서
寂寞玄成聊自適 고요하게 성인의 뒤를 이으며 유유자적했지.
世事湛浮似轉丸 세상사의 부침(浮沈)은 구르는 구슬 같은지라
由來先達笑彈冠 먼저 깨달은 이들은 벼슬살이를 비웃었지.
咫尺君門遠萬里 지척의 황궁 문이 만 리처럼 멀리 느껴지니
令人惆悵五雲端 오색구름 끝에서 실의에 젖게 하는구나.
또 〈사자산(獅子山)〉과 〈청량사(淸凉寺)〉라는 두 편의 율시가 있다.
萬仞顚崖俯大江 만 길 벼랑 장강을 굽어보나니
天開此險世無雙 하늘이 만든 이 험지 세상에 짝이 없네.
符堅小見堪遺笑 부견(符堅)은 속이 좁아 후세의 비웃음 살만했고
魏武雄心入挫降 위나라 무제의 호방한 마음도 좌절당했지.
一統輿圖新氣象 강토를 통일하여 기상을 새롭게 했으니
六朝形勝舊名邦 육조 때의 형세는 옛날 유명한 나라보다 뛰어났지.
題詩未覺登臨晚 시를 짓노라니 어느새 누각 주위에 날이 저물어
笑折黃花滿酒缸 웃으며 국화 꺾어 술항아리에 가득 채우네.
不用芒鞋竹杖扳 짚신 신고 대지팡이 짚을 필요 없이
肩輿直到翠微間 가마 타고 곧장 녹음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네.
生逢王氣千年地 왕기 어린 천년의 땅 살아서 만나보니
秀拔金蓮一座山 황금 연꽃 같은 빼어난 산 하나 솟아 있구나.
佛殿倚空臨上界 허공으로 치솟은 불당은 하늘에 닿고
僧房習靜隔塵寰 고요한 승방은 속세와 떨어져 있네.
傳杯暫借伊周手 술잔 돌릴 때면 잠시 이윤과 주공의 손을 빌리고
且放經綸半日閑 국가대사는 잠시 접어두고 한나절을 쉰다네.
어쨌든 벽봉장로는 남경 상청하에 이르러 금광을 내리고 쌍묘(雙廟)로 들어갔으니, 이때는 벌써 한밤중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야말로 이런 격이었다.
靜夜有淸光 고요한 밤에 맑은 빛 비치나니
閑堂仍獨息 조용한 방에서 홀로 쉬노라.
念身幸無恨 몸도 마음도 다행히 한이 없어
志氣方自得 뜻도 기분도 편안하노라.
樂哉何所憂 즐거워라, 무슨 걱정 있으랴?
所憂非我力 근심하는 일이야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것을!
어쨌든 이 사당 안에는 몇 개의 신이 있었으나, 금광을 번쩍이는 벽봉장로를 보자 자신들이 잘난 체 나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모두 떠나 버렸다. 벽봉장로가 사당으로 들어가 제사상 앞에 앉았을 때 갑자기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無踪無影透人懷 흔적도 그림자도 없이 품을 파고들어
四季能吹萬物開 사계절 모두 만물을 불어 열 수 있다네.
就地撮將黃葉去 땅에서는 낙엽을 쓸어 가고
入山推出白雲來 산에 들어가면 흰 구름 쫓아낸다네.
바람이 지나자 어느 신이 들어왔다. 그의 차림새를 보면 두건을 쓰고 초록빛 비단옷을 입고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둘렀는데, 거기에는 청룡도가 살벌하게 걸려 있었다. 벽봉장로가 물었다.
“그대는 어떤 성현이시오?”
“저는 불법을 수호하는 열여덟 명의 가람(伽藍) 가운데 하나이옵니다.”
“알고 보니 옥천산(玉泉山)에서 영험을 드러내신 관(關)장군이셨구려.”
“그렇습니다.”
“본래 자리로 돌아가시구려. 폐를 끼칠 수 없소이다.”
그 신이 떠나고 나자 또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有聲無影遍天涯 소리는 있으되 그림자도 없이 하늘 끝까지 두루 다니고
庭院朱簾日自斜 뜰 안 붉은 주렴에 햇빛은 절로 기우네.
夜月江城傳戍鼓 달밤 강가 성에서는 전투의 북소리 들려오고
夕陽關塞遞胡笳 석양 무렵 변방에는 오랑캐 피리소리 들려오네.
바람이 지나가자 또 많은 신들이 들어왔다.
“어떤 신들인지 성명을 밝히시오.”
알고 보니 이들은 일유신(日遊神)과 야유신(夜遊神), 증복신(增福神), 약복신(掠福神), 규찰신(糾察神), 허공과왕신(虛空過往神), 그리고 오방게체신(五方揭諦神)들이었다.
“모두들 본래 자리로 돌아가시오. 여러분의 도움은 필요 없소.”
그 신들이 떠나고 나자 또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無影無踪一氣回 그림자도 종적도 없이 단숨에 돌아
花心柳眼亂吹開 꽃도 버들 싹도 어지러이 불어 피게 하네.
分明昨晚西樓上 분명히 어젯밤엔 서쪽 누대에서
斜拽笙歌入耳來 피리소리 끌고 와서 내 귀에 들리게 했지.
바람이 지나고 나자 또 한 명의 신이 나타났는데 그 차림새는 이러했다. 검은 두건에 붉은 장삼에 황금 허리띠를 매고, 손에는 칼 대신에 상아로 만든 홀판(笏板)을 들고 있었다. 또 눈썹과 눈동자가 아주 수려하고 하얀 이에 붉은 입술, 분을 바른 듯이 하얀 얼굴에 콧수염과 구레나룻을 조금 기르고 있었다. 그는 벽봉장로를 보더니 둘레를 세 바퀴 돌며 이를 딱딱 부딪쳐서 경건한 마음을 표시했다. 벽봉장로가 물었다.
“그대는 어떤 신성인가?”
“저는 남경성에서 요괴를 처단하고 진명황제(眞命皇帝)의 어가(御駕)를 호위하고 있사옵니다.”
“어느 진명황제를 말하는가?”
“무릇 진명황제가 인간 세상에 내려오시면 여러 신들이 호위하옵니다. 저는 홍무제(洪武帝)의 어가를 호위하고 있사옵니다.”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저는 지금 경사 안쪽 열세 대문과 바깥의 열여덟 대문 가운데 하나인 강동문(江東門)을 지키고 있사옵니다.”
“지금까지 어떤 요괴를 처단하고 어떤 사이한 것을 붙잡았는가?”
“오랑캐 원나라가 중원에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하면서부터 하늘과 땅이 뒤바뀌어 요괴와 사이한 것들이 아주 많아졌고, 정령이나 도깨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사옵니다. 그러던 차에 홍무제께서 인간 세상에 내려오셔서 제가 요괴와 사이한 것들을 처단하고 붙잡고 해서 그놈들이 먼 곳으로 도망쳐 버렸기 때문에, 지금 이곳은 간신히 평안해졌사옵니다.”
“그 말에 증거가 있는가?”
“삼산가(三山街)에서 약을 파는 하(賀)도사가 증인이옵니다.”
“자세히 얘기해 보시게.”
“하씨 집안은 한나라 말엽 삼국시대부터 남경성 안에 살고 있사옵니다. 약을 파는 그 도사도 제법 영험한 성품이 있어서 낮에는 사람을 치료해주고 밤에는 귀신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어느 정령이 늘 그 집에 찾아가 약을 얻어가곤 하는데, 그게 벌써 삼사십 년이나 되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경 삼점에 그놈이 울면서 찾아와 하도사에게 작별인사를 하더랍니다.
‘선생님, 이제 더 이상 약을 가지러 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니 왜 그런 말씀을 하시오?’ 하고 물었더니, 이러더랍니다.
‘이제 홍무제께서 세상을 다스리게 되셔서 하늘나라 누금천성(婁金天星)께서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각 지역의 성황신(城隍神)들로 하여금 해당 지역의 대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악한 존재라서 정의로운 존재를 이기지 못하니 어떻게 다시 대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정령이 사라져 버렸다 하옵니다. 그러니 이게 제가 임무를 수행한 증거가 아니겠사옵니까?”
“알고 보니 그대는 성황보살(城隍菩薩)이셨구먼!”
“예, 그렇사옵니다.”
“그럼 성명이 어찌 되시는가?”
“저는 기신(紀信)이라 하옵니다.”
“천하에 그 이름을 가진 이가 그대밖에 없는가?”
“이 강동문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든 성황신은 성이 기씨이옵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해외 동서남북의 오랑캐들과 모든 나라, 온 세상의 사당에 있는 성황신들은 모두 성이 기씨여야 하옵니다.”
이 얘기를 마치기도 전에 또 한 명의 신이 나타났는데, 그 역시 검은 두건에 붉은 장삼을 입고, 황금 허리띠를 매고, 손에는 칼 대신에 상아로 만든 홀판을 들고 있었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말조심하시오!”
그러자 기신이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중국뿐만 아니라 해외의 모든 성황신들의 성이 기씨라고 하지 않았소!”
“아니 그게 아니라는 말씀이오?”
“중국이니 해외는 말할 것도 없고, 바로 지척에 기씨가 아닌 성황신이 하나 있단 말이오!”
기신이 화를 버럭 내며 소리쳤다.
“너는 누구인데 감히 내 흉내를 내며 찾아와 내 말을 끊는 것이냐?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 바로 지척에 정말 기씨가 아닌 성황신이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네놈에게 내 상아 홀판의 맛을 보여주마!”
“성미도 급하시군! 목소리 크다고 말이 맞는 건 아니라는 속담도 있고, 또 여기 계신 부처님께서 공덕을 증명해주실 거요.”
이에 벽봉장로가 말했다.
“서로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 각자 자기 얘기를 해 보면 자연히 공평한 결론이 나지 않겠는가?”
그러자 기신이 새로 나타난 이에게 말했다.
“그럼 여러 말 할 것 없이, 지척에 있다는 그 기씨가 아닌 성황신이 누구인지 얘기해 봐라.”
“한 가지 물어봅시다. 응천부(應天府)에서 관할하는 현(縣)이 몇 개인지 아시오?”
“일곱 개지.”
“그 가운데 율수현(溧水縣)이 있지요?”
“그렇지.”
“그곳 성황신의 성이 뭐죠?”
“전부 기씨야.”
“아니네요.”
“기씨라니까!”
“아니거든요!”
둘이 모두 지려하지 않자 벽봉장로가 말했다.
“둘의 얘기는 모두 신빙성이 없구먼. 기씨라고 주장하는 쪽은 그 유래를 얘기해 보고, 반대편도 유래를 얘기해 보시게.”
율수현의 성황신이 정말 기씨인지 아닌지, 그리고 기신은 왜 성황신의 성이 모두 기씨라고 하고, 반대편이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회를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