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할배>라는 TV 오락 프로그램으로 대만이 반짝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대만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싼 값에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곳? 사실 우리에게는 어떤 나라를 생각하면 그 나라에 대한 이미지까지 함께 떠올리는 버릇이 있다. 미국, 중국, 일본, 프랑스… 등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대만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대만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이 쌓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륙 중국과 수교하기 전까지만 해도 ‘중화민국’으로서 우리의 열렬한 우방이었지만, 그 관계가 대체로 위에서 아래로 만들어진 탑-다운 방식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대만은 우리와 여러 모로 비슷한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 통치를 겪었던 일, 사회주의 진영과의 대치 상황,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던 경제 성장 등이 모두 그렇다. 만일 우리가 더 자세히 대만을 알아간다면, 우리의 ‘중국’ 이해는 그만큼 깊이를 더할 것이다.
여기 대만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감독이 있다. 허우샤오시안(侯孝賢)은 장년의 나이에도 왕성한 기력으로 영화를 찍고 있는 대만의 대표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1980년대 중반, 대만 영화가 그렇고 그런 전통과 정부의 규제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오늘의 대만’을 보여주겠다는 방향을 설정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들은 세계영화사에서 대만의 ‘신랑차오’(新浪潮), 즉 ‘뉴웨이브’라고 불리면서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거의 한 세대만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만 영화의 부침과 영욕을 함께 했다.
허우샤오시안은 여전히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젊은 대만을 영화로 찍고 있지만, 가장 깊은 인상으로 대만을 고민하게 해 준 영화라면 역시 <비정성시>(非情城市)를 꼽아야 할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선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는 라디오 뉴스가 들려온다. 51년 동안 계속된 식민의 역사가 끝나는 바로 그 날, 린(林) 씨 집안에는 장손이 태어나는 겹경사를 맞는다. 네 아들 중 막내였던 원칭은 어려서 청력을 잃고 사진관에서 일을 한다. 일본이 물러 간 대만에는 국민당 군대가 주둔하여 통치를 시작한다. 많은 대만인들은 국민당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원칭의 친구인 콴룽(寬榮)도 그 중 하나였다. 원칭은 콴룽의 반정부 활동을 음으로 양으로 돕기 시작한다. 그러나 국민당 정권의 부패로 정치적, 경제적 혼란으로 빠진 대만 사회는 씻을 수 없는 역사적 아픔을 맛보게 된다. 바로 ‘2․28사건’이다.
2․28은 6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오늘의 대만 사회를 이해하는 뿌리 같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의 한 여인이 전매 정책이 실시되고 있던 담배를 개인적으로 판매하다가 국민당 군인에게 적발되어 폭행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소식은 순식간에 대만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이튿날 타이베이 시민들을 중심으로 파업과 시위가 일어난다. 대만성(省) 행정부 수장에게 항의하는 시민들은 오히려 총격을 입게 되고 급기야 사건은 되돌릴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 대륙에서 궁지에 몰리고 있던 국민당 정부는 이 사건을 대만 내 영향력을 확고히 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결국 사건을 빌미로 수많은 반정부 인사들이 숙청되기에 이르렀다. 사상자 수에 관한 통계도 수백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를 정도로 여전히 분분하다.
분명한 사실은 이 사건으로 인해 대만 내에서 원래부터 살고 있던 ‘대만인’과 대륙에서 건너온 이주민들, 즉 ‘외성인’(外省人) 간의 갈등이 심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오늘의 대만을 설명하면서 국민당 혹은 민진당을 지지하는 정치적 성향의 문제, 대만 독립과 통일의 문제를 대하는 이념적 태도, 북부 지역과 남부 지역 간의 사회적 차이, 나아가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 등에 관한 문제들을 말할 때, 그 기원은 모두 이 사건으로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칭의 네 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비정성시>는 2․28사건을 계기로 벌어지는 대만 현대사의 아픔과 슬픔을 한 가족의 운명을 통해서 보여준다. 원칭의 첫째 형인 원시웅(文雄)과 셋째 형인 원량(文良)은 일제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가까스로 석방된다. 그러나 첫째 형은 도박장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총을 맞아 죽고, 일본인을 위해 통역을 해 주었던 셋째 형은 정신이상이 되고 만다. 소식이 두절됐던 둘째 형 원썬(文森)의 사망통지는 유언이 적힌 천 조각으로 날아든다. 원칭은 이로 인해 반정부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한편,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지만 결국 체포되어 생사불명의 처지에 이르고 만다.
영화가 엔딩 크레딧에 이르면, 가슴은 먹먹해진다. 영화가 저 멀리 있는 남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문득 떠오른다. 우리가 겪었던 아프고 슬픈 현대사를, 대만 사회도 겪었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대만을 더 잘 알아야 하는 까닭이다.
허우샤오시안은…
대만영화의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감독. 1947년 광둥성(廣東省)에서 태어나 이듬해에 대만으로 건너와 자랐다.
대만예술대학(臺灣藝術大學)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영화계에서 시나리오, 조감독 등으로 실력을 닦았다. 34살 되던 해에 데뷔작 <귀여운 그녀>(就是溜溜的她)로 입봉했다.
발군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한 건 1983년의 옴니버스 영화 <샌드위치맨>(兒子的大玩偶)가 대만영화의 ‘신랑차오’(新浪潮)를 이끈 수작으로 평가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비정성시>가 베니스영화제 금사자자상을 수상하는 등 대만 현대사와 청춘의 고민을 다룬 영화들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대표작 <펑쿠이에서 온 소년>(風櫃來的人), <동동의 여름방학>(冬冬的假期), <어린 시절 이야기>(童年往事), <연연풍진>(戀戀風塵), <희몽인생>(戱夢人生), <호남호녀>(好男好女), <남국재견>(南國再見), <해상화>(海上花), <밀레니엄 맘보>(千禧曼波), <카페 뤼미에르>(咖啡時光), <빨간 풍선>(紅氣球)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