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자어림裴子語林』1
婁護1), 字君卿, 歷游五侯之門. 每旦, 五侯家遺餉之. 君卿口厭滋味, 乃試合五侯所餉之鯖而食, 甚美. 世所謂五侯鯖, 君卿所致.『書鈔』引作君卿之爲也. 『廣記』二百三十四,, 『北堂書鈔』一百四十五.
러우후婁護는 자가 쥔칭君卿으로 다섯 제후의 가문과 두루 교유하였다. 매일 아침이면 다섯 제후의 가문에서 그에게 음식을 보냈다. 쥔칭은 [그 음식의] 맛에 질려서 시험 삼아 다섯 제후가 보내온 [생선과 고기를 섞어 조리한] 요리를 합쳐서 먹었더니 대단히 맛있었다. 세상에서 말하는 ‘오후정五侯鯖’이라는 요리는 쥔칭에게서 비롯된 것이다.『서초』에는 ‘쥔칭이 한 것이다’로 되어 있다. 『태평광기』 234, 『북당서초』145.
胡廣本姓黃, 五月生, 父母置諸甕中投之於江, 胡翁見甕流下, 聞有小兒啼聲, 往取, 因以爲子, 遂登三司[1].『御覽』四百八十八 廣後不治本親服, 世以爲譏.『御覽』三百八十八
후광胡廣은 원래의 성이 황 씨로 5월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가 그를 독에 넣고 강에 던졌는데, 후 [씨 성바지] 노인이 독이 강물에 흘러가는 것을 보다가 어린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독을 건져내어 그를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마침내 나중에 [후광은] 삼사三司의 관직에 올랐다.『태평어람』 488. 나중에 후광은 본래의 부친상을 당하고도 상복을 입지 않았기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였다.『태평어람(太平御覽)』388.
.張衡之初死, 蔡邕母胎孚, 此二人才貌相類, 時人云: “邕是衡之後身.”『御覽』三百六十, 又三百九十六, 『六帖』二十一.
장헝이 막 죽었을 때, 차이융의 어머니가 임신했는데, 장헝과 차이융은 재주와 용모가 매우 비슷했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차이융은 장헝이 환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태평어람』 360․396, 『육첩』 21.
陳元方遭父喪, 形體骨立, 母哀之, 以錦被蒙其上, 郭林宗往弔, 見錦被而責之. 賓客絶百許日.『御覽』五百十一百十五, 『事類賦注』十
천위안팡陳元方이 부친상을 당해 [그 슬픔으로 인해] 몰골이 앙상하게 야위자 그 어머니가 그것을 불쌍하게 여겨 비단이불로 그의 몸을 덮어주었다. 궈린쭝郭林宗이 조문을 하러 왔다가 [천위안팡이] 비단 이불을 덮은 것을 보고 그를 꾸짖었다. [그로 인해] 빈객들이 백여 일이 나 [발길을] 끊었다.『태평어람』 561․815, 『사류부주(事類賦注)』 10.
傅信字子思, 遭父喪, 哀働骨立, 母憐之, 竊以錦被蒙其上. 林宗往弔之, 見被, 謂之曰: “卿海內之俊, 四方是則; 如何當喪, 錦被蒙上?” 郭奮衣而去. 自後賓客絶百許日.『御覽』七百七
푸신傅信의 자는 쯔쓰子思인데, 부친상을 당해 애통해하다가 앙상하게 야위었다. 그의 어머니가 불쌍히 여겨 몰래 비단이불로 그의 몸을 덮어주었다. 궈린쭝이 조문하러 왔다가 비단이불을 보고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천하의 준걸로 사방의 인사들이 모범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어찌 상을 당하고는 비단이불을 덮고 있는가?” 궈린쭝은 옷깃을 떨치고 가버렸다. 그 뒤로 빈객들이 백 여 일간이나 발길을 끊었다.『태평어람』 707.
傅信忿母,二字御覽一引作貧, 母贏病, 恒驚悖, 傅信乃取鷄梟 滅毛, 施於承塵上; 行落地, 母輒恐怖.『書鈔』一百三十二,『御覽』七百一, 又 九百五十一.
푸신이 그의 어머니에게 화를 냈더니『태평어람』에는 두 글자[가운데 ’忿‘자]가 ‘貧’으로 되어 있다., [그의] 어머니는 급기야 병에 걸려 항상 놀라 어지러움증이 생겼다. 이에 푸신이 닭을 잡아 털을 뽑고 천장위에 올려 두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것을 행하니 어머니가 문득 두려워하였다.『서초』 132, 『태평어람』 701. 951.
鄭玄[2]在馬融[3]門下, 三年不得見, 令高足弟子傳授而已, 融嘗算渾天[4]不合, 召鄭玄, 令一算, 便決, 衆咸駭服.『御覽』七十五及玄業成辭歸, 融心忌焉, 玄亦疑有追者, 乃坐橋下, 在水上, 據屣. 融果轉式[5], 欲勅追之, 告左右曰: “玄在土下, 在水上, 據木, 此必死矣.” 遂罷追.『御覽』三百九十二.竟以免.『御覽』六百九十八.
정쉬안鄭玄은 마룽馬融의 문하에 있었는데, 삼년동안 만날 수 없었고, 수제자로 하여금 [학문을] 전수하게 할 따름이었다. 마룽이 일찍이 혼천渾天을 계산하다가 잘 들어맞지 않자 정쉬안을 불러 한번 계산하도록 했더니 곧 해결이 되었기에 모든 사람이 놀라 탄복했다.『태평어람』 75. 정쉬안이 학업을 이루고 집으로 돌아가겠노라고 인사를 하자 마룽은 마음속으로 그를 시기하였다. 정쉬안 역시 뒤쫓는 자가 있을 것을 의심하여 다리 밑에 앉아 물 위에서 나막신에 의지하고 있었다. 마룽은 과연 점판을 돌려 보면서 그를 뒤쫓으라는 지시를 하려다가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정쉬안은 땅 아래, 물 위에 의지해 있으니 이것은 반드시 죽은 것이다.” 그리고는 뒤쫓는 것을 그만 두게 하였다.『태평어람』 392. [정쉬안은] 마침내 [위기를] 모면했다.『태평어람』 698.
孔嵩字仲山, 南陽人也, 少與潁川荀彧[6]未冠時共遊太學, 彧後爲荊州刺史, 而嵩家貧, 與新野里客傭爲卒. 彧時出, 見嵩, 下駕, 執手曰: “昔與子搖扇俱遊太學, 今子爲卒, 吾亦痛哉!” 彧命代嵩, 嵩以傭夫不去. 其歲寒心若此. 嵩後 三府累請, 辭不赴, 後漢時人.『類林雜說』五. 案:首尾皆王朋壽語.
쿵쑹孔嵩은 자가 중산仲山으로 난양南陽 사람이다. [쿵쑹은] 젊은 시절 잉촨潁川 사람 쉰위荀彧가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았을 때 함께 태학太學에서 공부했다. 쉰위는 나중에 징저우荊州 자사가 되었는데, 쿵쑹은 집안이 가난하였으므로 신예新野의 아리阿里의 [타지에서 용인 노릇하는] 객용客傭으로 병졸 노릇을 했다. 쉰위가 그떼 외출하다가 쿵쑹을 보고는 수레에서 내려 그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옛적에 그대와 더불어 부채를 흔들며 함께 태학을 다녔건만 지금 자네는 병졸이 되었으니 나 역시 통절하네.” 쉰위가 명령을 내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쿵쑹[의 일을] 대신하도록 하였으므로 쿵쑹은 하인으로 가지 않게 되었다. 그해에는 [쿵쑹의 처지가] 이와 같이 한심했다. 나중에 삼부三府[7]에서 누차 청을 했지만, 쿵쑹은 사양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후한 때의 인물이다.『유림잡설』5, 안컨대 첫머리와 끝 부분은 모두 왕펑서우王朋壽의 말이다.
魏郡太守陳異嘗詣郡民尹方, 方被頭, 以水洗盤, 抱小兒出, 更無餘言. 異曰: “被頭者, 欲吾治民如理髮; 洗盤者, 欲使吾淸如水; 抱小兒者, 欲吾愛民如子也.”『御覽』三百六十四.
웨이 군魏郡 태수 천이陳異가 일찍이 군의 백성 인팡尹方을 배알했는데, 인팡은 머리를 감싸고 물로 대야를 씻더니 아이를 안고 나가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천이가 말했다. “머리를 감싼 것은 내가 백성들을 다스리되 마치 머리손질 하듯 하라는 것이고, 대야를 씻은 것은 내가 마치 물처럼 청렴 하라는 것이고, 아이를 안은 것은 내가 백성 사랑하기를 아이 돌보듯 하라는 것이다.”『태평어람』 364.
[1] 삼사라는 관직은 왕조 별로 다양한 의미를 갖는데, 동한 때에는 태위太尉, 사공司空, 사도司徒를 삼사三司라 하였다.
[2] 정쉬안鄭玄(127∼200년)은 후한 때의 유학자로 자는 캉청康成이고, 가오미高密 사람이다. 마룽馬融에게 경학을 배웠으며 경서 해석의 대가로 『주역周易』, 『모시毛詩』, 『예기禮記』,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을 주해했다.
[3] 마룽馬融(79∼166년)은 후한 때의 유학자로 자는 지창季長이고, 교서랑校書郞과 남군 태수南郡太守 등을 지냈으며 한나라 말에 쇠퇴해가던 유학의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시킨 대학자이다. 수많은 고전에 주석을 가하여 훈고학을 시작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의 문하에 정쉬안鄭玄, 루즈盧植 등의 유명한 학자들이 있었다.
[4] 혼천渾天은 혼천설이라 하며, 개천설蓋天說과 더불어 중국의 대표적인 우주관의 하나이다. 천지를 달걀에 비유하여 하늘은 밖에서 노른자위에서 해당하는 땅을 싸고 있으면서 일주日周 운동을 행하고, 알껍데기의 겉면에는 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이 설의 기원은 혼천의渾天儀의 출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개천설보다는 좀 더 진보된 간단한 천동설이다.
[5] ‘식式’은 원래 ‘계戒’로 되어 있으나 『세설世說』 문학편과 송본 『어람御覽』 698에 의거해 ‘式’으로 고쳤다.(魯迅, 『魯迅輯錄古籍叢編』第1卷, 人民文學出版社, 1999年. 9쪽) ‘식式’은 ‘식栻’과 통하며 점을 치는 나무판이다.
[6] 쉰위荀彧(163∼212년)는 후한 말기 차오차오曹操의 책사로 자는 원뤄文若이다. 잉촨 군潁川郡 잉인 현潁陰縣(지금의 허난河南 쉬창 시許昌市) 사람이다. 조부 쉬수荀淑는 순자荀子의 11세손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부친 쉰군荀緄과 숙부 쉰솽荀爽도 모두 명망이 높은 명문가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황제를 보좌할 재목으로 여겨졌으며, 가족과 함께 위안사오袁紹에게 큰 대접을 받았으나 위안사오가 인물이 아님을 인지하고 차오차오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책사가 된다. 이후 타오쳰陶謙 정벌에 나선 차오차오를 대신하여 도성을 지키던 중 반란이 발생하였으나 도성을 잘 지켜냈다. 196년 쉰위는 차오차오로 하여금 쫓기는 몸이 된 후한의 황제 헌제를 받아들이도록 조언하였으며 차오차오는 한나라의 대장군으로 승진하고 쉰위는 시중, 상서령으로 승진되었다. 이 일로 차오차오는 천하 쟁취의 기반을 쌓게 되었다. 재능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인재의 선발에도 탁월하여 차오차오의 신임을 받는다. 위안사오와 대치 상황에서 다른 측근들은 모두 승산이 없다고 하였으나 쉰위는 서신으로 차오차오를 설득하고 마음을 돌리게 하여 결국은 기습으로 역공하여 위안사오의 군사들을 물리친다. 그러나 한 왕조의 지속을 원하는 쉰위와 천하를 차지하려는 차오차오 사이에는 틈이 생기게 되며 손권 정벌에 시중 광록대부로 참전하는 와중에 병을 얻어 50세로 사망한다. 그러나 참전 중인 쉰위에게 차오차오가 보낸 위문 물품함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전달되고, 이를 두고 순욱는 서로 예만 갖추는 마음은 없는 사이임을 깨닫고는 독을 마시고 자결했다는 설도 있다.
[7] 한대에는 사마司馬, 사도司徒, 사공司空의 직책을 일러 ‘삼공三公’이라 했는데, 모두 ‘부府’를 열었으므로 ‘삼공’을 ‘삼부三府’라 칭했다. 후대에는 국가의 최고 행정 장관을 범칭하는 용어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