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대장정 3 – 참패, 핏물로 범람한 샹강 3

참패의 현장 싱안을 둘러본 후 구이린桂林 시내로 이동했다. 구이린에서는 동반자가 교대하기로 했다. 답사 14일째 인천에서 구이린으로 오는 비행기에는 최치영 사장과 정일섭 교수가 타고 있었고, 그 비행기가 돌아갈 때 황인성 교수는 귀국할 예정이었다. 황인성 교수는 상하이에서 시작해 대장정의 내륙 코스로 이어지는 2주간의 답사를 마치고 아쉬움을 남기고 귀국했다. 답사 일행은 기사까지 5명으로 늘어났다.

답사 15일째, 우리는 홍군의 대장정 코스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룽성龍勝으로 갔다. 광시, 구이저우, 윈난으로 이어지는 중국 서남부에는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 샹강 전투의 참혹한 현장을 이틀이나 둘러봤으니 잠시 쉬어갈 겸 소수민족 마을에서 이국적인 정취에 젖어보기로 했다.

룽성은 좡족壯族과 야오족瑤族이 사는 산골이다. 계단식 논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중국에 사는 좡족은 1700만여 명으로, 광시는 좡족의 자치구다. 옛날에는 남월南越이라 불렀고, 송대 이후 1949년까지는 좡족僮族이라 표기했다. ‘僮’은 족칭에서는 ‘좡(zhuang)’이라 읽지만 일반적으로 ‘퉁(tong)’이라 읽기도 한다. 그러나 ‘퉁’은 ‘어린아이’ 또는 ‘종’이란 뜻이므로 어감이 좋지 않다. 이를 감안하여 1965년 저우언라이가 제의하여 ‘훌륭하다’, ‘장하다’는 뜻의 ‘壯’으로 바꾸었다. 전통시대 중국에서는 소수민족의 족칭을 음역하여 한자로 표기하면서, 벌레(남만의 만蠻)나 짐승(서융의 융狄), 더럽다(예맥의 예濊), 비천하다(선비의 비卑), 노예(흉노의 노奴)와 같은 비칭을 사용한 것이 많다.

좡족은 중국 남부 도작문화稻作文化의 주인공이다. 경사가 심한 산비탈에 촘촘하게 계단식 논을 만들어 산 위의 물을 끌어다 벼농사를 지어온 것이다.

룽성의 계단식 논은 가파른 소로를 타고 올라가야 볼 수 있다. 쌀농사를 산꼭대기까지 끌고 간 수백 년의 노고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지역의 시골집은 전통적인 조각루가 대부분이다. 가파른 경사에 나무기둥을 세워 몸체를 받치는 방식으로 지은 집이다. 룽성에서 만난 좡족, 야오족은 물론 이후에 만나게 되는 먀오족, 둥족의 집들도 대동소이하다

중국 서남부의 전통적인 간란식干闌式 주택도 눈길을 끈다. 간란식은 집을 반층 정도 올려서 짓는 것을 말한다. 비가 많이 내리고 습도가 높은 지방에서 자주 보는 건축 양식으로, 습기를 막고 동물이나 벌레 등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룽성 같은 지방에서는 가파른 경사면에 기대어 기둥을 세워 지탱하는 모양이라 해서 조각루弔脚樓라고도 부른다. 허술한 1층은 축사나 창고로 쓰고, 2층은 일상적인 생활공간으로 사용한다. 3층은 주로 저장 공간으로 사용한다. 출입문은 골목과 지형에 맞춰 1층이나 2층으로 연결하는데, 대부분 문짝이 없다. 닭이나 오리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무릎 높이의 가림 문을 설치하는 정도다.

재미있는 것은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2층의 당옥堂屋이다. 간란주택은 공간을 나눠서 사용하기 때문에 당옥 역시 2층 중앙의 한 공간을 차지한다. 당옥에는 조상의 위패를 모시기도 하지만, 커다란 마오쩌둥 초상화를 건 집도 많다. 관공서도 아닌 일반 가정집에 웬 마오쩌둥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중국인에게 마오쩌둥은 잘잘못을 따지는 대상이 아닌, 신중국을 세운 국부國父로 인식되는 게 보통이다.

룽성에서는 계단식 논이 장관이다. 산 위에 오르면 계단식 논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의 허름한 식당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마을 뒷산을 오르기로 했다. 어느 방향이든 산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오게 마련이다. 산길을 따라 오르자 계단식 논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경사가 50도 되는 곳에도 논이 있었다. 폭 1미터의 논 뒤로 높이 1~2미터의 흙벽이 있고, 그 위에 다시 폭 좁은 논이 이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논이 산비탈을 덮고 있다.

야오족 모자가 운영하는 객잔에서 맛본 토종닭 훠궈. 광시 북부나 구이저우, 윈난의 시골에서는 우리의 닭백숙과 비슷한 닭 훠궈를 많이 먹는다. 이곳에서도 양계장에서 기른 육계에비해 시골집에서 놓아 기른 토종닭이 훨씬 비싸다.

계단식 논 사이로 난 좁은 산길을 오르다 보면, 한 뼘의 논을 얻기 위해 수백 년 동안 대를 이어 쏟아온 그들의 노고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이 마을의 계단식 논은 원대元代에 일구기 시작해 오늘에 이른 것으로 7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대지의 예술, 노동의 예술이란 말로 묘사하기도 하는데, 예술이라 말하기엔 수백 년의 노고가 너무나 측은하다고나 할까.

계단식 논은 봄에 모내기 전 물을 담았을 때, 모내기를 할 때, 가을에 황금빛이 되었을 때, 추수할 때 각기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산골마을에 하루 유숙하면서 이른 아침 햇살이 부서지는 계단식 논을, 그 위에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과 안개를, 능선으로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고, 여전히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그들의 일상을 느껴보는 것도 꽤나 아름다운 여행이다.

핑안平安이라고 하는 좡족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객잔에 숙소를 정했다. 20대 후반의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운영하는 숙소였다. 창문을 열면 계단식 논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계단식 논이 이제는 관광상품이 된 탓에 농사보다 수익이 좋은 객잔으로 돌아섰다. 주인 아들이 만들어온 토종닭 훠궈火鍋(샤브샤브)는 맛이 일품이었다. 독한 백주를 한잔 곁들이니 속세의 번잡함이나 과거 역사의 무게는 물론이요, 여행의 긴장과 피로까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창밖에 걸린 하현달이 은근한 취기를 타고 동화 속에 들어온 듯 정겨운 밤이었다.

다음 날인 답사 17일째 다시 대장정 답사 코스로 복귀했다. 중앙홍군은 광시 북단의 마오얼산을 넘은 다음 서북쪽으로 행군해서 후난성 서남단의 퉁다오通道를 거쳐 구이저우성 동쪽 끝자락인 리핑黎平으로 갔다. 퉁다오는 광시, 후난, 구이저우 3개의 성이 만나는 곳이다. 퉁다오라는 지명 그대로 교통의 요지였다. 룽성에서 퉁다오까지는 100킬로미터가 조금 안 되는 거리, 그곳에서 40킬로미터를 더 가면 퉁다오 전병회의轉兵會議가 열렸던 공성서원恭城書院이 있다. 이날은 퉁다오까지 이동하고, 답사 18일째에 공성서원을 거쳐 구이저우의 리핑까지 가기로 했다.

퉁다오 전병회지 입구. 홍군이 이곳에서 북으로 행군하여 후난으로 가지 않고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구이저우로 들어간 것을 ‘전병’이라고 한다

차가 퉁다오현 시내로 들어서는데 불쑥 솟은 기이한 암봉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다음 날 아침 암봉을 올랐다. 이름은 독암獨岩. 몸통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봉우리 부분은 둥근 밥사발을 엎어놓은 모양새다. 주변의 호수 위로 물안개가 피어올라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가파른 길을 올라보니 또 다른 장관이 펼쳐졌다.

마오얼산을 넘어 국부군의 추격권을 벗어난 중앙홍군은 거친 숨을 돌리면서 퉁다오에 도착했다. 이때 중앙홍군에는 중앙소비에트를 버리고 떠나온 데 이어 샹강 전투의 참패로 인한 암울한 자괴감이 원혼처럼 떠돌고 있었다.

보구와 오토 브라운, 저우언라이 3인단을 지도자로 삼아 밤낮으로 강행군을 해왔으나, 샹강 전투에서 동지들을 3분의 2나 잃어버리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국부군의 1~4차 토벌전에서는 상당한 전리품을 거둬들이면서 승리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5차 토벌전부터 계속 밀리면서 심각한 위기에 빠졌던 것이다. 이것은 당 중앙 3인단의 리더십의 위기이기도 했다. 뤄밍 노선을 주장한 100여 명의 간부를 징계하고 왕밍 노선을 밀어붙였으며, 유격전을 소심한 우경 기회주의라고 깎아내리면서 국부군과 전면전을 벌였는데 탈주와 참패로 귀결되었으니 위기의식과 함께 회의가 들만도 했다.

퉁다오 시내에 있는 독암의 새벽 풍경. 기이한 계림산수가 새벽 물안개와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다

중앙국 회의에 상당 기간 참석하지 못했고, 행정부 주석이지만 실권이 없고, 홍군에 대한 지휘권도 없었던 마오쩌둥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장원톈과 왕자샹王稼祥이 바로 그들이었다. 왕자샹은 모스크바 중산대학 출신으로 보구와 친분이 있었다. 국부군의 4차 토벌전 때 복부에 총상을 입고 대장정 초기의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들것 신세가 되었다. 장원톈은 1933년까지 상하이에서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중앙소비에트로 들어온 인물이었다. 일본과 미국 유학을 한 뒤 귀국했다가 다시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들어갔다.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는 인민위원회 주석에 선출되는 등 대장정 당시 공산당 최고 책임자였던 보구와 함께 모스크바 그룹의 핵심인물이었다.

장원톈과 왕자샹은 마오쩌둥과 자연스레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인맥이나 출신 배경이 마오쩌둥과 달랐고, 게다가 왕밍 노선에 속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특정인이나 특정 파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다. 유격전이나 전략전이에 대해 마오쩌둥의 의견에 공감하게 되었다. 훗날 이들을 보구, 오토 브라운, 저우언라이의 당 중앙 3인단에 견주어 재야 3인단 또는 들것 3인단이라고 불렀다.

또 하나의 우연이 마오쩌둥에게 미소를 보냈다. 대장정 출발 한 달 전에 코민테른과 비밀 통신을 주고받던 상하이의 무선통신 조직이 국민당 경찰에게 체포되어 와해되었다. 이로써 대장정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국 공산당과 코민테른 사이에 연락이 두절되었다. 당시 코민테른과의 국제 공조에 의존하고 있던 보구와 오토 브라운에게는 나쁜 징조였다.

수만 명의 동지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참패, 보구와 오토 브라운의 좌절, 코민테른과의 연락 두절, 공산당 중앙의 리더십에 대한 회의, 재야 3인단 사이에 형성된 공감대 속에서 중앙홍군은 퉁다오에 도착했다. 퉁다오通道, 지명 그대로 중앙홍군은 이곳에서 새로운 출구를 모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