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죽음이 있다.
그 중에서 오직 정영․공손저구의 죽음,[1] 기신[2]․난포[3]의 죽음, 섭정의 죽음,[4] 굴평의 죽음[5]만이 천하에서 첫째 가는 좋은 죽음이다.
그 다음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요, 그 다음은 굴복하지 않고 죽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죽는 것은 용감한 것이지만, 적을 헤아려보지 않고 나선 잘못을 면할 수 없다. 계로[6]와 같은 경우이다. 굴복하지 않고 죽는 것은 의로운 것이지만, 남에게 제압 당한 것에 대한 한이 없을 수 없다. 수양[7]과 같은 경우이다. 이 두 경우는 비록 첫째 다음으로 좋은 죽음이라지만, 사실 이들의 죽음 역시 모두 열렬한 장부의 죽음이요, 비범한 것이다.
또 그 다음은 충성을 다하다 참소를 당하여 죽는 것이다. 초(楚)나라의 오자서,[8] 한(漢)나라의 조착[9]과 같은 경우이다. 이들은 자기의 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니, 지혜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또 그 다음은 공을 이뤄 이름을 남겼으나 결국은 죽임을 당한 경우이다. 진(秦)나라의 상군,[10] 초(楚)나라의 오기,[11] 월(越)나라의 대부(大夫) 종(種)[12]과 같은 경우이다. 이들은 어느 정도에서 만족하고 멈출 줄을 몰랐으니, 역시 지혜롭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경우는 비록 앞의 두 가지 죽음보다 또 그 다음으로 좋은 죽음이라지만, 왕에게 이미 충성을 다했으니, 비록 죽어도 영예가 있는 것이고, 천하에 큰 공을 이루고 만세에 영예로운 이름을 세웠으니, 비록 죽어도 무슨 마음 아플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섯 가지 중에서 어떤 죽음에 처할 것인지 잘 살펴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우열이 있다고 해도, 똑같이 좋은 죽음이다.
방 안의 걸상에 병들어 누워 있으면서, 처자식 곁에서만 맴돌다가 죽어가는 것, 천하에 깔린 것이 다 이 경우이다. 이는 평범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의 상식적인 경우로, 옳은 죽음의 방식이 아니다. 어찌 대장부가 이런 죽음을 달갑게 여기리오?
비록 그렇지만, 죽음에 임하여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시를 읊고 지팡이를 짚고 작별을 고하며, 스스로 자기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더러 아무 미련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낫다. 대개 세속에서 보면, ‘자기의 죽음을 준비한다’고 지나치게 미담으로 과장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이 명예를 좋아하여 거짓말을 일삼는 것은 평범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이 순순히 자연의 올바른 이치를 받아들여서 자연스럽게 죽는 것보다도 도리어 못하다. 그저 조용히 창 밑에서 죽어 가는 것과 똑같을 뿐이니, 그 모습에서 무슨 절의를 볼 수 있으며, 그 모습에서 무슨 장렬함을 볼 수 있다 하여, 헛되이 그렇게 쓸모 없는 명성에 힘쓰는가?
장부가 태어난 것은 원래 까닭 없이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 죽음 또한 까닭 없이 죽는 것을 어찌 받아들이겠는가? 장부가 태어난 것이 이유가 있으면 죽을 때는 또한 반드시 무언가 해놓은 것이 있어야 한다. 고요하고 적적하게 병상의 이불 사이에 누워 있다가, 관에 넣어져 상여에 실려가서, 북망산 밑에 묻히면 이것을 제대로 죽을 곳을 찾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순(舜)은 남순(南巡)하는 도중에 머나먼 창오(蒼梧)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에 시신이 묻혔고, 하(夏)나라를 창건한 우(禹)는 제후들을 강남(江南)에 모이게 하여 가던 도중에 회계(會稽)에서 세상을 떠나 그곳에 시신이 묻혔다. 성스럽고 밝은 제왕들도 반드시 그 죽음에 연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는가?
다만 나는 늙어서, 이제까지 말한 다섯 가지와 같이 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다섯 가지 중의 하나처럼 죽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앞서 말한 헛된 명성이나 쫓는 사람들처럼 죽는 것 또한 영웅 호걸이 취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저 조그만 장사나 할 뿐이다. 큰 거래는 공손저구나 섭정과 같은 것이지만, 나의 경우에는 구매자가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찌 헛되이 침대와 요 사이에서 죽음을 맞이하겠는가? 또한 나는 이미 고향을 떠났고, 종들도 버리고, 곧장 여기로 왔다. 이곳에서 구매자를 찾았는데, 이곳에도 내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내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또한 어찌 죽겠는가? 나는 이제 큰 거래는 성사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영웅 호걸은 분노를 내비치지 않는 법이다. 내가 그를 위해 죽을 만큼 내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은 이미 없으니, 나는 장차 내 값어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곁에서 죽음으로써 분노를 내비칠 것이다.
삼가 이 글을 써서, 겉으로나마 알아준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알린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보러 온다면, 절대 나의 시신을 거두지 말아라! 이것을 부탁하노라!(권4)
<五死篇>
人有五死,唯是程嬰、公孫杵臼之死,紀信、欒布之死,聶政之死,屈平之死,乃爲天下第一等好死。其次臨陣而死,其次不屈而死。臨陣而死,勇也,未免有不量敵之進,同乎季路;不屈而死,義也,未免有制於人之恨,同乎睢陽。雖曰次之,其實亦皆烈丈。夫之死也,非凡流也。又其次則爲盡忠被讒而死,如楚之伍子胥、漢之鼌錯是矣,是為不知其君,其名曰不智。又其次則爲功成名遂而死,如秦之商君、楚之吳起、越之大夫種是矣,是爲不知止足,其名亦曰不智。雖又次於前兩者,然旣忠於君矣,雖死有榮也;旣成天下之大功矣,立萬世之榮名矣,雖死何傷乎?故智者欲審處死,不可不選擇於五者之間也。縱有優劣,均爲善死。若夫臥病房榻之間,徘徊妻孥之側,滔滔者天下皆是也。此庸夫俗子之所習慣,非死所矣,豈丈夫之所甘死乎?雖然,猶勝於臨終扶病歌詩,杖策辭别,自以謂不怖死,無顧戀者。蓋在世俗觀之,未免誇之爲美談,呼之爲考終。然其好名說謊,反不如庸夫俗子之爲順受其正,自然而死也,等死於牗下耳。何以見其節?又何以見其烈,而徒務此處聲爲邪?丈夫之生,原非無故而生,則其死也又豈容無故而死乎?其生也有由,則其死也必有所爲。未有岑岑寂寂,臥病床褥間,扶柩推輦,埋於北邛之下,然後爲得所死矣。蒼梧殯虞,會稽尸夏,聖帝明王,亦必由之,何況人士歟?第余老矣,欲如以前五者,又不可得矣。夫如此而死,旣已不可得;如彼而死,又非英雄漢子之所爲,然則將何以死乎?計唯有做些小買賣耳。大買賣如公孫杵臼、聶政者,旣不見買主來到,則豈可徒死而死於床褥之間乎?且我已離鄉井,捐童僕,直來求買主於此矣。此間旣無知己,無知己,又何死也?大買賣,我知其做不成也,英雄漢子無。所洩怒,旣無知己可死,吾將死於不知己者,以洩怒也。謹書此以告諸貌稱相知者,聞死來視我,切勿收我屍,是囑。
[1] 춘추시대 진(晉) 나라의 조삭(趙朔)이 살해되었을 때,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는 함께 조삭의 아들을 지키기로 했다가, 도중에 공손저구는 살해되었고, 정영은 무사히 임무를 완수한 뒤에 저승에 있는 공손저구에게 알리겠다며 자살했다.
[2] 항우(項羽)가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포위했을 때, 기신(紀信)은 유방의 활로를 열어주기 위해 자기가 유방인 것처럼 위장해서 성밖으로 나갔다가 불에 타서 죽었다.
[3] 난포(欒布)는 팽월(彭越)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벗이었다. 유방이 팽월(彭越)의 목을 베자, 난포는 금지령을 아랑곳하지 않고 팽월의 머리를 수습하여 장사지냈으며, 그 의리가 유방을 감복시켜서 사면을 받고 등용되었다.
[4] 섭정(聶政)은 전국시대 한(韓) 나라 사람이다. 살인을 저지르고 원수를 피하여, 모친․누이와 함께 제(齊) 나라에서 개백정 노릇을 하며 살았다. 자기를 보살펴 주었던 엄수(嚴遂)가 원수를 갚아줄 것을 부탁하자, 노모가 살아 계시다는 이유로 들어주지 않았는데, 나중에 노모가 세상을 떠나자, 엄수의 원수를 찾아가 죽이고, 상대방 군사에게 포위되자 그 자리에서 자살했다.
[5] 굴평(屈平)은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 굴원(屈原)이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왕에게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도리어 참소를 당하여, 유랑 생활을 하면서 시국을 염려하는 많은 글을 남겼고, 결국 강물에 몸을 던졌다.
[6] 계로(季路)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를 말한다. 용맹하고 신의를 굳게 지키기로 유명했는데,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행동에 옮기는 것이 결점이었다고 한다. 위(衛)나라 대부 공회(孔悝)의 읍재(邑宰)가 되었는데, 위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 휘말리게 되었다. 전투 도중에 관의 끈이 끊어지자 군자는 죽어서도 관을 벗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관을 고쳐 묶고 죽었다고 한다.
[7] 수양(睢陽)은 당대(唐代)의 장순(張巡)을 말한다. 안록산의 난 때 수양성을 열 달 동안 굳게 지켰으나 양식이 떨어지고 원군이 오지 않아, 결국 성은 함락되고 안록산에게 피살되었다.
[8] 오자서(伍子胥)는 이름이 원(員)이고 초(楚)나라 사람이다. 오사(伍奢)의 아들이고 오상(伍尙)의 아우이다. 오사가 참소를 당하여 초나라 평왕(平王)에게 붙잡혔다. 평왕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두 아들을 오게 하였으나 오상만이 와서 부자가 죽임을 당하였다. 오자서는 도망쳐서 오(吳)나라로 가서 왕 합려(闔廬)를 도와서 서쪽으로 강한 초나라를 격파하고, 북쪽으로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를 위협하였으며, 남쪽으로는 월(越)나라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월나라의 왕 구천(句踐)을 포위하였을 때 태재비(太宰嚭)가 화친하자는 주장을 반대하면서 합려와 틀어졌다. 이후 계속해서 태재비가 참소하는 바람에 합려는 칼을 보내서 자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오자서는 죽으면서 나의 눈을 동쪽 성문에 내걸어서 오나라의 멸망을 보리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합려는 시신을 강으로 던져 버렸다.
[9] 조착(鼂錯)은 한나라의 대신으로 경제(景帝) 때에 그가 추진한 가혹한 정책 때문에 원한을 많이 사서, 결국 참소 때문에 참형을 당하였다.
[10] 상군(商君)은 상앙(商鞅)을 말한다. 공손앙(公孫鞅) 또는 위앙(衛鞅)이라고도 부른다. 전국시대 위나라 출신으로 법가의 형명학(刑名學)을 배웠다. 진(秦)나라의 효공(孝公)을 도와서 귀족을 세습적인 특권을 박탈하고, 나라를 부유하게하며, 군대를 강하게 만드는 변법(變法)을 실시하였다. 그의 정책으로 짧은 시간에 진나라는 강국이 되었으나, 연좌제를 실시하여 민심이 각박해지고, 타격을 입은 귀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효공이 죽자 상앙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도망길에 오른 상앙은 자신이 만든 연좌제 때문에 잡혀 들어와 사지가 찢겨지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11] 오기(吳起)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손무(孫武)와 함께 병법의 대가이다. 일찍이 증자(曾子)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노(魯)나라에서 벼슬을 살았다. 노나라에 침공한 제(齊)나라 군대를 격파하였으나 다시 위(魏)나라로 도망가서 문후(文侯)를 도와서 서쪽을 진(秦)나라를 막으며 공을 세웠다. 위나라의 서하수(西河守)로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나 무후(武侯)가 즉위한 다음에 참소를 당하여 또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초(楚)나라 도왕(悼王)의 재상이 되었다. 그는 꼭 필요하지 않은 관직을 없애고, 공로가 없는 사람에게는 봉록을 주지 않는 등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도왕이 죽자 그동안 피해를 입었던 종실과 귀족들이 오기를 공격하여, 도왕 시신에 엎드려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12] 대부 종(種)은 월왕 구천(句踐)의 모사로 오왕 합려(闔廬)와의 강화 조약을 성사시킨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오나라 내부의 의견을 이간질시켜 오자서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그런데 대부 종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