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가 잘려버린 참혹한 패배
80년 전의 그날 이곳 샹강은 참담했다. 홍군은 1934년 11월 하순 샹강을 건너면서 추격군에게 후미를 잡히고 측면으로는 협공을 당하며 허리가 잘리다시피 했다. 홍군은 사투를 벌였으나 결과는 끔찍했다. 겨우 전멸을 면했을 뿐, 8만 6000여 명에서 3만여 명으로 폭삭 줄었다. 샹강에는 시체가 쌓여 핏물이 범람했다. 언덕은 폭격으로 사라지고 시체 언덕들이 새로 생겨났다.
군벌 틈새를 성공적으로 통과했으나
위두하를 건넌 지 한 달여 만에 국부군의 봉쇄선 세 곳을 무사히 돌파한 중앙홍군은 네 번째 봉쇄선에서 장제스의 추격 포위망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그전까지 500여 킬로미터는 순조로웠다. 광둥성 군벌이 길을 내주기로 한 밀약과 장정 노선에 대한 비밀이 잘 유지된 덕분이었다. 홍군의 하급 병사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홍군은 성과 성의 경계 지역을 넘어 서진했다. 출발하자마자 장시-광둥의 경계선을 넘어 후난-광둥의 경계 지대를 지났다. 그런 다음 후난-광시의 경계를 흐르는 샹강을 건너 후난 서북부로 갈 계획이었다.
성의 경계는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틈새였다. 각 지방의 군벌은 장제스의 중앙군과 이해관계가 엇갈렸고, 군벌끼리도 반목과 연합으로 갈렸기 때문에 홍군이 비집고 들어갈 정치적 틈새가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주력 홍군의 탈출을 파악한 장제스는 길길이 날뛰면서 추격을 시작했다. 세 번째 봉쇄선까지는 사실상 말이 봉쇄선이지, 홍군의 주력부대를 저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장제스는 직속 중앙군을 이끌고 후미를 추격하는 한편, 바이충시白崇禧의 광시군을 북으로 이동시키고 허젠의 후난군을 남으로 이동시켰다. 광시에서 후난으로 북상하는 홍군이 샹강을 건너기 전에, 직할 중앙군이 동쪽에서, 광시군과 후난군이 남북에서 협공하려는 것이었다.
장제스의 명령대로 되었다면 중앙홍군은 샹강에서 끝장났을지도 모른다. 마오쩌둥은 재기하지 못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 광시 군벌 바이충시는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본거지를 비운 채 광시성 북부 샹강 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바이충시는 이것이 장제스의 음흉한 계략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장제스의 중앙군이 홍군을 광시 방향으로 몰아붙이고 홍군을 추격한다는 이유로 광시성 깊숙이 들어와서 눌러앉으면 광시성을 통째로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다. 장제스로서는 지방 군벌이 이기면 홍군을 제압하는 셈이 되고, 홍군이 승리해도 지방 군벌 하나를 없애는 것이 되므로 손해 볼 게 없었다. ‘빨갱이’ 토벌전은 장제스에게는 꽃놀이패였다.
바이충시는 결국 홍군이 도착하기 7일 전에 이미 구축한 샹강 포위망을 포기하고 군대를 남쪽으로 후퇴시켰다. 장제스가 무전을 쳐서 당장 복귀하라고 명령했으나 교활한 바이충시는 일부 병력만 다시 보내고는 시치미를 뗐다. 그 결과 취안저우全州부터 싱안까지 30킬로미터의 샹강이 이빨 빠진 빈 공간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북쪽의 후난군은 광시군이 빠져나간 곳으로 급히 군대를 진격시켰다. 그러나 중앙홍군이 한 발 먼저 도착했다. 1934년 11월 25일 홍군 선두가 싱안 부근에 도착해서 도강 지점을 확보한 것이다. 홍군 선두는 강을 건넌 후 강을 따라 북쪽으로 4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취안저우를 점령하려고 했다. 홍군 본대가 도강하는 동안 취안저우의 성에 기대어 남하하는 후난군을 저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난군이 간발의 차이로 취안저우를 먼저 장악했다. 그 바람에 홍군은 불리한 곳에 자리를 잡고 남하하는 후난군의 공격을 막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사지의 입구가 된 샹강
홍군은 취안저우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남쪽으로 싱안의 광화푸光華鋪에서부터 취안저우 남쪽의 빙산屛山이라는 나루터까지 점령하여 샹강 30여 킬로미터를 도강 구간으로 확보했다. 이때가 11월 27일 새벽이었다. 그런데 중앙종대의 행군 속도가 너무 느린 게 문제였다. 중앙종대는 중앙정부와 군사위원회의 인원과 상당한 물자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강 지점을 점령한 지 이틀 뒤인 11월 30일 중앙종대가 샹강에 도착해 그날 황혼 무렵에 도강을 끝냈다.
그러나 중앙종대의 동쪽 후미와 남북 측면의 전세는 이미 심각한 상황이었다. 홍군은 중앙종대의 도강을 엄호하면서 국부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홍군이 중앙종대를 동과 남북 세 방향에서 호위하면서 서쪽으로 강을 건너는 삼각형을 이루었는데, 국부군은 더 큰 삼각형으로 포위하여 공격해온 것이었다.
국부군은 지세가 유리했지만 공격하기가 수월한 것만은 아니었다. 우세한 병력과 화력으로 홍군을 밀어붙였으나 홍군 전사들은 죽는 순간까지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죽이고 또 죽여도 죽지 않는 귀신과 싸우는 듯했다.
중앙종대의 북쪽 측면을 엄호한 홍군 제1군단의 피해는 처절했다. 닷새 밤낮으로 전투가 계속되었고, 중앙종대가 도강을 완료했을 때는 병력의 과반수가 전사한 뒤였다. 이후 제1군단도 전투를 하면서 서서히 철수하기 시작했다. 천하의 명장이라는 린뱌오林彪와 쭤취안左權은 지휘소까지 탈취당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포로가 될 뻔했다. 이 전투는 그야말로 중앙종대의 도강을 위해 홍군 전사들을 그 자리에서 차례대로 희생시킨 죽음의 작전이었다.
남쪽 측면을 엄호한 제3군단도 이틀 밤낮을 탁 트인 개활지에서 광시군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화력이 열세인 데다가 몸을 숨길 곳도 없었다.
중앙종대 동쪽 후미의 제5군단, 제8군단, 제9군단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이들은 중앙종대가 건너간 후 샹강의 부교를 건너야 했다. 그러나 국부군이 근접해오자 부교는 생존의 출구가 아니라 사지의 입구가 돼버렸다. 부교를 건너는 홍군 전사들은 그대로 표적이 되었다. 강 양쪽에서 또는 공중에서 보호막 하나 없이 공격을 받았다. 죽은 전사들은 부교 위에 쌓이거나 강물로 떨어졌다. 부교 위에는 시체가 쌓여 시체 더미를 이루었고, 병사들은 시체를 딛고 건너는 형국이 되었다. 강에는 시체가 떠내려갈 새도 없이 쌓여 핏물이 넘쳤다.
제5군단 중에서도 제34사단이 가장 처참했다. 사단장 천수샹陳樹湘은 1920년 마오쩌둥이 조직한 창사의 공산주의 소조에 가입하여 공산주의 청년단을 거쳐 추수봉기에 참여한 인물로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제5군단의 본대는 이미 샹강을 건넜으나 후미를 맡았던 제34사단은 11월29일부터 12월 2일까지 4일 동안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4일째 되는 날 사방이 완전히 포위되어 무수한 포탄이 떨어졌다. 두 시간의 전투 끝에 5000명의 병력 가운데 1000여 명만 남았다. 제5군단 본부에서는 제34사단이 본대에 합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오던 길로 되돌아가 장시성에서 유격전을 벌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천수샹은 문서를 태우고 무전기를 폭파한 뒤 자신도 보병무장을 한 채 병사들을 이끌고 본대와 반대 방향으로 포위를 돌파해나갔다. 그러나 그는 총상을 입고 20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국부군은 일반 병사는 도살했으나 장교들은 살려두었다. 천수샹은 포로로 끌려가봐야 반공 선전에 이용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총상 자국을 자기 손으로 찢어 목숨을 끊었다. 비참한 최후였다.
제9군단은 부교를 포기하고 얼음같이 차가운 강물에 몸을 던져 건너라는 군단장의 명령 덕에 사상자가 적었다.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은 제8군단이었다. 제8군단에는 대장정 결정에 따라 서둘러 모병한 신참들이 많았다. 그들은 군사훈련도 사상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폭격을 받고 우왕좌왕했다. 지휘관의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흩어진 군대는 적군의 사냥놀이에 표적이 될 뿐이었다. 샹강 전투가 끝난 후 제8군단의 1만여 병력은 1000명의 소부대로 쪼그라들었다.
샹강을 건너 살아남은 중앙홍군은 겨우 3만여 명이었다. 그중 반가량은 홍군 전사가 아닌 중앙종대였다. 공산당 최고 책임자였던 보구는 이 처참한 참패에 권총을 쏘아 자살하려고 했으나 저우언라이가 말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1927년 난창봉기와 추수봉기의 실패 이후 차근차근 성장해온 홍군에게 이런 참패는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중앙소비에트를 포기하고 후난 서북부로 전략전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패배인데, 거기에다 날개를 꺾인 채 산기슭에 내동댕이쳐진 꼴이었다.
장제스 입장에서는 머리가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허리를 동강내어 반토막 이상을 박살냈으니 다 잡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만족할 만했다.
다음 날 샹강 전투의 현장인 광화푸 전적지와 제서우진界首鎭의 홍군 도강 지휘소를 찾아 나섰다. 샹강의 북쪽에서 강물과 나란히 달리는 322번 국도 가장자리에 광화푸 열사능원과 광화푸 조격전阻擊戰 구지가 있었다. 국도변에서 노점상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갔다.
제3군단이 남쪽에서 밀고 올라오는 광시군을 저지하며 시체로 참호를 만들다시피 하면서 지켰던 전장이다. 조격전 구지는 도로를 내면서 생긴 낮은 언덕의 절단면을 이용해 만든 것이었다. 열사능원은 구지 건너편 구릉이지만 관리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경작지에 둘러싸인 야산이라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6킬로미터 거리에 제서우진이 있다. 제서우 대교가 있는 지역이 홍군이 도강했던 지점이다. 이곳을 흐르는 샹강은 폭이 100미터는 되어 보였다. 제서우 대교 근처에는 노점상들이 늘어선 시골장터가 있었다. 제서우 대교 서쪽 교각에서 계단을 통해 다리 아래로 내려서니 제서우 고진이 있었다. 허름한 옛 집들이 늘어선 이곳에 ‘샹강 전투 구지’라는 표지석이 있는데, 표지석의 북쪽에 홍군의 도강 지휘소가 있었다. 대장정 당시에는 삼관당三官堂이라는 서당이었는데, 지금은 홍군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마오얼산의 장정고도
중앙홍군은 샹강을 건넌 다음에 광시에서 제일 높은 해발 2141미터의 마오얼산猫兒山을 넘었다. 마오얼산 역시 동북에서 남서 방향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맥으로 1800미터의 산봉우리들이 60킬로미터 정도 길게 이어진다. 중앙홍군은 이 산을 넘으면서 꽤나 고생을 해야만 했다. 산길이 좁고 가파른 탓에 절벽에서 추락한 병사들도 있었고, 밤에는 길이 너무 좁은 탓에 더 가지 못하고 서거나 앉은 채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우리는 마오얼산을 오르기로 했다. 마오얼산 공원에 도착했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원에서 유료로 운행하는 전용 차량만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산수가 좋은 관광지는 대개 입장권 이외에 버스표를 사서 전용 차량을 이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대량의 관광객 입장을 허용하면서도 차량 통행을 제한하는 효과는 있으나, 여행객에게는 불편을 준다. 게다가 비수기라 바로 출발하지 않고 관광객이 어느 정도 차기를 기다려야 했다.
시외버스가 도착했으나 다른 관광객은 아무도 없고 우리 일행 세 사람과 공원 관리인 둘이 전부였다. 공원의 전용 승합차에 타려는데 빙설 때문에 끝까지 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공원 입구는 해발 800미터이지만 마오얼산의 능선은 1800미터에서 2100미터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산 위에는 기념탑이 있고, 홍군이 지나갔던 산길 일부가 ‘장정고도’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이 옛 산길 소로를 꼭 걸어보고 싶었다.
차가 출발하자 가파른 산길이 꼬불꼬불 이어졌다. 전용차 기사는 익숙한 길이라 잘도 올라갔다. 한참 올라가 능선에 다다르자 멀리 공원 입구가 내려다보이고 깎아지른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병풍 같은 산이란 말이 실감났다. 해가 들지 않는 북사면의 아스팔트길에는 얼음과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다행히 장정고도까지는 차가 올라갔다. 우리는 장정고도를 걷기로 했다. 친절한 기사는 아래쪽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30분 남짓 아스팔트길을 따라 내려왔다. 두견회랑이란 팻말이 보였다. 양옆으로 두견화가 넘쳐나고, 대나무가 무성했다. 곧이어 ‘장정고도 홍군정長征古道紅軍亭’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이곳 사람들이 오래도록 오르내린 산길이니 고도가 맞지만 80년 전의 장정에 고도라는 말을 붙이니 조금 어색하긴 했다. 홍군은 국부군의 추격을 따돌리느라 목숨 걸고 강행군을 한 길이지만 우리에게는 숲이 우거져 상쾌한 길이었다. 중간에 조그만 정자를 만났는데, ‘홍군정’이란 작은 편액을 달고 있었다. 잠시 마오얼산의 능선을 감상하다가 산길을 걸어 내려와 차를 타고 하산했다.
싱안으로 돌아오는 길은 대나무 숲이 아름다웠다. 중간에 계곡을 건너가는 이공교二拱橋(교각의 아치가 2개로 만들어진 다리)가 나왔는데, 이름이 홍군교였다. 장정이 지나갔던 지역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이름이다. 다리 한쪽 구석에 놓인 표지석은 1971년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세월의 때가 내려앉았지만 홍군교라는 이름은 그들의 자랑스러운 현대사에서 따온 것이다.
또 하나의 비극, 잔류자들에 대한 보복 학살
중앙홍군이 두고 온 루이진을 비롯한 장시성과 푸젠성의 혁명 근거지에서는 샹강 전투에 못지않은 비극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국부군 30만 대군을 몰아 홍군의 피로 샹강의 강물을 물들인 다음에, 20개 정규 사단을 동원해 한 달 만에 중앙소비에트 지역을 쓸어버렸다.
보구와 오토 브라운은 장정을 떠나면서 중앙국 서기 딩잉頂英을 잔류 홍군의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홍군에서는 제24사단과 일부 독립 연대가 잔류했고, 지방의 병력까지 합해야 고작3 만여 명이었다.
딩잉은 보구의 왕밍 노선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토지혁명의 성과와 소비에트를 보호하고 중앙홍군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보구의 훈령을 그대로 받들었다. 심지어 중앙홍군이 전략전이를 명분으로 떠난 사실조차 지방 간부나 지역 주민들에게 제대로 공표하지 않았다. 천이陳毅 등 잔류하게 된 다른 간부들이 신속하게 부대를 분산시켜 유격전으로 맞서자고 했지만 딩잉은 왕밍 노선의 전면전을 고집했다. 오히려 모든 중앙정부 업무를 정상적으로 돌리고 《홍색중화紅色中華》라는 관보도 계속 발행하게 했다.
잔류하고 있던 홍군 제24사단은 11월 22일 루이진 북부에서 국부군 1개 여단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게 유일한 승전보였다. 이 전투를 통해 홍군 전투력이 약하다는 것을 확인한 국부군은 물밀듯이 밀고 들어왔다. 두 달 만에 잔류 3만 병력은 5000~6000명으로 폭삭 주저앉았다. 전투 중 죽거나 패전으로 흩어졌다. 홍군의 근거지는 대장정 출발지인 위두 부근의 일부만 남게 되었다. 천이는 유격전을 벌이자고 계속 건의했지만, 딩잉은 무전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묵묵부답이던 당 중앙으로부터 무려 석 달 만인 1935년 2월에 무전이 날아왔다. 중앙 소비에트의 잔류 홍군들은 유격전으로 전환하라는 명령이었다. 홍군의 지휘권이 보구와 오토 브라운에서 마오쩌둥으로 넘어간 다음이었다. 그러나 중앙소비에트는 이미 국부군에 의해 뭉개진 상태였다.
중앙소비에트에서는 1935년 2월 5일 잔류자들이 중앙국 확대 회의를 열고 유격전으로 전환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곧이어 천이가 중앙정부 명의로 군중대회를 소집하여 혁명이 위기에 처했음을 알리고 2000여 명의 부상병을 한 사람씩 데리고 가서 치료해달라고 호소했다. 지역 인민들은 홍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병들을 데려다 보살펴주었다. 부상병들은 건강을 회복하자 홍군 유격대를 찾아 산으로 들어갔고, 유격대는 훗날 신4군을 창설하는 근간이 되었다. 당시 홍군이 지역 주민들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잔류 홍군은 몇 갈래로 나눠 국부군의 포위를 돌파하기로 했다. 딩잉과 천이 역시 중요한 서류를 불태워 없애고 무전기를 파괴한 다음 400여 명을 인솔하고 국부군의 포위를 돌파해나갔다. 수차례 국부군과 교전을 치른 끝에 급기야 4~5명만 남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뤄밍 노선으로 비판받아 노동개조 징계를 받은 한 간부와 야산에서 조우하는 행운이 찾아왔다. 그의 도움으로 밤을 틈타 다른 곳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러나 행운은 이들뿐이었다. 다른 고위 간부들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어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양창지 문하에서 마오쩌둥과 동문 수학했던 허수헝何叔衡, 학자로 더 유명했던 취추바이瞿秋白,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탄 등은 포위를 뚫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백성들은 공산당 간부나 홍군 전사보다 더 비참했다. 국부군과 함께 지주와 향신들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돌아온 것이다. 이들이 만든 환향단還鄕團이란 조직은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빨갱이를 대패로 깎아내고 삽으로 찍어버린다는 뜻의 산공단鏟共團이 곳곳에서 만들어졌다. 이들은 홍군이나 지방 유격대 전사의 가족들에게 조직의 이름만큼 무참한 보복을 가했다. 토지와 재산을 빼앗긴 원한이 있던 터라 국부군보다 훨씬 잔인했다. 닥치는대로 죽이고 걸리는 대로 보복을 했다. 장제스는 소비에트 지역의 모든 백성들은 이미 적화분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이러한 보복 행위를 방관하거나 두둔했다. 때려 죽이고 찔러 죽이고, 돌을 매달아 물에 빠뜨리는 보복의 광기와 증오의 피가 산하를 물들였다.
탈주한 중앙홍군은 홍군대로 참패했고, 중앙소비에트는 소비에트대로 잔인한 보복에 죽어나갔다. 장제스는 이제 공산당을 거의 박멸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1927년 징강산으로 들어간 이후 농촌에서부터 도시를 포위해 들어오던 중국 공산당이 1932년부터 기세 좋게 대도시로 나가려다가 국부군의 봉쇄선에 막혀서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가척박한 산골로 쫓겨난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사지를 빠져나간 천이는 이때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나라의 반이 피바다에 빠져들고(半壁山河沉血海)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모래벌레처럼 흩어졌는가(幾多知友化沙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