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 – 난양소하록灤陽消夏錄 2-4

7

건륭(乾隆) 15년(1750) 경오년에 관가의 창고에서 옥그릇이 사라져 여러 원호(苑戶)들을 심문하기에 이르렀다.

상명(常明)이라는 원호(苑戶)가 심문을 받을 때 갑자기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말했다.

“상명은 옥그릇은 훔치지 않았지만,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제가 바로 살해된 혼백입니다.”

심문하던 관리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서 그를 형부로 이감시켰다. 당시 강소사(江蘇司)의 낭중(郎中)으로 있던 아버지 요안공이 여문의(余文儀) 선생 등과 함께 상명을 취조했는데, 혼백이 이렇게 말했다.

“제 이름은 이격(二格)으로, 14살입니다. 집은 해정(海淀)이고, 아버지는 이성망(李星望)입니다. 작년 대보름날 상명이 저를 데리고 등 놀이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밤은 깊고 인적이 없는 틈을 타 저를 욕보이려 했습니다. 저는 있는 힘껏 거부하면서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께 고해바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상명은 결국 허리띠로 저를 졸라 죽이고 시체를 강둑 아래에 묻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상명이 저를 숨겼다고 의심하여 순성어사(巡城御史)에게 고발해 상명을 형부로 넘겼지만, 형부에서는 증거 부족의 이유로 따로 진범을 찾기로 했습니다. 저의 혼백은 늘 4~5척(尺)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상명을 쫓아다녔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타오르는 불처럼 느껴져 다가가지 못했지만, 훗날 열기가 조금씩 줄어들어 점점 2~3척까지 가게 되고, 다시 줄어들어 1척 남짓 근접하게 되었고, 어제는 전혀 뜨겁지 않았기에 비로소 그에게 빙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격의 혼백은 또 처음 심문을 받을 때부터 그를 쫓아 형부까지 따라갔다면서 그 문을 가리키는데 바로 광서사(廣西司)였다. 이격이 말한 날짜를 근거로 해서 사건의 원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또 시체가 있는 곳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하천 제방의 몇 번째 버드나무 옆에 있습니다.”

혼백의 말에 따라 파 보았더니 과연 그곳에서 채 썩지 않은 이격의 시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아버지를 불러 시체를 확인케 했더니, 대성통곡하면서 말했다.

“얘야!”

이 사건은 비현실적인 것 같지만, 증거가 모두 있는 실제 이야기이다.

심문할 때 상명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꿈에서 깨어난 듯 자신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또 이격의 이름을 부르자 다시 취한 듯 이격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렇게 몇 차례의 심문을 거치자 상명은 비로소 죄를 인정했다. 또 두 부자가 집안일에 대해 쉬지 않고 이야기했는데, 하나같이 분명했다.

이렇게 해서 살인사건에 의심이 없게 되자, 곧 바로 사실을 갖춰 황제께 알렸다. “법에 따르라”라는 하명이 있던 날 이격의 혼백은 몹시 기뻐했다.

생전에 떡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던 이격은 판결이 있던 날 갑자기 큰 소리로 “떡 사세요!”라고 소리쳤다. 아버지가 울면서 말했다.

“오랫동안 네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생시 때랑 꼭 같구나.”

아버지가 또 이격에게 어디로 갈 것인지 묻자 이격의 혼백이 말했다. “저도 알 수 없지만 이제 가야 합니다.”

그때부터 다시 상명에게 묻자 그는 더 이상 이격의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乾隆庚午, 官庫失玉器, 勘諸苑戶. 苑戶常明對簿時, 忽作童子聲曰: “玉器非所竊, 人則眞所殺, 我卽所殺之魂也.” 問官大駭, 移送刑部. 姚安公時爲江蘇司郞中, 與余公文儀等同鞫之, 魂曰: “我名二格, 年十四. 家在海淀, 父曰李星望. 前歲上元, 常明引我觀燈歸, 夜深人寂, 常明戲調我. 我力拒, 且言歸當訴諸父. 常明遂以衣帶勒我死, 埋河岸下. 父疑常明匿我, 控諸巡城. 送刑部, 以事無左證, 議別緝眞凶. 我魂恆隨常明行, 但相去四五尺, 卽覺熾如烈燄, 不得近, 後熱稍減, 漸近至二三尺, 又漸近至尺許, 昨乃都不覺熱, 始得附之.”

又言初訊時, 魂亦隨至刑部, 指其門乃廣西司.” 按所言月日, 果檢得舊案. 問其屍, 云: “在河岸第幾柳樹旁.” 掘之亦得, 尙未壞. 呼其父使辨識, 長慟曰: “吾兒也!”以事雖幻杳, 而證驗皆眞. 且訊問時, 呼常明名, 則忽似夢醒, 作常明語. 呼二格名, 則忽似昏醉, 作二格語. 互辯數四, 始款伏. 又父子絮語家事, 一一分明. 獄無可疑, 乃以實狀上聞. 論如律, 命下之日, 魂喜甚. 本賣糕爲活, 忽高唱“賣糕”一聲. 父泣曰: “久不聞此, 宛然生時聲也!” 問: “兒當何往?” 曰: “吾亦不知, 且去耳.” 自是再問常明, 不復作二格語矣.

8

남피(南皮) 사람 부사(副使) 장수장(張受長)이 하남(河南) 개귀도(開歸道)의 관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밤에 소송 판결문서를 읽다가 혼자서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스스로 목을 찌르고 죽은 경우 칼은 묵직하게 들어갔다가 가볍게 나오는데, 지금 여기에는 ‘찌를 때 칼이 가볍고, 나올 때는 묵직하네(入刀輕, 出刀重)’라고 쓰여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그 때 갑자기 등 뒤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은 사건을 잘 이해하고 계시는군요.”

장수장 선생이 뒤를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탄식했다.

“사건을 심리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구나. 다행히 여태까지는 잘못 처리한 사건이 없지만, 다른 날 실수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결국 장수장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南皮張副使受長, 官河南開歸道時. 夜閱一讞牘, 沉吟自語曰: “自剄死者, 刀痕當入重而出輕. 今入輕出重, 何也?” 忽聞背後太息曰: “公尙解事.” 回顧無一人, 喟然曰: “甚哉, 治獄可畏也! 此幸不誤, 安保他日之不誤耶!” 遂移疾而歸.

9

돌아가신 숙모 고의인(高宜人)의 부친 고영지(高榮祉)는 산서(山西) 능천현(陵川縣) 현령을 지냈다. 집안에 옥의 질과 무늬 결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는 옥으로 만든 낡은 말이 있었는데, 피가 얼룩져 있었다. 자단목을 잘라 의자를 만들고 그 위에 말을 올려놓은 뒤 늘 안석 위에 두었다.

말의 앞다리는 둘 다 구부린 채 일어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왼쪽 다리가 의자 밖으로 뻗어 나와 있었다. 고영지 선생은 깜짝 놀라 관아에 전해 보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현상은 정주라 해도 알 수 없을 것이오!”

관의 한 빈객이 말했다.

“대개 물건은 오래 되면 요물이 됩니다. 또한 사람의 정기를 많이 받아도 요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치는 간단히 밝힐 수 있으니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깨부수어야 한다고 했지만, 고영지 선생은 혹시나 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튿날 말의 다리가 본래의 모습으로 구부리기 있기에 선생이 말했다.

“이 말은 정말로 영성을 가지고 있나 보다.”

그리고는 말을 화로 속으로 던졌는데, 어슴푸레 말울음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더 이상 다른 일은 없었다. 그러나 고씨 집안은 이때부터 점점 쇠하기 시작했다. 숙모 고의인이 말했다.

“그 말은 삼일을 태운 뒤에야 두 동강이 났는데, 몸통의 반을 볼 수 있었단다.”

또 무청현(武淸縣) 왕경타(王慶垞)의 조씨(曹氏) 집 대청 기둥에서 갑자기 목단 두 송이가 피었는데, 하나는 자색이고 하나는 녹색이었다. 꽃잎의 관다발이 금실 같이 생겼고, 꽃과 잎이 무성하게 자랐으며, 7~8일 뒤에 떨어졌다. 목단의 뿌리가 나무 기둥을 뚫고 나와 나무기둥의 무늬조직과 2촌(寸) 정도 서로 연결되었다. 나무 기둥은 고목 상태였지만 목단의 뿌리가 퍼지면서 점점 푸르게 변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조씨의 외손녀로 어렸을 때 직접 이 목단 꽃을 보았는데, 모두들 길조라고 했다. 외조부 장설봉 선생이 말했다.

“사물이 정상적인 아닌 것은 요물이니, 여기에 무슨 좋은 조짐이 있단 말인가?”

조씨 집안 역시 쇠해졌다.

先叔母高宜人之父, 諱榮祉, 官山西陵川令. 有一舊玉馬, 質理不甚白潔, 而血浸斑斑. 斲紫檀爲座承之, 恆置几上. 其前足本爲雙跪欲起之形, 一日, 左足忽伸出於座外. 高公大駭, 閤署傳視, 曰: “此物程ㆍ朱不能格也.” 一館賓曰: “凡物歲久則爲妖, 得人精氣多, 亦能爲妖. 此理易明, 無足怪也.” 衆議碎之, 猶豫未決. 次日, 仍屈還故形. 高公曰: “是眞有知矣!” 投熾鑪中, 似微有呦呦聲, 後無他異. 然高氏自此漸式微. 高宜人云: “此馬鍛三日, 裂爲二段, 尙及見其半身.”

又武淸王慶垞曹氏廳柱, 忽生牡丹二朵, 一紫一碧. 瓣中脈絡如金絲, 花葉葳蕤, 越七八日乃萎落. 其根從柱而出, 紋理相連, 近柱二寸許. 尙是枯木, 以上乃漸靑. 先太夫人, 曹氏甥也, 小時親見之, 咸曰瑞也. 外祖雪峰先生曰: “物之反常者爲妖, 何瑞之有?” 後曹氏亦式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