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대장정 2 – 마오, 봉건에서 혁명과 권력으로 1

여정의 첫 번째 기착지였던 상하이에서 이륙한 비행기는 묵직한 엔진음을 내며 서쪽으로 날아갔다. 목적지는 후난성 성도 창사長沙. 상하이가 중국 공산당의 탄생지이고 대장정의 계기가 된 쿠데타가 발발한 곳이라면, 창사는 마오쩌둥이 공산주의자로 탄생한 곳으로 마오쩌둥 일생의 대장정이 시작된 곳이다.

대장정은 마오쩌둥의 대장정이었고, 마오쩌둥은 대장정을 통해 신중국을 탄생시켰다. 대장정이 끝난 지 80년이 지난 오늘날에 대장정 혁명 전사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인 시진핑이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따라서 대장정이란 지리적인 행군 노선을 따라가기에 앞서, 마오쩌둥의 출생과 공산주의자로 성장해간 과정을 짚어본 다음에 대장정 출발지점으로 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답사 지점으로 말하자면, 후난성의 창사와 사오산韶山, 장시성의 핑샹萍鄕, 융신永新, 징강산을 거쳐 루이진에 이르는 여정이다. 이 노선은 대장정 출발 직전까지 마오쩌둥의 40년 인생역정과 맞아떨어진다. 마오쩌둥은 1893년 샤오산에서 봉건사회의 시골 촌부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곳을 박차고 나와 창사에서 혁명의 꿈을 키우며 공산당에 투신했다. 농민운동에 진력했고, 1927년 핑샹 등지에서 일으킨 추수봉기가 실패하여 징강산으로 숨어들었다. 징강산에서부터 토지혁명과 유격전으로 소비에트를 구축하면서 재기했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선포될 때 집행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는 등 유력 인물로 부상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중앙의 정치적 견제와 박해를 받았고, 건강까지 상한 채 들것에 실려 대장정에 나섰다. 우리는 여기까지의 과정을 더듬어보기로 했다.

비행기가 이륙한 지 두 시간 만에 도착한 창사 공항. 이번 답사 여행의 전용차량을 만난 다음에 창사의 중국인 친구가 베풀어주는 환영 만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중국인 기사 쉬단은 쿤밍昆明에서 창사까지 장장 140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를 혼자서 달려왔다. 1박 2일을 꼬박 운전해야 하는 거리다. 내가 김포공항에서 출국하는 날, 쉬단도 쿤밍을 출발했다. 상하이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에 전화를 해보니 전날 밤 늦게 도착해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사에서의 첫 번째 일정은 마오쩌둥이 아니라 후난성 음식으로 즐기는 저녁식사였다. 후난성은 마오쩌둥을 비롯한 많은 혁명 원로들의 고향이자 상큼한 매운맛이 고급스러운 후난 요리로 유명한 지방이다.

쓰촨이 산초(중국어로는 화자오花椒)의 얼얼한 매운맛이 대표적이라면, 후난은 고추가 주는 상큼한 매운맛이 특징이다. 음식의 색깔을 선명하게 살려내기 때문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후난성은 우리와 재미있는 우연과 인연이 많은 지방이다. 우리는 호남 지방 음식을 최고로 치는데, 중국에서도 한국 사람 입맛에는 후난 요리가 최고라 할 수 있다. 게다가 후난湖南과 호남의 한자가 같다. 중국 여행에서 돌아와 일주일만 지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후난 음식이다.

중국에서 우리 음식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된 계기는 드라마 〈대장금大長今〉인데, 이 드라마를 중국에서는 후난 TV가 수입해서 최초로 방송하고, 이어서 중국 각지에 방송을 내보낸 것이다. 후난 위성 TV는 최근에 〈아빠 어디 가〉와 〈나는 가수다〉의 프로그램 포맷을 수입해서 중국판 〈아빠 어디 가爸爸去哪兒〉와 〈나는 가수다我是歌手〉를 제작해 방송했다. 이 한류 프로그램들은 〈대장금〉에 이어 또다시 공전의 히트를 쳤다. 우연이지만 참 좋은 인연으로 읽힌다.

후난성 창사에 중국인 친구가 하나 있는데, 이 친구 역시 음식 문화와 관련이 있다. 예전에 중국 지방의 음식을 취재할 때 신계숙 배화여대 전통조리학과 교수의 소개로 알게 된 여성 사업가 탕탄충唐潭聰이다. 창사에서 전통적인 후난 음식 전문점과 한국식당을 경영하고 있다. 창사에서의 첫날 저녁은 탕탄충의 식당에서 진한 향미의 후난 음식을 맛보기로 했다.

상하이에서 출발하면서 탕탄충에게 연락했더니 최근 새로 문을 연 시산쭈이위안西山醉園이라는 식당으로 오라는 회신을 받았다. 후난의 고급스러운 전통음식점이었는데 자신이 직접 고른 메뉴로 멋진 상차림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지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도 큰 법이다. 겨울비 내리는 창사에서 친구의 따뜻한 마음에 또 한 번 촉촉하게 젖으면서 매콤한 현지 음식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다음 날 아침 마오쩌둥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전기를 읽듯이 마오쩌둥을 짚어가는 것은 조금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는 과도한 찬사가 넘쳐 진부하기 짝이 없고, 다른 나라에서는 폄훼와 삐딱한 시선으로 인해 편견에 빠지기 쉽다. 대장정 답사를 준비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마오쩌둥의 부인이 넷이나 되는데,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마오쩌둥 개인의 역사와 엇물려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마오쩌둥의 여인’들이니 ‘영웅호색’이니 하지만, 부인들의 인생역정에 마오쩌둥을 비춰보는 것도 흥미로운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오쩌둥의 네 부인 가운데 대장정 이후에 맞아들인 네 번째 장칭江靑을 제외한 세 부인을 하나씩 찾아가 마오쩌둥과의 결혼생활과 혁명 그리고 대장정이 어땠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1919년 11월 창사에서 찍은 마오쩌둥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쩌탄, 부친 마오순성, 백부 마오푸성, 마오쩌둥.

마오쩌둥의 첫 번째 부인은 뤄이구羅一姑다. 뤄이구는 열여덟 살에 집안 어른끼리 정혼해준 남자에게 시집갔다. 신랑 마오쩌둥은 네 살 아래로 먼 친척의 장남이었다. 신랑은 농사일을 거들면서 사숙(우리나라의 서당과 유사)에서 틀에 박힌 중국 고전을 배우고 있었다. 시아버지 마오순성毛順生은 대대로 가난을 물려받았지만 지독한 절약과 타고난 근면으로 논밭을 조금씩 늘렸고, 쌀장사를 하면서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부자 사이가 아주 나빠 거의 투쟁 수준이었다.

뤄이구는 정성껏 차를 올리고 상을 차리면서 남편을 보살폈다. 그러나 훗날 마오쩌둥이 에드거 스노에게 회고한 바에 따르면 자신은 뤄이구와 동거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뤄이구는 자식도 없이 시집온 지 3년째 되던 해 병사했다. 봉건시대의 관습 그대로 부모가 정해준 남자에게 시집을 갔으나, 불행하게도 남편의 사랑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청조 말기 피폐한 시골구석의 이름 없는 풀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이었다.

뤄이구는 허망하게 병사했지만, 그녀가 살았던 집은 민가로서는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바로 사오산의 마오쩌둥 생가다. 마오쩌둥이 열일곱 살에 샹샹현湘鄕縣의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완고한 아버지와 전통습속에 갇힌 촌뜨기 부인으로 요약되는 봉건주의를 박차고, 새 시대 개혁의 용광로로

뛰어들기 위해 아버지에게 반항하던 바로 그 집이다. 창사의 첫 답사지로 뤄이구의 신혼 아닌 신혼 시절의 집이자 마오쩌둥의 생가를 찾아갔다. 가운데 출입문이 나 있고 좌우에 양 날개처럼 펼쳐진 시골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 채지만 좌우로 구분하여 두 집이 나눠 살았다. 집 앞에는 연못이 있었다. 대처로 나가 공부를 계속하려는 마오쩌둥이, 교육은 사숙에서 배운 것으로 충분하니 그 실력으로 쌀장사를 해서 돈을 벌라는 완고한 아버지와 싸울 때, 빠져 죽겠다고 아버지를 위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연못이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좌측이 마오쩌둥이 살던 집이다. 복도를 통해 부모님의 침실과 형제들의 침실이 이어지고, 가운데 마당에 창고와 우사를 갖춘 평범한 시골 중농의 민가다.

뤄이구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어떤 여자가 시집와 살았다는 한 줄의 기록조차 없다. 3년 동안 한 집에서 살았던 아내를 투명인간으로 취급했다고 하니 남편으로서는 ‘나쁜 놈’이었던 셈이다. 당시 마오쩌둥에게는 완고한 아버지와 억지 부인 뤄이구로 대변되는 봉건시대에서 탈출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 뤄이구는 봉건시대에 마오쩌둥 같은 탈脫봉건적 남성을 봉건적인 방식으로 만났으니, 어쩌면 시대가 그녀를 버린 것이라고 위로해야 할 것 같다. 그녀는 봉건시대 끝자락에서 봉건적인 결혼제도에 갇힌 채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마오쩌둥의 생가. 가운데 출입문의 왼쪽이 마오쩌둥의 집이고, 오른쪽은 다른 사람이 살던 집이다(왼쪽).
사오산 마오쩌둥 동지 기념관. 건축 규모에서부터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오른쪽).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렸지만 마오쩌둥 생가에는 관람객이 끊이지 않았다. 생가 근처에는 거대한 마오쩌둥 동상이 있는 마오쩌둥 광장과 마오쩌둥 기념관이 있다. 마오쩌둥 동상 앞에는 화환이 즐비했다. 가족끼리 온 사람도 있지만 단체로 참배하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 오와 열을 맞춰 단체로 묵념을 하고는 단체사진을 찍고 나서 각자 기념사진을 촬영하느라 시끌벅적했다. 내가 그동안 관찰한 바에 따르면 중국인에게 마오쩌둥은 오직 나라를 세운 위대한 영도자일 뿐이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정적을 죽였는지, 대약진 운동에서 얼마나 심각한 정책 실패를 저질렀는지, 문화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심각한 문명 파괴를 자행했는지 등등에 대해 거론하는 중국인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다만 마오쩌둥보다 덩샤오핑鄧小平을 더 좋아한다는 사람은 가끔 만난 적이 있다.

당장 소득이 빠르게 증가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금도 이루어지는 정치적 통제가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을 누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광장 옆에 있는 마오쩌둥 기념관은 웅장하고 화려했다. 대리석으로 감싼 겉모습이나 내부의 화려한 진열관 모두 마오쩌둥 찬양 일색이다. 마치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중국은 공중분해됐을 것 같은 분위기랄까. 찬사가 지나치면 진부해진다. 마오쩌둥 기념관에서 거북하고 진부한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면서 마오 주석의 부인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첫 번째 부인 뤄이구의 소박한 모습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에게는 거대한 기념관 옆에 있는 농민 야학 구지가 더 눈에 들어왔다. 마오쩌둥이 1925년 고향으로 돌아와 야학을 개설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두 번째 부인 양카이후이가 함께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