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기행 06 위안밍위안圓明園에 가보았는가?

오랜 세월 부침을 겪어왔던 베이징의 역사를 한 몸으로 증언해주는 곳이 바로 위안밍위안(圓明園)이다. 위안밍위안은 이허위안(頤和園)과 함께 역대 왕조의 정원 가운데 하나로, 베이징에서는 나름대로 잘 알려진 명소 가운데 하나이다. 베이징의 서쪽 지역은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 많은데, 이에 역대 왕조의 황제들은 이곳에 행궁(行宮)을 만들고 정원을 조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을 통칭해 ‘삼산오원(三山五園)’이라 불렀는데, 여기에서 ‘삼산’은 ‘샹산(香山)’, ‘위취안산(玉泉山)’, ‘완서우산(萬壽山)’이고, 오원은 ‘창춘위안(暢春園)’, ‘위안밍위안(圓明園)’, ‘징밍위안(靜明園)’, ‘징이위안(靜宜園)’과 ‘칭이위안(淸漪園)’이다.

오원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창춘위안(暢春園)’으로, 위안밍위안의 남쪽, 현재의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 일대에 걸쳐 있었다. 이것은 명 신종(神宗)의 외조부인 리웨이(李偉)가 세운 것을 강희 29년(1691년)에 중수해, 강희제는 매년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또 현재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허위안(頤和園)’의 전신은 ‘칭이위안(淸漪園)’으로 오원 가운데 가장 늦게 건설되었다.

오원 가운데 으뜸으로 손꼽히는 위안밍위안은 원래 ‘창춘위안(長春園)’, ‘치춘위안(綺春園)’, ‘위안밍위안(圓明園)’의 세 개의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위안밍위안’으로 통칭된다. 위안밍위안은 1709년에 처음 건설되었는데, 원래는 강희제가 넷째 아들인 인전(胤禛), 곧 옹정제에게 하사한 ‘사원(賜園)’이었다. 1722년 옹정의 즉위 이후 구궁의 틀을 본 따 위안밍위안의 대대적인 중수(重修)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위안밍위안이 그 위용을 갖춘 것은 청대의 최극성기라 할 건륭 시기였다. 건륭제는 특유의 자신감으로 엄청난 경비와 공력을 들여 위안밍위안을 대규모로 확장했다.

건륭제는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이탈리아인 가스띨리온(중국 명은 랑스닝(郞世寧))과 프랑스인 브노와(중국 명은 쟝여우런(蔣友人)) 등에 명하여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 양식을 모방한 서양식 누각 3개 동과 분수를 삼대 정원 가운데 하나인 창춘위안(長春園)의 최북단에 세우게 했다. 1757년에 최초의 인공 분수인 ‘다수이파(大水法)’가 완공되었는데, 이것이 곧 ‘셰치취(諧奇趣)’라는 일군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다.

셰치취諧奇趣

그 뒤로 ‘양췌룽(養雀籠)’, ‘팡와이관(方外觀)’, ‘위안잉관(遠瀛觀)’, ‘하이옌탕(海晏堂)’, ‘추수이러우(蓄水樓)’, ‘완화전(萬花陣)’ 등과 같은 건물들이 속속 들어섰는데, 이렇게 세워진 건물들을 통칭해 ‘시양러우(西洋樓)’라고 한다. 당시 아티레 신부(중국 명은 왕즈청(王致誠))는 중국의 전통적인 멋과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바로크 양식이 절묘하게 어울어진 위안밍위안의 아름다움을 ‘모든 원림 가운데 최고의 원림(萬園之園)’이라는 말로 찬탄했다.

위안잉관遠瀛觀

시양러우는 중국에서는 최초로 시도된 서양 건축물들로서 그 아름다움은 그 어느 것과도 비길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비극적인 것은 이렇게 뛰어난 인류 문화유산이 제2차 아편전쟁을 거치며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1856년부터 1860년에 걸친 제2차 아편전쟁 중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엘진을 협상단장으로 삼아 청 정부와 담판을 지으려 했다. 하지만 청 정부는 엘진이 보낸 협상단을 구속하고 일부는 처형했다. 1860년 10월 18일 엘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의 군대를 베이징으로 진군시켰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당시 함풍(咸豊) 황제가 위안밍위안에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이곳을 쳤다. 그러나 함풍(咸豊) 황제는 이미 러허(熱河, 지금의 청더(承德))로 도망을 치고 이곳에는 그야말로 오합지졸만이 남아 있었다. 거칠 것이 없었던 연합군은 엘진의 명령에 따라 위안밍위안에 있는 보물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건물들마저 모두 불지르고 파괴해버려 그야말로 초토화시켜버렸다. 말 그대로 인류 문화 유산이 잿더미로 화해버린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파괴된 채로 방치되어 있는 위안밍위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베이징의 쯔진청(紫禁城)의 경우 이것을 파괴하면 엄청난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또 어차피 청나라는 몰락할 것이라는 생각에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때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쯔진청마저 파괴했더라면 또 다른 인류 문화유산이 사라졌을 것이다. 당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은 앞다투어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아시아로 몰려들어 자기들끼리도 각축을 벌였는데, 이것을 그들 용어로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 부른다. 그레이트 게임의 와중에 파괴되고 약탈당한 문화재에 대해서는 어찌 제한된 편폭에 그 자세한 시말을 필설로 다할 수 있겠는가? 실로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야만의 극치에 그저 아연할 따름이다. 하물며 당시 강탈당한 제 것을 다시 찾겠다는 데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오히려 언죽번죽 부르대는 그 후손들을 보고 있노라면 진정 문명은 무엇이고, 야만은 무엇인지 할 말을 잃게 된다.

위안밍위안 다수이파大水法

위안밍위안 구역 내에 있는 전시실에는 1861년에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당시 프랑스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내용의 편지가 보관되어 있다.

세계의 모든 예술가와 시인, 철학자들은 모두 위안밍위안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볼테르도 현재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리스에는 파르테논 신전이, 이집트에는 피라미드가, 로마에는 콜로세움이, 파리에는 노틀담 성당이 있고, 동방에는 위안밍위안이 있노라고…그런데 이 기적이 현재는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두 명의 강도가 위안밍위안에 들어가 하나는 약탈을 하고, 다른 하나는 방화를 하였습니다. 그들이 얻은 승리는 강도와 도둑놈의 승리요, 두 명의 승리자는 함께 위안밍위안을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습니다.… 우리 유럽인들은 스스로 문명인이고, 우리의 안목으로는 중국인들은 야만인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문명인이 야만인에게 행한 행동이란 말입니까?…

위안밍위안

이렇게 훼손된 이후 위안밍위안은 예전의 명성을 잃어버리고 한참 동안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가 신중국이 수립된 이후 차츰 정비의 손길이 미쳐 그 나마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시양러우의 아름다운 건물들은 그때 이후로 본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중간에 쓰레기 더미를 대충 치우고 넘어진 기둥을 바로 세우는 정도의 손길만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위안밍위안에 가보았는가?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영화와 몰락을 이처럼 극적인 대비를 통해 맛볼 수 있는 곳은 더 이상 없다. 위안밍위안, 이곳에서는 제국주의의 야만성, 잔혹함과 오래된 왕조의 퇴락한 모습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위안밍위안의 해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