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화의-왕유王維 아우 장인에게 장난삼아 주노라 3수戱贈張五諲三首

아우 장인에게 장난삼아 주노라 3수戱贈張五諲三首/왕유王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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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弟東山時, 내 아우 동산에 은거할 때
心尚一何遠. 마음속으로 숭상했던 뜻 얼마나 고원했던가?
日高猶自卧, 해가 높이 떠올라도 마냥 절로 누워 있다가
鍾動始能飯. 종소리 울리자 비로소 밥을 먹는다.
領上髮未梳, 목 위에 늘어뜨린 머리 빗지도 않고
牀頭書不卷. 침상 머리맡엔 책을 말아 놓지도 않았다.
清川興悠悠, 맑은 냇물에 이는 감흥 유유하고
空林對偃蹇. 텅 빈 수풀 마주하고 거드름 피운다.
青苔石上净, 푸른 이끼 돌 위에 정결하고
細草松下软. 가는 풀잎 솔 밑에 부드럽다.
窗外鳥聲閑, 창밖엔 새소리 한가롭고
階前虎心善. 섬돌 앞엔 호랑이 마음 선량하도다.
徒然萬象多, 부질없이 삼라만상 많지만
澹爾太虚緬. 담담한 푸른 하늘 아득하도다.
一知與物平, 한번 만물과 평등함을 깨달아
自顧爲人淺. 스스로 돌아보니 사람됨이 천박하도다.
對君忽自得, 그댈 대하며 문득 스스로 터득한 바 있어
浮念不煩遣. 헛된 잡념 떨쳐 버리길 번거로워하지 않으리라.

[해제]

이 시는 왕유가 친하게 지냈던 장인에게 주는 연작시 세 수 가운데 첫 번째 시다. 장인(張諲)의 항렬은 다섯째이기 때문에 장오(張五)라고도 부르며 영가(永嘉人, 지금의 절강성 溫州市) 사람이다. 젊어서 집을 떠나 유람하다가 왕유와 더불어 하남 등봉(登封)의 소실산(少室山)에 거주하며 10여 년을 은거했다. 왕유는 <아우 장인에게 장난삼아 주노라 3수(戱贈張五弟諲三首)>(2)에서 “장 아우는 다섯 수레의 책을 읽으며 여전히 은거한다.(張弟五車書, 讀書仍隱居.)”고 했고, 아울러 <친구 장인은 시, 주역, 단청, 초서, 예서에 능통한데 요즈음 시를 보여주기에 이 시를 주노라(故人張諲工詩、善易卜,兼能丹青、草隸,頃以詩見贈,聊獲酬之)에서는 장인의 그림과 초서의 실력을 높이 사면서 “병풍에 잘못 찍은 점은 손권의 의혹을 사고, 부채에 그린 초서는 왕민(王珉)을 경시할 만하다.(屏風誤點惑孫郎,团扇草書輕内史.)”라고 칭송했다. 이기(李頎)가 거주하던 영양(穎陽)은 숭산의 맞은편에 있어서 가끔 왕래하곤 했다. 그의 <장인의 산수를 읊으며(詠張諲山水)>에서 “시는 좌사(左思)의 풍류를 시기할 만하고, 그림은 고개지(顧愷之)와 대적할 만하다.(詩堪記室妒風流,畵與將軍作勍敵.)”라고 칭찬했다. 이후엔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길로 나아갔으며 관직은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郎)에 이르렀다. 이기의 <원외랑 장인과 화답하며 짓노라(同張員外諲酬答之作)> 시는 장인이 형부원이랑을 지낼 때 그의 은거 시절을 회상하며 지은 시다.

洛中高士日沈冥, 낙양 은사는 해가 져서 어두워지자
手自灌園方帶經. 손수 정원에 물 대고는 경서 차고 다닌다.
王湛床頭見周易, 왕담의 책상머리엔 주역이 보이고
長康傳裡好丹青. 고개지 장경전엔 단청 그리기를 좋아했다네.
鶡冠葛屨無名位, 갈새 깃털 모자에 칡덩굴 신발, 이름과 벼슬은 없지만
博弈賦詩聊遣意. 바둑 두고 시 읊으며 무료하게 소일한다.
清言只到衛家兒, 고상한 말은 위 씨 아이에게 이를 뿐
用筆能誇鐘太尉. 그 붓놀림은 종요(鍾繇)를 뛰어넘는다.
東籬二月種蘭蓀, 이월이 되자 동쪽 울타리에 창포를 심고
窮巷人稀鳥雀喧. 궁벽한 골목엔 인적 드물고 새 소리 시끄럽다.
聞道郎官問生事, 듣자하니 낭관에게 사는 형편 물었더니
肯令鬢髮老柴門. 귀밑머리 하얀 사람이 사립문에 기대 늙어간다 하네.

이후에는 촉으로 갔었다. 이기의 <촉으로 들어가는 장인을 전송하며(臨别送張諲入蜀)>에서 “촉 강의 흐름은 예측할 수 없고, 촉으로 가는 길 찾기 어렵다.(蜀江流不測,蜀路險難尋.”)라고 했다. 다시 양양(襄陽) 부근에 은거하면서 맹호연(孟浩然)과 사귀었다. 맹호연은 <장인을 찾아 야원으로 돌아가 짓노라(尋張五回夜園作)>에서 “방공이 은거한 곳을 듣고는 동호 근처로 옮겼다.(聞就龐公隱,移居近洞湖.)”라고 언급했다. 이어서 안휘(安徽)로 옮겨 살았다. 왕유의 <선성으로 돌아가는 장인을 전송하며(送張五諲歸宣城)>라는 시를 통해 그가 선성에서 우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낭사원(郎士元)의 <호주 별장으로 돌아가는 장인에게 주노라(贈張五諲歸濠州别業)>를 보면 봉양에 그의 별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천보 연간(742-756)에 이르러 온주로 돌아와 고향에서 사망했다.

시인이자 화가 장인의 사적이 ≪당재자전(唐才子傳)≫, ≪당시기사(唐詩紀事)≫와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언고시 상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