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대장정 1 – 그날 기묘한 탈주가 시작되다 3

혁명의 용광로, 상하이

중국 공산당을 창당한 곳은 지금은 화려하기 그지없는 상하이의 도심 신톈디新天地 근처이다. 이곳에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회지會址(회의가 열렸던 곳)가 있다. 중국에서는 약어로 ‘일대회지一大會址’라고 한다. 1921년 7월 23일부터 31일까지 13명의 대표가 모여 당 이름과 기본 강령을 정하고 조직을 구성했다. 공산당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중앙국이 설치되고, 총서기는 천두슈陳獨秀, 조직 책임자는 훗날 대장정 때 제4방면군을 이끌게 된 장궈타오, 선전 책임자는 리다李達가 선출되었다. 마오쩌둥도 13명의 대표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아직 명단 머리에 오를 처지는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일대회지. 상하이는 제국주의나 매판자본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에 이 르는 이념과 사조에서도, 아편매춘소설영화 같은 대중문화에서도, 조선인 망명객과 진보적인 일본인, 유 대인 피난민과 제국주의의 첩자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이 한데 엉켜 들끓었던 용광로다. 지금은 세계 경제 중 심지의 하나가 되어 여전히 끓어오르고 있다

일대회지는 실내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진귀한 유물 전시관도 아니고 글과 그림과 사진, 모조품 등을 전시해놓고 사진 촬영을 금지한다는 게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좁은 땅에 촘촘하게 붙여 지은 이 건물은 1920년에 이층 사합원四合院 구조로 지어졌다. 화려한 서양식 문양으로 장식한 석고문石庫門을 들어서는데, 당시 상하이 특색의 주택이었다. 중국 공산당 창당 대의원의 한 명이던 리한쥔李漢俊과 그의 친형이 살았던 집이다. 그 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고 주거용에서 상점으로 바뀌는 바람에 원래 모습과 달라졌으나, 해방 후에 혁명 원로들의 기억을 더듬어 내부 구조를 당시 모습으로 복원했다

중국 공산당은 왜 생겨났나

일대회지를 둘러보면서 새삼스러운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왜 이 시기에 중국에서 공산당이 탄생했을까. 쑨원孫文과 장제스의 국민당이라는 강력한 정치결사체가 있는 상황에서 왜 굳이 공산당까지 생겨난 것일까. 커다란 역사의 흐름을 읽어보는 차원에서 21세기의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질문이다.

내가 이해하는 바는 이렇다. 17세기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18세기 100년 동안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라는 걸출한 황제의 치세에는 세계 최강국이었다. 전쟁에서 패배를 몰랐고, 문화적으로도 세계 문서 생산량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융성했다. 그러나 국가가 쇠락하는 것은 항상 내부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치세가 전성기라고 하면, 바로 그 지점에서 쇠퇴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건륭제는 십전무공十全武功이라는 치적에 취하여 오만해졌다. 관료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백성들은 수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고장 난 허약한 국가는 겉으로는 정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재해나 전쟁 같은 외생 변수가 돌발적으로 발생하면 관료의 부패와 무능이 거대한 폭탄으로 터지는 법이다.

청나라의 폭탄은 영국과의 무역 분쟁에서 터졌다. 중국의 차와 도자기, 비단에 심취한 영국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심각한 적자에 시달렸다. 그러나 청나라는 영국의 무역적자를 시정하기 위한 통상 협상 요구를 묵살했다. 무역적자로 인한 은의 대량 유출에 위기를 느끼던 영국은 인도의 아편을 중국에 팔아 무역적자를 메웠다. 아편의 폐해가 심각해지자 청나라는 아편을 근절하려 했다. 이에 맞서 영국은 1840년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라는 국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청나라는 전투에서 패했고, 이후 청나라 황실은 물론 중국 백성들의 삶은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만신창이가 된 채 치욕과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다.

중국 백성들은 청조의 가혹한 세금 수탈로 이중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멸만흥한滅滿興漢을 외치며 태평천국 운동(1851~1864년)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은 반란을 일으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새로운 사회를 구축할 구체적인 비전이 없던 탓에 헤매기 시작했다. 태평천국은 내분으로 쪼개지고 쩡궈판曾國藩, 리훙장李鴻章 등 한족 관료들이 조직한 의용군에 게 토벌당하며 비참하게 끝나버렸다.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하면서 관료층 일부가 개혁의 필요성에 눈을 떴다. 쩡궈판, 리훙장, 쭤쭝탕左宗棠 등이 벌인 양무운동(1860~1894년)이 그것이다. 중체서용中體西用, 곧 황제를 모시고 서양의 기술을 활용하자는 이 개혁운동은 그러나 관료주의 병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들부들 흐지부지되었다.

1898년부터 헌법을 만들고 과거제도를 개혁하고 근대식 학교와 신식 육군을 창설하고, 상공업과 농업을 일으키자는 입헌파가 황제의 신임을 받으며 등장했다.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탄쓰퉁譚嗣同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나 서태후西太后와 관료층 등의 보수파가 무술정변을 일으켜 입헌파를 모조리 제거했다. 이번에도 개혁이 실패했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뒤 중국에는 일본을 배우려는 열풍이 불었다.

20세기 초에 많은 중국인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쑨원은 도쿄에서 민족 독립, 민권 신장, 민생 안정의 삼민주의를 주창했다. 황제를 폐하고 공화국을 세우자는 공화파를 중심으로 동맹회同盟會를 결성했다. 온건한 개혁이 실패하면 할수록 더 강력한 개혁론이 나왔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위안스카이袁世凯가 청나라를 버리고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면서 청나라 황실은 여섯 살짜리 어린 황제 푸이溥儀를 마지막으로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개혁에 전혀 관심이 없는 구태에 절어 있는 구시대 인물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이끌 위인이 아니었다. 위안스카이가 황제 자리에 욕심을 내면서 제정 회귀의 갈등이 불거졌다. 1912년부터 1916년까지 세월만 허비하던 위안스카이는 결국 병사하고 말았다. 그가 남긴 것은 ‘나도 위안스카이처럼 권력의 단맛을 빨아먹겠다’는 부패한 지방 군벌들이었다. 국회의 다수파를 믿고 순진하게 위안스카이에게 총통자리를 내준 쑨원의 혁명은 무력하게 주저앉았다. 개혁은 또다시 실패했다.

이런 와중에 세계사적 이변이 일어났다.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성공해 소련이 탄생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에 양극단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이념의 실현에 흥분하거나, 노동자와 농민의 정권이 탄생하는 것을 보며 공포에 떨었다. 중국에서도 혁명에 열광하는 진보적 인사들이 천두슈 등을 중심으로 공산당을 탄생시켰다. 반면 혁명의 급진성에 놀란 사람들은 영국, 미국, 일본 등 외세에 더욱더 들러붙거나 아니면 국민당으로 모여들었다.

여기까지가 중국 공산당의 창당 직전까지 중국사의 흐름이다. 개혁이 실패할수록 더 강력한 개혁론이 등장했다. 급기야 황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넘어서서 공산혁명을 주창하는 정당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혁명이 성공하는 것은 음모나 선전선동 때문도 아니요, 소련의 지원덕도 아니다. 보수적이거나 중도적인 또는 덜 급진적인 개혁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혁명의 성공은 그 이전의 개혁이 실패하는 데 안팎으로 연관된 모든 사람들의 합작품이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하지 않으면 실망한 민심은 혁명으로 기울어간다.

상하이 쿠데타, 장제스의 배신

공산당 창당 유적지를 떠나 상하이 쿠데타의 흔적을 찾아가기로 했다.

상하이, 지금은 말 그대로 바다(海)로 오르는(上), 즉 세계로 나가는 중국의 출구지만, 1843년 개항할 때에는 창강 하구의 조그만 마을이었다. 상하이 근현대사의 문을 열어젖힌 것은 아편전쟁의 패배로 인한 강제개항이었다. 제국주의의 디딤돌로 시작했던 것이다. 상하이는 제국주의의 세례를 받으며 천지개벽 수준으로 성장하고 변화했다. 성장의 그늘에서는 서구적 퇴폐 소비문화와 반제국주의적 급진혁명이라는 두 갈래의 흐름이 요동치며 끓어올랐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혁명과 반혁명의 이름으로 상하이라는 용광로 안에서 죽어갔다. 그런 사건 가운데 하나가 1927년 4월 12일 벌어진 상하이 쿠데타였다.

상하이 쿠데타는 국민당이 국공합작을 깨고 공산당의 뒤통수를 친 배신극이자 학살극이었다. 상하이 전역에서 3일 만에 공산당원과 진보 인사 그리고 시위 군중 6000여 명을 죽인 끔찍한 사건이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룽화龍華 열사능원, 상하이 쿠데타 사건이 이곳의 석상에 기록되어 있다. 이 자리에는 국민당 쑹후淞滬 경비사령부가 있었다. 쑹후 경비사령부는 1919년 이곳에 육군감옥을 만들었고, 1927년부터 1937년까지 수천 명의 공산당원과 진보적 인사들을 마구잡이로 처형했다. 지금은 경비사령부 구지舊址가 일부 보존되어 있고, 희생자들의 분묘와 함께 기념관, 조형물 등이 들어서 있다.

사령부 문루 안쪽에 ‘4.12’라는 숫자가 새겨진 석상이 있는데, 상하이 쿠데타에 저항했던 열사들의 기념탑이다. 시체 위로 쓰러지는 젊은 두 남녀와 뒤로 밀리면서도 총을 쏘며 저항하는 투사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가운데 단정한 글씨체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927년 4월 12일, 장제스는 깡패들을 동원해 자베이閘北와 난스南市 등에서 노동자 규찰대를 습격하면서 군대를 동원해 규찰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는 노동자들을 학살했다. 다음 날 국부군은 바오산로寶山路에서 시위 군중을 도살했다. 중국과 세계를 깜짝 놀라게한 412 쿠데타에서 공산당원과 혁명 군중 300여 명이 살해되었고, 500여 명은 체포되었으며, 5000여 명은 실종되었다.

실종이나 체포는 곧 이곳 룽화에서 처형당했음을 뜻한다. 전날 까지만 해도 제1차 국공합작(1924~1927년)은 혁혁한 성과를 이룩했다. 국공합작의 핵심은 공산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원에 입당할 수 있다는 것이고, 반대급부로 코민테른이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자금과 무기를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코민테른의 자금과 무기를 토대로 국민당은 황푸黃埔군관학교를 중심으로 국민당 정부의 군대, 즉 국부군을 키워나갔다. 국부군은 총사령관 장제스의 지휘 아래 1926년 북벌전쟁을 시작했다. 장제스는 지방 군벌들을 하나씩 순조롭게 제압해나갔다. 이제 동북 만주와 화베이華北를 장악하고 있는 장쭤린張作霖의 북양군벌만 타도하면 국민정부의 이름으로 중국을 다시 통일하는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국공합작에 의해 적지 않은 공산당 당원이 국민당에 입당해 활동했다.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정식 국민당원으로 활발하게 움직였다. 마오쩌둥도 저우언라이도 모두 국민당의 유능한 간부였다.

상하이 쿠데타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926년 6월 마오쩌둥은 국민당 제6기 농민운동강습소 소장이었다. 그해 11월에는 우한武漢으로 가서 국민당 중앙농민운동강습소를 창설했다.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기 직전에는 후난성 창사長沙 등지에서 국민당 이름으로 농민운동을 조직했다.

1926년에 시작된 북벌전쟁을 수행하며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와 훨씬 더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1924년 프랑스에서 귀국해서 곧장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푸군관학교의 정치부 주임으로 들어간 이래로 장제스의 신임을 받는 핵심 간부였다. 저우언라이는 1927년 3월 21일 제3차 상하이 노동자 무장봉기를 주도하여 상하이를 장악하고 있던 북양군벌 군대와 경찰을 무력화했다. 공산당원을 포함한 국민당의 좌파와 우파까지 망라하여 상하이시市의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상하이시 임시정부 선언은 상하이시 임시정부가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에 속한다는 점을 명시했다. 며칠 후에는 우한에 있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정식 비준을 받았다. 그다음 날 장제스는 북벌군을 이끌고 상하이로 무혈입성했다. 먼저 들어온 저우언라이가 문을 열어주자, 장제스는 북벌군을 이끌고 당당하게 입성했다. 이렇게 안팎으로 조응하여 상하이를 점령했지만, 저우언라이가 점령해서 ‘교장’ 장제스에게 과제물로 제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국민당 우파의 영수였던 장제스는 처절하리만큼 공산당을 잔인하게 배신했다. 첫 번째 희생자는 상하이 노동자 규찰대 대장인 왕서우화汪壽華였다. 노동자 규찰대는 저우언라이가 지휘한 제3차 노동자 봉기에서 선봉에 섰던 노동자 무장조직이었다. 왕서우화는 장제스의 후원자이자 깡패 두목인 두웨성杜月笙으로부터 4월 11일에 열리는 연회에 참석해달라는 초대장을 받았다. 초대장에 속은 왕서우화는 그날 밤 마대에 담긴 채 룽화의 한적한 야산으로 끌려가 산 채로 매장당했다.

다음 날 새벽 노동자 규찰대로 위장한 두웨성의 깡패들이 규찰대를 습격했다. 이들이 서로 충돌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국부군이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출동하여 상하이 곳곳에서 노동자 규찰대를 진압했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 군중에게 국부군이 발포하면서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대로건 골목이건, 광장이건 골방이건 보이는 대로 죽였다. 그들은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뒤통수에 권총을 대고 쏘는 ‘원 샷 원 킬’을 벌이기도 했다. 광장이나 대로에서 참수를 하고 허리를 동강내기도 했다. 체포된 사람들은 룽화의 육군감옥에서 처형을 당했다. 광장에 즐비한 시체에 칼을 하나씩 꽂은 채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412 상하이 쿠데타의 희생자들. 거리에 널린 시체들. 이 당시의 참혹함을 말해준다. 국민당을 깨끗이 한다는 명분으로 거리를 시체로 뒤덮어버렸다

상하이뿐만이 아니었다. 장제스의 학살극은 난징, 쑤저우, 우시, 항저우, 광저우 등으로 번져갔다. 2만 5000여 명의 공산당원과 좌익 인사들이 살해되었다. 명분은 국민당을 깨끗하게 한다는 청당淸黨이었다.

장제스는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4월 18일 난징南京에 국민정부를 따로 세웠다.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가 우한에 멀쩡하게 있는 상태에서 국공합작을 깨지 않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상하이 쿠데타가 발발하자 우한의 국민정부는 장제스를 제명하고 북벌 사령관 직위를 박탈한다고 선언했으나 실제로는 공허한 외침이었다. 오히려 다른 지방 군벌들이 우한 정부에 대해 장제스와 마찬가지로 공산당을 축출할 것을 요구하자 석 달을 못 버티고 굴복했다. 우한의 국민정부마저 장제스의 잔인한 청당 도살을 그대로 답습했다. 1927년 7월 다시 한 번 곳곳에서 무차별적으로 공산당원을 도살하고는 8월에 난징의 국민정부와 합쳤다.

이렇게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 국민정부라는 따뜻한 보육시설에서 처참하게 축출당했다. 이 보육시설의 운영비는 상당 부분 코민테른이 대주었다. 코민테른의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아 황푸군관학교 졸업생들을 자기 세력으로 키운 코민테른 최대의 수혜자 장제스가, 코민테른의 양아들인 중국 공산당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렸던 것이다.

장제스는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대중적 민족주의에서 미영 제국주의에 연결된 상하이의 강절江折(장쑤성과 저장성) 재벌, 즉 대자본과 매판자본 그리고 대지주로 옮겨 탔다. 장제스는 젊어서는 자신의 일기에 쓴 그대로 영국과 미국의 제국주의를 지독하게 증오했다. 중국인 매판자본에 대해서도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며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황푸군관학교 교장 시절에는 코민테른이 지원한 자금과 무기가 도착하자 한없이 감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쑨원이 죽고 권력의 정점에 가까워지면서 장제스는 젊은 시절의 열혈 민족주의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오직 권력만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926년에 시작한 북벌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난창南昌까지 평정했을 때 그는 이미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미국과 영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하이 자본가들과 비밀 협약을 맺어, 코민테른의 돈줄을 자르고 그들의 돈을 받기로 한 것이다. 그 대가는 공산당과의 결별이었다. 애당초 장제스는 공산당까지 끌어안을 정치적 포용력이 없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장제스는 상하이 쿠데타 이후 자신의 권력기반을 굳게 다지기 위해 쑹메이링과 결혼했다. 이를 위해 본부인과 이혼하고 첩들을 내보냈다. 당시 이 결혼을 두고 중미합작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중정中正(장제스가 서른 살 즈음에 취한 자신의 이름)과 메이링美齡의 결혼이자, 중국 우파와미국 자본이 결합했다는 뜻이다.

국민당은 상하이 쿠데타를 통해 한창 무르익고 있던 공산당과의 위험한 동거를 끝냈다. 당시 국민정부는 베이징의 북양군벌과 힘을 겨루는 판세였지, 공산당을 맞수로 여기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혁명의 대상을 중국의 구체제와 서구열강 제국주의에 장제스의 국민당까지 포함해야 하는 버거운 처지가 되었다. 판세는 공산당에게 현저하게 불리했다. 국민당이 거치적거리는 공산당을 핍박하자, 공산당은 도망치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 이것이 대장정 직전의 중국 정세였다.

공산당, 텅 빈 농촌으로 파고들다

그렇다고 해서 상하이 쿠데타가 장제스가 생각한 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장제스에게는 앓던 이를 단숨에 뽑아버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생각하지 못했던 미묘한 반작용이 잠복해 있었다. 장제스에게는 앓던 이였는데, 국민당에게는 생니를 뽑은 결과가 되었다. 생니 하나를 무리하게 뽑아낸 자리는 출혈이 심했다. 출혈이 아무는가 싶더니 그 옆의 멀쩡한 이들이 서서히 빈 자리로 기울어갔다.

이런 상황은 상하이 쿠데타 이후 국민당 당원의 변동에 그대로 나타났다. 상하이 쿠데타 이전에 국민당의 일반 당원은 121만여 명이었다. 당원 수에 비해 공산당원이 차지한 보직이나 활동의 비중이 커 보이지만 공산당원은 5만 명 정도였다. 응집력은 있으나 수적으로는 소수였다. 그런데 이듬해인 1928년 3월 국민당의 당원 총수는 고작 22만 명이었고, 1929년에 29만 명으로 조금 늘었을 뿐이다.

공산당원과 진보인사, 거기에다 시위 군중까지 학살한 일로 인해 국민당 당원의 상당수를 차지하던 중도와 좌파가 빠져나갔던 것이다. ‘신분상 좌파’인 노동자, 농민뿐만 아니라 ‘연령상 좌파’인 청년당원들이 국민당에 진저리를 치면서 등을 돌렸다. 이탈자들은 거의 쑨원의 삼민주의를 추종하거나 중도 수준이었지 좌파나 공산주의자로 간주할 정도는 아니었다. 풀뿌리 당원들이 대거 이탈한 자리에 대도시 자본가, 농촌 지주, 향신 들이 입당 지원서를 들이밀었다. 세리 같은 고질적인 부패 계층과 토비土匪와 깡패 등 민심과 상반되는 패악한 인간들이 상당수 몰려들었다. 매판자본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도 국민당 당원이 되었다.

농촌에서는 국민당원을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국민당원치고 농민운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노동운동을 주장하는 당원도 깔끔하게 사라져버렸다. 국민당이 사회 기층으로부터 완전히 결별한 셈이었다. 도시에서는 자본과 권력에 연계된 당원이 적지 않았다. 농민이라는 거대한 인구와 농촌이라는 광대한 지역을 방치했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수만 명의 치명적인 인명 손실을 겪었다. 자기 한 몸 살아남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장제스가 내팽개친 농촌은 공산당의 서식처이자 독점적인 근거지가 되었다. 불행은 일시에 닥쳐왔으나 기회라는 선물을 허리춤에 차고 있었던 것이다. 농촌이라는 거대한 기회의 공간에 앞장서서 파고든 사람이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그는 이미 토지혁명을 주창하면서 농민운동, 농촌혁명을 끈질기게 일구어오고 있었다.

이제 우리의 여정은 마오쩌둥을 찾아갈 차례다. 마오쩌둥이 태어나고 성장한 후난성 성도 창사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