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대장정 1 – 그날 기묘한 탈주가 시작되다 1

장정이 아닌 탈주

1934년 10월 17일 오후, 중국 남부 장시성 위두현雩都縣의 위두하雩都河. 중국 공산당이 1931년 11월에 건국을 선포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수도 루이진瑞金에서 서쪽으로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정부와 공산당의 중앙기관, 홍군 5개 군단 총 8만 6000여 명(이하 ‘중앙홍군’으로 통칭한다)이 위두하에 설치된 부교를 건너 북에서 남으로 도강하기 시작했다. 중앙홍군은 7개 그룹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중앙기관과 직속 부대 1만 4000여 명은 중앙 종대와 군사위원회 종대로 구성되었다. 홍군은 제1군단, 제3군단, 제5군단, 제8군단, 제9군단, 총 5개 군단의 7만 2000여 명이었다.

8만 6000여 홍군이 강을 건너다

강가에는 중앙홍군과 그들을 보내는 가족과 친척, 현지 주민들로 북적거렸다. 그곳은 마치 거대한 장터를 방불케 했다. 강을 건너는 대오가 끝이 없었다. 밤이면 횃불을 들고 건넜다. 전체 인원이 강을 건너는 데만 꼬박 2박 3일이 걸렸다.

병사만이 아니었다. 대량의 물자도 함께 건넜다. 주석 50톤, 구리 50톤, 고철 10톤, 다량의 초석, 공산당 지하조직이 광둥성廣東省에서 구입해온 3만 발의 탄약을 포함한 상당량의 무기, 침구 2만 6000여 점, 집집마다 분담해서 만든 짚신 30만 켤레, 식량 33톤, 공채를 팔거나 기부받아 조성한 군자금 160만 위안, 부녀자들이 머리 장식까지 빼서 기부한 2만 위안 상당의 은, 말과 소, 수레, 문서 상자에 인쇄기까지…….

그렇게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인원과 물자를 보면 군대가 아니라 나라가 통째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멀리서 보면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것은 참으로 기묘한 행군이었다.

먼저 ‘장정’이라는 말부터 기묘하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부군에게 다섯 차례나 포위 공격을 당한 끝에 더는 견디지 못하고 탈주하는 처지에‘정복’이라는 말 자체가 우습지 아니한가.

중국 공산당이 대장정을 기획하고 결정하는 단계에서는 ‘전략전이戰略轉移’라는 말을 주로 썼고, ‘돌위突圍’나 ‘서정西征’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전략전이는, 루이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홍군이 장제스의 포위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후난성 서부를 근거지로 하던 홍군 제2군단, 제6군단(훗날 제2방면군으로 개편한다. 이하 ‘제2방면군’으로 통칭한다)과 합치기 위해 전략적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했다. 돌위는 말 그대로 국부군의 포위를 돌파한다는 뜻이다. 서정은 서쪽, 즉 후난성 서부로 가기 위해 행군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장시성은 후난성 옆에 붙어 있어 굳이 ‘먼 거리 행군’을 뜻하는 장정이라고 붙일 계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전략전이를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난 1934년 11월 말 샹강湘江 전투에서 8만 6000여 병력이 3만여 명으로 폭삭 주저앉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이 상황에서 홍군은 국부군의 끈질긴 추격과 포위 공격 때문에 후난성 서부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구이저우성貴州省으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구이저우성에 들어가서도 북상하여 창강長江을 건너지 못했다. 결국 후난성으로 들어가 제2방면군과 합류하는 것을 포기하고, 쓰촨성 서북부의 제4방면군과 합류하는 것으로 대장정의 목표를 바꾸었다. 장궈타오張國燾가 이끄는 제4방면군과 합류하여 섬서성 북부로 가기로 했다. 이렇게 처음 예상과 달리 이동 거리도 한없이 늘어나고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게 되자 홍군 내부에서는 ‘장정’이라는 또 다른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 그대로 머나먼 장정이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묘한 것은, 대장정 출발 시에 마오쩌둥은 정치적으로 왕따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 공산당을 마오쩌둥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장정은 마오쩌둥이 기획한 것이 아니었고, 처음에는 주도하지도 못했다.

1934년 10월, 마오쩌둥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집행위원회(중앙정부) 주석, 즉 대외적으로는 국가를 대표하는 주석이었고 행정부의 수장이었지만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1931년 11월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이 창설될 때 집행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어 9부1국이라는 행정부 조직을 통할했다. 그러나 대장정 출발 9개월 전인 1934년 1월에 9부1국이 인민위원회(국회) 산하로 이관되었다. 마오쩌둥은 내각책임제의 대통령, 그 가운데서도 허름한 집에서 텃밭이나 가꾸며 소일하는 처지와 다를 게 없었다.

대장정은 당시 코민테른에서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오토 브라운Otto Braun(중국 이름 리더李德)이 발의하고, 중국 공산당 최고 책임자인 보구博古(본명 친방셴秦邦憲)가 코민테른의 비준을 받아 결정한 것이다. 보구는 모스크바 유학파 출신으로 소련의 신임을 받는 27세의 젊은이였다. 요즘으로 치면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수재였다.

그날 마오쩌둥은 왕따였다

중국 공산당 창당 대의원으로 시작해서 1927년 후난성의 추수봉기와 징강산井岡山 유격전을 거쳐 장시성 남부에 소비에트를 건설해낸 마오쩌둥에 비하면, 보구는 나이나 경력에서 애송이 수준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그를 신임했다. 당시 소련은 중국 공산당에게는 이념적 이상이었고, 코민테른을 통해 모든 것을 재가받아야 하는 상전이자 돈줄이었다.

그런 탓에 이래저래 모스크바 유학파들이 실세를 이루었다. 마오쩌둥은 공산당의 군대인 홍군에 대해서도 지휘는커녕 발언할 입장조차 되지 못했다. 자신이 장정에 참가할지 잔류할지도 스스로 결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1934년 6월 대장정이 결정되자 구체적인 방법을 세세하게 준비하고 결정하는 것은 보구, 오토 브라운,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이 3인단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대장정을 출발할 때 마오쩌둥은 말라리아 후유증으로 들것에 실려 위두하를 건너야 했다. 왕따 신세인 데다 몸도 성치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저우언라이가 때때로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고 그의 의견을 청취해주는 것이 위안이었다.

또 하나 기묘한 것은 출정하는 홍군과 송별하는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당시 홍군 전사들 가운데는 자연스레 장시성 출신이 많았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공산당 홍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토호와 지주들을 처단하고 재산과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국가체제였다. 소작료에 등골이 휘다가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공산당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농민의 아들들은 공산당의 홍군 모집에 흔쾌하게 응했다. 나이도 어려서 17세부터 24세까지가 홍군의 54퍼센트를 차지했다.

홍군이 대거 이동한다는 것은, 곧 누군가의 아들이, 남편이, 아버지가 떠나는 것이었다. 아이를 업은 엄마와 중노년의 부모들이 송별을 나왔던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 남은 가족이 떠나는 전사를 걱정하게 마련이지만 거꾸로였다. 떠나는 아들이 남은 가족을 더 걱정해야 하는 기묘한 송별이었다. 홍군이 떠나면 곧이어 국부군이 들이닥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무차별적인 피의 보복이 벌어질 터였다. 홍군은 ‘혁명의 핵심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다시 말해 ‘우리라도 살아남기 위해’ 부모자식 같은 피붙이는 물론 부상병 동지와 자신들을 지지해주던 지역주민들을 떼어놓고 떠나야 했다. “양민 3000명을 오인해서 죽이더라도 공산당원 한 명을 죽이면 된다!”라며 멸공을 독려하던 장제스의 군대가 독기를 품고 들이닥칠 곳에 가족과 동지를 남겨두고 떠나는 장정, 그것이 대장정의 출발이었다.

남겨진 가족들은 잔류자로 구분되었다. 마오쩌둥의 어린 자식도 동생 부부와 함께 잔류해야 했고, 그 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낙오된 홍군 잔류자들은 더욱 참담했다. 홍군 여성 전사 중에는 중앙간부의 부인 등 30명만 대장정에 참여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잔류해야 했다. 혁명을 위해 피를 나누다가 몸을 다친 동지들도 부상병이란 이유로 잔류해야 했다. 그들은 아픈 몸을 이끌고 결사대와 함께 남겨졌다.

알아서 생존하고 알아서 산으로 들로 숨어들어 살아남으라는 것이었다. 잔류자 명단에는 마오쩌둥의 친동생 마오쩌탄毛澤覃을 포함해 마오쩌둥과 가까운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마오쩌둥 자신이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배척당한 왕따였기에 더 그랬을 것이다.

떠나는 자가 남는 자를 걱정해야 하는 송별이었으니, 기묘한 분위기가 흐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대장정은 ‘폼 나는 멋진 행군’이 아니라, 최악을 피하는 차악의 선택으로 감행하는 패주였다.

관전자의 시각에서 더 기가 막힌 사실은 중앙홍군 8만 6000여 명이 약 열흘에 걸쳐 위두하 인근에 집결하여 2박 3일간 부교를 건너 탈출을 하고 있는데도, 장제스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는 것이다. 변장한 도둑 한 명을 10명의 포졸이 지키는 게 어렵기는 하지만, 8만 6000여 명의 대규모 병력이 2열 종대로 대오를 길게 늘어뜨린 채 탈출하는데도 전혀 몰랐다니! 홍군이 탈주를 결심할 만큼 1년 가까이 사방을 촘촘하게 포위해 압박하고 비행기까지 수시로 날리던 수십만 병력의 국부군이 이 대대적인 이동을 몰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장제스는 대장정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자그마치 2주일이나 걸렸다. 근거지를 탈출한 중앙홍군을 따라잡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던 것이다.

이런 기묘한 탈주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대장정 초기에 중앙홍군 \이 국부군의 포위망을 쉽게 통과한 것은 광둥성 북부를 지키고 있던 지방 군벌 국부군과 미리 밀약을 했기 때문이다. 전투를 하지 말고 길을 비켜주기로 했던 것이다.

광둥성 지방 군벌 천지상陳濟裳의 군대는 국부군에 속하지만, 장제스 직할 중앙군과 달리 여전히 군벌의 속성을 갖고 있었다. 장제스는 1926년부터 1928년까지의 북벌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지방 군벌의 군대를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군대로 흡수했다. 그러나 완전한 흡수통합은 아니었다. 일부는 자신이 직할하는 중앙군으로 흡수했지만, 성의 군벌 수장을 거의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천지상은 언젠가 벌어질 장제스와의 대결에 대비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온전하게 보존하려고 했다. 지방 군벌들은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공산당 토벌전에 동원되기는 했지만, 홍군이 자신의 구역으로 들어오지 않는 이상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전투에서 승패를 내려면 이기든 지든 상당한 전투력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기 근거지에 대한 장악력이 약해져, 장제스의 중앙군이 밀고 들어오면 꼼짝없이 흡수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광둥성 군벌 천지상은 홍군에게 밀사를 보내 서로 전투를 피하면서 필요하면 길을 터주기로 밀약을 했던 것이다. 천지상은 중화민국이 아니라 자신의 군벌 이익만을 좇았고, 장제스는 어설프게 구축한 군벌연합체제에 발목 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는 홍군에게는 하늘이 열어준 탈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