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民家紀行 – 25 섬서성 황토고원 요동

섬서성 황토고원 요동 – 동굴집에 담겨 있는 권력의 역사, 백성의 역사

상식의 눈높이에서 집은 땅과의 결합에 따라 땅에 붙여 지은 집, 땅 위에 띄어 지은 집, 땅을 파고 들어간 집의 세 가지로 나눌 수도 있다. 앞의 두 가지는 지금까지 답사해온 집들이다. 땅을 파고 들어간 집으로는 요동窯洞이 있다. 평이한 말로 동굴집이라 원시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지금도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주택이다. 중국 황토고원의 중심도시인 옌안延安에서 특이한 동굴집 요동을 찾아가 거기에 담긴 중국과 한국의 현대사 한 자락까지 더듬어보자.

중국의 황토고원은 황토가 50m 이상 최고 180m까지 퇴적된 해발 1500∼2000m의 고원이다. 산시성 수도 타이위안太原에서 시계방향으로 허난성 뤄양洛阳, 섬서성 수도 시안, 간쑤성 수도 란저우兰州, 칭하이성 수도 시닝西宁, 닝샤 회족자치구 수도 인촨银川, 산시성 다퉁大同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동서로는 1000여 km, 남북으로는 700여 km 정도다.

황토고원은 고비사막과 그 북쪽에서 수백만 년 동안 황토를 실어 날아온 북서풍과 연 강수량이200∼700mm에 지나지 않는 건조한 기후의 합작품이다. 황토가 퇴적된 부드러운 지질 탓에 강우와 하천에 의한 지표의 침식과 토사의 유실은 엄청나다. 연 강수량의 70%가 여름 3개월에 집중되는 강우의 특성도 큰 영향을 미친다. 비가 내리고 물이 흐른 곳은 날카롭게 파이고, 한 번 깎인 곳이 더욱 깊게 파인다. 그래서 황토고원의 상단은 밋밋하지만 계곡이나 산허리 등은 가파르다. 황하 중류에 거친 협곡이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숲이 없어 목재가 부족하고, 대륙성 기후라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찌는 더위가 이어진다. 이런 거친 환경에서 만들어진 집이 바로 요동이다. 황토라서 굴착이 쉽고, 경사가 많아 수평으로 파기에 적당하고, 땅속으로 들어가니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것이다. 목재 사용량도 적어 건축자재의 부담도 없다. 황토고원이라는 환경과 요동이라는 주택은 딱 들어맞는 조합이다.

요동은 수평형, 수직형, 독립가옥형의 세 가지가 있다. 수평형은 수평으로 파고 들어간,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수직형은 하침형이라고도 하는데 수직으로 파 내려간 다음 그곳에서 다시 수평으로 동굴을 판다. 수평형은 마당이 평지로 이어지지만, 수직형은 지붕이 평지로 이어진다.

요동의 반자는 반원형이라 방의 단면은 불감佛龕과 비슷한 형태(다. 황토고원에서는 일반 주택도 이런 형태로 방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것을 독립가옥형이라고 한다.

수평 요동의 방은 좌우로 늘어서게 되는데, 방 사이를 뚫어서 통로로 연결하기도 한다. 10여 개 이상의 방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면 다른 주택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이 연출된다. (위의 사진은 요동을 이용한 호텔이다.)

방의 정면에는 좌우 한쪽에 방문이 달린다. 방문 옆으로는 하단이 흙벽이고, 흙벽 위로 방문 높이에 맞춰 사각형의 채광창을 설치한다. 방문 옆의 하단 흙벽은 밖으로 아궁이가 붙어 있는데, 아궁이는 방안의 침상에 연결된다. 침상은 80∼90cm 높이로 온돌 구조인데 방안에도 또 하나의 아궁이가 있다. 바깥 아궁이는 여름의 취사용이고, 방안의 아궁이는 겨울의 취사 겸 난방용이다(아래 사진).

방문과 창문의 윗부분에도 반원형의 채광창을 설치해 채광면적을 최대화했다. 문에서 마주 보는 정면에는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 주변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보살상을 모신 감실龕室처럼 작은 요동을 만들어 조상의 위패를 모시거나, 큼지막하게 파내 저장 공간으로 사용한다. 동굴을 파서 방으로 사용하는 간단한 구조이지만 구석구석 들여다보면 꽤 흥미롭다.

요동은 지금도 많은 사람이 실용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살림집이다. 섬서성이나 산시성 서부에 가면 어느 지역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데, 특히 황토고원의 중심에 있는 옌안에 가면 백성들의 생활뿐 아니라 중국의 뜨거운 현대사도 진하게 담겨 있다.

옌안은 1934∼35년 중국 공산당 홍군의 목숨이 걸렸던 장정長征의 종착점이자 장정 이후 1948년까지 공산당 지도부가 머무르던 수도였다.

장정은 1934년 10월 중국 공산당이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의 공격에 밀려 장시성 일대에 선포했던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포기하고 서쪽으로 탈출하면서 시작된 대대적인 도주였다. 국민당군의 추격에 밀리고 밀린 중국 공산당 홍군紅軍은 1년에 걸쳐 1만여 km를 필사적으로 도주한 끝에 섬서성 황토고원에 도착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재기에 성공했다. 결국 1949년 마오쩌둥은 장제스에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옌안은 중국 공산당에게는 혁명의 성지다.

옌안에는 새로 지은 옌안혁명기념관(위 사진)을 비롯해 공산당 중앙서기처가 있었던 조원棗園 혁명유적지, 중국 중앙군사위원회와 팔로군 총사령부 소재지였던 왕자핑王家坪 혁명기념관 등 140여 곳의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이곳을 둘러보면 마오쩌둥을 비롯한 저우언라이, 주더, 류샤오치 등 공산당 수뇌부들이 사용하던 숙소와 집무실 등이 있는데 모두가 요동이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남부 출신 수뇌부들은 북방의 온돌에 익숙지 않아 온돌 침상을 없애고 목재 침대를 사용했다는 것이다(위 우측 사진). 주택은 환경에 맞춰지었지만, 가구는 습관에 따라 바꾼 셈이다.

옌안의 크고 화려한 혁명기념관과 유적지 등을 돌아보면 장정과 옌안이 바로 오늘의 중국을 잉태시켰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러나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장정이란 국민당 군대가 맹렬하게 추격했고, 마오쩌둥과 홍군은 필사적으로 도주한 것이다. 장정을 시작했던 홍군은 8만 5000명이었지만 그 가운데 살아서 황토고원에 도착한 홍군은 3000명에 불과했다. 95% 이상이 죽거나 실종되거나 이탈했는데, 왜 철수나 도망, 탈주가 아니고 ‘긴 정복長征’이라는 극적인 말로 바뀌었을까. 국민당은 군수물자, 화력과 병력에서 월등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공산당에게 패배했고, 마오쩌둥은 천안문 광장에서 승리를 선언할 수 있었을까.

마오쩌둥은 장정을 시작할 당시 주석의 지위에 있었지만, 당시의 주석은 내각책임제 하의 대통령과 같은 명목상의 지위였다. 당서기인 저우언라이, 소련이 전폭적으로 지지한 모스코바 유학생 출신의 젊은 청년 보구博古, 코민테른이 파견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 등 3인위원회가 실권을 움켜쥐고 있었다. 장정 자체도 마오쩌둥이 아닌 3인위원회가 결정한 것이었다. 장정을 시작할 때 탈주해서 생명을 보존할 사람은 누구인지, 누가 남아 국민당 추격군을 죽음으로 막아낼지, 기묘한 살생부를 세세하게 정한 것 역시 3인위원회였다. 그러나 홍군이 옌안에 도착했을 때에는 마오쩌둥 1인이 전권을 틀어쥐

고 있었다. 어떻게 도주 중에 이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을까.

마오쩌둥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한 번도 읽지 않았다고 한다. 《사기》와 《자치통감》을 즐겨 읽고, 입으로는 《수호지》와 《손자병법》을 논했다는 마오쩌둥은 어떻게 프랑스 유학파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소련 유학파 보구 등 총명한 지식인들이나 펑더화이 등 쟁쟁한 군사 지휘관들을 제치고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가 된 것일까.

답은 각각 다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마오쩌둥이 적군인 장제스에 대해서도, 내부의 경쟁자에 대해서도 승리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은 장제스를 쓰러뜨린 결정타는 마오쩌둥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국민당은 부패해서 스스로 망가졌고, 스스로 백성들을 떠나게 했던 것이다. 공산당 내부 경쟁에서도 마오쩌둥의 경쟁자들은 공산주의 이론에 충실했지만 마오쩌둥은 중국 현실과 중국의 전통에 밀착했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도주하면서도 각 지역에서 마주친 수많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식량을 차출하면 차용증을 써주었고, 주인 없을 때 물건이 훼손되면 메모와 함께 돈을 놓아두었고, 숙영지는 깨끗하게 뒤처리를 하고 떠났다. 백성들에게는 먼저 호의를 보였고, 경계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신들의 적이 우리의 적이라고 감성에 호소하여 연대와 협조를 이끌어냈다. 이것이 장정의 미학이다

장제스는 그 반대였다. 군림하고 억누르고 빼앗는 게 일상사였다. 그리고 힘이 있을수록 더 심하게 부패했다. 마오쩌둥 입장에서는 부패에 감염된 채 허우적거리는 거구 장제스를 쓰러뜨리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장제스의 국민당에게 승리를 선언한 1949년 10월 1일 이후 마오쩌둥의 ‘정치학’은 장정의 ‘미학’과는 달라졌다. 혁명과 항일은 열정이었으나 정치는 독선과 냉기뿐이었다. 마오쩌둥이 경제정책에 실패하여 2000만여 명을 굶어 죽게 하면서 그의 권력이 흔들리자 문화혁명이라는 이름의 가장 반문화적인 만행을 쏟아내기까지 했다. 마오쩌둥의 장정 동지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장정에서는 피 끓는 동지였으나 권력에서는 정쟁의 표적이었을 뿐이었다.

혁명의 열정은 황토고원의 요동에 던져둔 채 권력의 논리만 둘러메고 베이징에 입성한 것이다. 그때의 열정은 지금은 화려한 기념관에 승자의 박제된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역사와 혁명의 씁쓸한 이면이다.

그런데 옌안의 요동 안에 던져진 채 사라진 역사는 우리에게도 있다. ‘연안파’라고 하는 일군의 조선인 항일 정치세력의 존재가 그들이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당시 옌안 시내에서 동북 4km 거리에 있는 뤄자핑罗家坪이란 마을에는 공산주의 계열의 조선혁명 군정학교를 중심으로 1,100여 명의 항일투사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무정이 중심인물이었다. 충칭 임시정부의 항일투사 850여 명보다도 많은 숫자다. 이들은 1944년 4월 산시성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섬서성 옌안으로 이전해 교사를 신축하고 1945년 2월 다시 문을 열었다. 이때 교장은 김백연, 부교장은 박일우라는 인물이었다. 군사학, 조선 문제, 일본 문제를 비롯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정치경제학 등의 과목을 개설해 이론교육과 군사훈련을 병행했다. 이들이 해방 후 북한에서 연안파라고 불리는 세력이다.

연안파가 기거하고 교육하던 공간은 모두 요동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학교와 숙사 모두 거의 흔적이 없어졌다. 단지 뤄자핑 마을 입구에 옌안 문물관리위원회가 1996년에 세운 낡은 표지석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다. 당시에 10대 청소년 시절을 보낸 마을의 노인에게 조선인들의 숙소와 학교를 안내해달라고 하니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뒷산 귀퉁이의 허물어진 요동을 안내해준다. 누군가 심어놓은 호박 넝쿨이 잡풀과 뒤섞여 있다(위 사진).

일제가 패망하자 군정학교의 지도부가 먼저 1945년 8월 하순 북한으로 귀국했다. 나머지 역시 이념에 따라 대부분 북한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장정에서의 혁명가 마오쩌둥과 해방 이후의 권력자 마오쩌둥이 딴판이었듯이, 연안파에게도 해방 후의 국내 정치는 권력쟁투의 늪이었다.

북한의 권력을 선점했던 갑산파의 김일성이 소위 종파사건을 일으켜 연안파 출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해버린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념 대결의 전쟁 이후 기억에서 삭제되다시피 했다.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몸을 던져 대륙을 헤맸건만 일제가 패망하자 또 다른 해일이 덮쳐버린 것이다. 마오쩌둥의 장정 동지들이 마오쩌둥에게 숙청당했듯이.

6·25전쟁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적군으로 참전했던 마오쩌둥의 중국과는 수교를 하고 통상을 하면서 서로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연안파 1,100여 명은 남북 어디에서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어졌다. 마을 입구의 초라한 표지석 하나가 그들의 존재를 희미하게 전해줄 뿐이다(위 사진).

다시 중국 이야기로 돌아가서, 팔로군 총사령부가 주둔했던 왕자핑 기념관에서 또 한 무리의 이름 없이 잊혀진 사람들을 더듬어봤다. 총사령부가 주둔했던 자리에 살던 백성들은 어디로 갔을까.

멋진 군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여성 안내원에게 물었다. 바로 뒷산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혁명군에게 집터를 내준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느린 걸음으로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를수록 허름한 흙길, 아무렇게나 자란 풀, 껍질 벗겨진 나무, 그냥 쏟아버린 생활하수, 찌그러진 문짝, 코 흘리며 흙에서 노는 꼬질꼬질한 아이들……. 가난의 땟국물이 덕지덕지 엉겨 붙은 허름한 요동들이 나타난다. 70여 년 전 팔로군 총사령부에 자리를 내준 백성들의 후손이 사는 산동네다.

아마도 이 산동네에 외국인이 찾아 올라온 것은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낯선 이의 방문을 어색해하다가 이내 순박한 웃음으로 반겨준다. 아이들이 먼저 모여들고, 아이 엄마와 동네 아저씨들 열댓 명이 호기심 어린 선한 눈길로 모여든다. 한국은 얼마나 멀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묻고, TV에서 본 한국의 드라마를 묻기도 한다. 누구 하나 이념이나 전쟁과 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이다.

혁명은 광풍이었고 광풍의 끝은 권력이었다. 승리한 권력은 기념관에서도 박제된 위세를 떨치고 있고, 밀려난 이들은 삭제되었고, 백성들은 허름한 요동에서 크게 다를 것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어디를 가나 혁명의 앞면에는 피와 열정이, 이면에는 권력의 치부가 널려 있다. 권력과 이념으로 삭제된 이들, 이제는 담담한 마음으로 기억을 되살려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