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 – 난양소하록灤陽消夏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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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사인(中書舍人) 진운정(陳雲亭)이 해준 이야기이다. 대만(臺灣)으로 문서를 전달하러 가던 한 관리가 관사에서 머물다가 한 아름다운 여자가 담에 올라 뜰 안을 살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자를 꾸짖고는 찾아보았지만,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한밤중에 갑자기 꽝 ― 하는 소리가 나더니 기와 조각이 날아 들어와 베개 옆에 떨어졌다. 이에 “어떤 요괴이기에 함부로 천자의 사신을 모독하느냐?”하고 묻자, 창 밖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께서는 부귀도 있고 팔자도 좋으신 편인데, 제게 공을 피할 틈도 주지 않고 저를 꾸짖으셨습니다. 저는 이 일이 신명에게 발각될까 두려워 지금까지도 전전긍긍하며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공께서는 주무시는 와중에도 사념이 싹터 저를 역졸의 딸로 잘못 알고 다른 날 첩으로 맞아들일 수 있을 지를 궁리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마음에 사념이 한 번 싹트면 귀신들은 바로 그것을 알아챕니다. 사악함이 사악함을 불러들인 격이니, 신명도 이 때문에 저를 탓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와를 던져 공에게 앙갚음하려 했던 것인데, 공은 어찌하여 화를 내시오?”

사신은 몹시 부끄러운 나머지 이튿날 해가 채 뜨기도 전에 급히 행장을 꾸려 떠나갔다.

陳雲亭舍人言: 有臺灣驛使宿館舍, 見艶女登墻下窺, 叱索無所睹. 夜半琅然有聲, 乃片瓦擲枕畔. 叱問: “是何妖魅, 敢侮天使?”, 窓外朗應曰: “公祿命重, 我避公不及, 致公叱索. 懼干神譴, 惴惴至今. 今公睡中邪念, 誤作驛卒之女, 謀他日納爲妾. 人心一動, 鬼神知之. 以邪召邪, 神不得而咎我. 故投瓦相報, 公何怒焉?” 驛使大愧沮, 未及天曙促裝去.

20

어사(御史) 섭려정(葉旅亭)의 집에 갑자기 여우가 나타나 소란을 피웠다. 대낮에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섭려정에게 집을 양보하라고 몰아세웠다. 또 까닭 없이 소란을 피워 집안을 휘저어 놓았으며, 집안의 잔과 쟁반까지도 절로 춤추게 하고 안석과 걸상도 절로 움직이게 했다. 섭려정이 장진인(張眞人)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장진인은 법술(法術)에 뛰어난 법관(法官)에게 그 일을 맡겼다. 법관이 먼저 부적 한 장을 그려 펼쳐 놓자 여우가 나타나 부적을 찢어버렸다. 다음으로 [여우의 죄상을 적은] 문서를 성황신에게 바쳤지만 역시효험이 없었다. 그러자 법관이 말했다.

“천호(天狐)가 틀림없으니, 상주문을 써서 상제(上帝)께 부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는 칠일동안 도량(道場)을 꾸몄다. 도량을 꾸민 지 삼일 째 되던 날 여우는 전과 다름없이 욕을 해대더니 나흘째 되던 날은 좋은 말로 화해를 청해왔다. 섭려정은 여우와의 관계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고, 또한 그 일을 끝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장진인이 말했다.

“상주문이 이미 상제에게 전달되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도량을 꾸민 지 칠일 째 되던 날 갑자기 쿵쾅! 하고 심하게 다투는 소리가 나더니 창과 문이 떨어져 나갔다. 날이 채 저물기도 전에 법관이 다른 신을 불러 도움을 청해서 겨우 여우를 사로잡아 항아리 안에 넣어서 광거문(廣渠門) 밖에 묻었다.

내가 한번 장진인에게 귀신을 몰아낼 수 있었던 이유를 물은 적이 있는데, 장진인이 말했다.

“저 역시 그저 법술을 행했을 뿐 그 이유는 모릅니다. 무릇 귀신들은 모두 도량에서 인끈을 받아 복역하고, 부록(符籙)은 법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진인은 관(官)의 우두머리와 같고, 법관은 서리(胥吏)와 같습니다. 진인은 법관이 아니라서 부록을 행할 수 없고, 법관은 진인의 인끈이 없으면 그의 부록도 영험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록은 영험함이 있고 어떤 부록은 영험함이 없는데, 그것은 마치 각 관사에서 상주문을 올렸을 때 인준을 받아주기도 하고 반박을 당하기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우리가 일일이 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다시 물었다.

“만약 깊은 산의 빈집에서 갑자기 요괴를 만나도 그대는 능히 그들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장진인이 말했다.

“조정의 관리도 길을 가다 도적의 습격을 받으면 달아나 숨기 마련입니다. 혹시라도 도적이 무지하게 일어나서 대관(大官)의 의장(儀仗)을 범한다면, 비록 병권을 쥔 대신이라 하더라도 군사들을 부르지 못할 것이니 일시에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이 말 역시 대단히 믿음이 간다. 그러나 이상의 모든 신기한 이야기는 모두 견강부회한 것이다.

葉旅亭御史宅, 忽有狐怪. 白晝對語, 迫葉讓所居. 擾攘戲侮, 至杯盤自舞, 几榻自行. 葉告張眞人, 眞人以委法官. 先書一符, 甫張而裂. 次牒都城隍, 亦無驗. 法官曰: “是必天狐, 非拜章不可.” 乃建道場七日. 至三日, 狐猶詬詈, 至四日, 乃婉詞請和. 葉不欲與爲難, 亦祈不竟其事, 眞人曰: “章已拜, 不可追矣.” 至七日, 忽聞格鬪砰국, 門窓破墮. 薄暮尙未已, 法官又檄他神相助, 乃就擒, 以罌貯之, 埋廣渠門外.

余嘗問眞人驅役鬼神之故, 曰:“我亦不知所以然, 但依法施行耳. 大抵鬼神皆受役於印, 而符籙則掌於法官. 眞人如官長, 法官如吏胥. 眞人非法官不能爲符籙, 法官非眞人之印, 其符籙亦不靈. 中間有驗有不驗, 則如各官司文移章奏, 或準或駁, 不能一一必行耳.” 此言頗近理, 又問: “設空宅深山, 猝遇精魅, 君尙能制伏否?” 曰: “譬大吏經行, 刦盜自然避匿. 儻或無知猖獗, 突犯雙旌, 雖手握兵符, 徵調不及, 一時亦無如之何.” 此言亦頗篤實. 然則一切神奇之說, 皆附會也.

21

염운사(鹽運使) 주자영(朱子穎)이 해준 이야기이다. 그가 산동(山東)의 태안(泰安)을 다스릴 때 한 서생이 태산(泰山)의 깊은 산중에 갔다가 석벽에서 갑자기 사람의 말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어디서 경향각(經香閣)의 향기가 나는데, 설마 전생에서 온 사람은 아니겠지?”

쿵! 하는 굉음과 함께 절벽이 반으로 나뉘면서 아름답고 웅장한 누각이 산꼭대기에서 나타났다. [그 때] 관을 쓰고 허리띠를 찬 한 노유(老儒)가 문밖으로 나와 [자신을] 맞이했다. 서생은 깜짝 놀라서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노인이 말했다.

“여기가 바로 경향각(經香閣)이오.”

서생이 머리를 조아리며 경향의 뜻을 묻자, 노유가 말했다.

“말하자면 기니, 여기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옛날에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산정하고 나서야 그 가르침이 만세토록 전해졌고, 미언대의(微言大義)도 대대로 전해졌소. 한대(漢代)의 유학자들은 공자가 살던 시대로부터 멀지 않았기에 뜻을 풀이하고 주를 달아 대충 앞 시대 성현들의 뜻을 엿볼 수 있었소. 또한 그 당시의 질박한 문풍을 버리지 않았고, 사람들도 학파를 만들거나 명리(名利)를 추구하는 악습에 물들지 않은 채, 오직 각자 자신의 학설을 전수하고 학문의 연원을 밝히는데 힘썼소. 당대에 와서도 이런 문풍은 바뀌지 않았소. 북송(北宋)에 와서 칙령으로 《십삼경(十三經)》에 주석 작업을 해 성현의 뜻을 찬미했소. 그러나 몇몇 대유(大儒)들은 새로운 학설이 날로 일어나고, 그로 인해 성현의 학문이 끊어질까 걱정해 이 경향각을 세우고, 성현의 전적을 보관했소. 중앙에 있는 것은 최초 판각본(板刻本)으로, 오색옥(五色玉)으로 함을 만들어 보존하는데, 바로 공자의 가르침을 존중해서 이오. 그리고 역대의 관각본(官刻本)을 함께 배치해 백옥(白玉)으로 만든 함에 넣어서 보존하는데, 역대 제왕들의 학문을 중시한 공로를 표창하기 위해서이며 모두 남쪽으로 향하게 했소. 좌우에 진열된 것들은 역대 각 학자들의 사각본(私刻本)이오. 한 권씩 완성될 때마다 최초로 찍어낸 것이나 뛰어난 것은 골라 간행된 연대에 따라 순서를 정하고 동서양쪽으로 진열해 두었소. 이들 전적은 창옥(蒼玉)으로 만든 함에 넣어서 보존하고 있는데, 이는 고적을 아끼는 사가들의 공로를 격려하기 위함이요. 이상의 전적들은 모두 산호로 이름을 붙이고 황금으로 만든 자물쇠로 봉해 두었소. 동서 양쪽 처마 아래로 침향목(沈香木)과 단향목(檀香木)으로 만든 탁자가 있고, 수놓인 비단으로 만든 방석을 깔아두었소. 역대 유학자들의 영혼이 1년에 한 번 이곳에 와서 살피고 경향각에 나란히 줄지어 앉아 경의를 이야기한다오. 경향각 뒤쪽에 있는 세 기둥 안에는 당대 이전 유학자들의 경의들을 수놓인 비단 끈으로 책을 묶어 여기에 모아두었소. 이 이외에 자기키만큼이나 많은 저술을 남기고 그 명성이 세상을 뒤덮을 만큼 뛰어나며 자신의 책을 명산에 보존하도록 놔둔다하더라도, 경향각의 문에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수 없는데, 이것은 바로 성현의 유지 때문이라오. 자시와 정오가 되면 경향각 내의 장서의 글자와 구절에서 진한 향기를 발산했기에 경향각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오. 모든 우주의 원기가 끊임없이 운행하고, 음양 두 기운이 왕성하게 움직이오. 음기는 정오에 생겨나고 양기는 자시에 생겨나는데, 이때 성인의 뜻과 천지가 서로 통하게 된다오. 그래서 유명한 유학자들이 성인의 도리를 밝힘에 그 가운데 깊고 오묘한 부분은 천지와 통하기 때문에 서로 교감하게 되지요. 그런데 성인의 도리는 반드시 이런 학자들에게 전해야지 모름지기 들을 수 있으니,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세상 학자들 가운데 불을 밝혀 낮을 이어 밤에도 《십삼경》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고, 종신토록 경을 파고들고 우러러 보는 사람도 있소. 또 개중에는 경을 연구하다 온갖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이는 각자의 성정과 학문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오. 그대의 4대조 할아버지께서는 판각공(板刻工)이셨는데, 일찍이 직접 《주례(周禮)》의 일부를 판각했소. 그래서 그 향기가 지금까지 남아 있었기에 나는 그대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소.”

그는 노유의 인도아래 경향각의 모든 곳을 보고 차까지 얻어 마실 수 있었다. 떠날 때가 되자 노유가 말했다.

“그대는 자중자애 하시오. 이곳은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오.”

서생이 뒤를 돌아보았더니, 만산 봉우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을 뿐 인적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은 황당하게 들리는데, 아마도 한학(漢學)을 숭상하는 학자가 만들어낸 우언(寓言)같다.

무릇 한대의 학자들은 전적으로 훈고를 했고, 송대 학자들은 의리(理義)로서 서로 숭상했다. 한학은 대략적이고 송학은 깊이가 있는 듯하지만, 그들은 훈고에 밝지도 않았는데, 의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일률적으로 헐뜯고 비방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하찮게 보았는데, 이것은 바로 큰 수레를 완성하고 추륜(椎輪)의 결점을 지적하고, 나루터를 건너고 난 뒤에 뗏목을 불태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송대 학자들을 비난하는 풍조가 분분히 일어났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사고전서》「시부총서(詩部總序)」를 편찬할 때 이렇게 썼던 것이다.

“송대 학자들이 한대 학자들을 비난함에 있어 경의 뜻을 반박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오직 한대 학자들을 뛰어넘으려 했다. 후대의 학자들도 송대 학자들을 비난함에 경의 뜻을 반박하는 데서 끝내지 않았는데, 송대 학자들이 한대 학자들을 비방한 것에 대한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다.”

위소주(韋蘇州)의 시에 다음 구절이 있는데,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을 두고 한 말이다.

물의 속성은 본디 구름처럼 조용하고,

돌과 돌 사이에도 소리가 없건만.

[그런데] 어찌하여 물과 돌이 서로 부딪치면,

천둥이 방향을 바꾸고 빈산이 놀라는구나.

냉정하게 말하면, 《주역》은 왕필(王弼)로부터 처음으로 이전 학설을 바꾸기 시작했는데, 이는 훗날 송학(宋學)의 맹아가 되었다. 송대 학자들은 《효경(孝經)》은 공격하지 않았는데, 그 의미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송대 학자들 간의 논쟁은 고문과 금문의 자구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이는 역시 전체적인 내용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잠시 옆으로 제쳐놓고 논하지 않겠다. 《상서(尙書)》ㆍ《춘추삼전(春秋三傳)》ㆍ《삼례(三禮)》ㆍ《모시(毛詩)》ㆍ《이아(爾雅)》 등의 주석은 모두 문자의 고의(古義)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단코 송대의 학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논어》ㆍ《맹자》의 경우는 송대 학자들이 일평생의 정력을 다해 글자를 따지고 문장을 해석한 것이라 결단코 한대 학자들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한대 학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연원을 밝힘에 있어 근거가 있다. 반면 송대 학자들은 심득(心得)을 제창하기 때문에 연구를 함에 깊이가 있다. 한대학자들은 간혹 옛 학설에 집착하거나 지나치게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반면, 송대 학자들은 약간 주관적이고 억측이 있지만, 경문(經文)을 고치는 일에 용감하다. 따라서 한대학자와 송대 학자간의 공과득실을 따져보면 또한 거의 비슷하다. 다만 한대 학자들의 학문은 고대의 전적을 연구하고 살펴보지 않으면 한 마디도 할 수 없고, 송대 학자들의 학문은 누구나 공리공담할 수 있다. 그 가운데에 난초와 쑥이 함께 자라듯이 군자와 소인이 함께 섞여 있어 진실로 사람의 마음을 모두 흡족 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로 인해 비웃음을 당하게 되었다.

이것 역시 꾸며낸 말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근거 없이 지어낸 것은 아니다.

朱子穎運使言. 守泰安日, 聞有士人至岱嶽深處, 忽人語出石壁中, 曰: “何處經香, 豈有轉世人來耶?” 剨然震響, 石壁中開, 貝闕瓊樓, 湧現峯頂. 有耆儒冠帶下迎. 士人駭愕, 問: “此何地?” 曰: “此經香閣也.” 士人叩經香之義, 曰: “其說長矣, 請坐講之. 昔尼山刪定, 垂數萬年, 大義微言, 遞相授受. 漢代諸儒, 去古未遠, 訓詁箋註, 類能窺先聖之心, 又淳朴未漓, 無植黨爭名之習. 惟各傳師說, 篤溯淵源. 沿及有唐, 斯文未改. 迨乎北宋, 勒爲註疏十三部, 先聖嘉焉. 諸大儒慮新說日興, 漸成絶學, 建是閣以貯之. 中爲初本, 以五色玉爲函, 尊聖敎也. 配以歷代官刊之本, 以白玉爲函, 昭帝王表章之功也, 皆南面. 左右則各家私刊之本, 每一部成, 必取初印精好者, 按次時代, 庋置斯閣. 以蒼玉爲函, 獎汲古之勤也. 皆東西面, 並以珊瑚爲簽, 黃金作鎖鑰. 東西兩廡, 以沉檀爲几, 錦繡爲茵. 諸大儒之神, 歲一來視, 相與列坐於斯閣. 後三楹則唐以前諸儒經義, 帙以纂組, 收爲一庫. 自是以外, 雖著述等身, 聲華蓋代, 總聽其自貯名山, 不得入此門一步焉, 先聖之志也. 諸書至子刻午刻, 一字一句, 皆發濃香, 故題曰經香. 蓋一元斡運, 二氣氤氳, 陰起午中, 陽生子半, 聖人之心, 與天地通. 諸大儒闡發聖人之理, 其精奧亦與天地通, 故相感也. 然必傳是學者始聞之, 他人則否. 世儒於此十三部, 或焚膏繼晷, 鑽仰終身, 或鍛煉苛求, 百端掊擊, 亦各因其性識之所根耳. 君四世前爲刻工, 曾手刊《周禮》半部, 故餘香尙在, 吾得以知君之來.” 因引使周覽閣廡, 款以茗果. 送別曰: “君善自愛, 此地不易至也.” 士人回顧, 惟萬峰揷天, 杳無人跡. 案此事荒誕, 殆尊漢學者之寓言. 夫漢儒以訓詁專門, 宋儒以義理相尙. 似漢學粗而宋學精, 然不明訓詁, 義理何由而知? 槪用詆誹, 視猶土苴, 未免旣成大輅, 追斥椎輪, 得濟迷川, 遽焚寶筏. 於是攻宋儒者又紛紛而起. 故余撰《四庫全書ㆍ詩部總敘》 有曰: 宋儒之攻漢儒, 非爲說經起見也, 特求勝於漢儒而已. 後人之攻宋儒, 亦非爲說經起見也, 特不平宋儒之詆漢儒而已. 韋蘇州詩曰: “水性自雲靜, 石中亦無聲. 如何兩相激, 雷轉空山驚?” 此之謂矣. 平心而論, 《易》自王弼始變舊說, 爲宋學之萌芽. 宋儒不攻《孝經》, 詞義明顯. 宋儒所爭, 祗今文古文字句, 亦無關宏旨, 均姑置弗議. 至《尙書》ㆍ《三禮》ㆍ《三傳》ㆍ《毛詩》ㆍ《爾雅》諸注疏, 皆根據古義, 斷非宋儒所能. 《論語》ㆍ《孟子》, 宋儒積一生精力, 字斟句酌, 亦斷非漢儒所及. 蓋漢儒重師傳, 淵源有自. 宋儒尙心悟, 硏索易深. 漢儒或執舊文, 過於信傳, 宋儒或憑臆斷, 勇於改經. 計其得失, 亦復相當. 惟漢儒之學, 非讀書稽古, 不能下一語, 宋儒之學, 則人人皆可以空談. 其間蘭艾同生, 誠有不盡饜人心者, 是嗤點之所自來. 此種虛搆之詞, 亦非無因而作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