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우챠오를 추억하며

쉬디산許地山

베이징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루거우챠오蘆溝橋를 갔던 게 1922년 봄으로 기억한다. 동료인 류자오후이柳兆惠 선생과 함께 이른 아침 광안먼廣安門에서 대로를 따라 걷다가 다징춘大井村을 지났을 때는 이미 10시가 넘었다. 이징안義井庵의 천수관음을 참배하고 대비각大悲閣 밖에서 잠시 쉬었다. 그 보살상은 세 길 남짓한 높이에 금동으로 주조한 것으로 체상體相은 훌륭한데, 건물은 기울어 퇴락하고 향불 연기도 사그라들었다. 아마도 기원 드렸던 사람들이 재물을 바랐지만 손해를 보고 아들을 바랐지만 상처를 하는 등의 일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원래 이번에 길을 나선 것은 또 다른 동불銅佛을 찾아 나서기 위함이었다. 완핑 성宛平城 사람이 나에게 그쪽 인근에서 고묘古廟가 무너졌는데 그 안에 연대가 아주 오래된 많은 불상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적인 흥미가 일어 부득불 찾아 나섰던 것이다. 다징춘의 천수관음은 기록에 있는 터라 가는 김에 보러 온 것이다.

이징안義井庵의 관음상

다징춘을 나서자 관도官道 위에 패방牌坊 하나가 우뚝 서 있는데, 건륭 40년(1775년)에 세워진 것이었다. 패방의 동쪽 편액에는 “경환동궤經環同軌”라 쓰여져 있고, 서쪽 면에는 “탕평귀극蕩平歸極”이라 쓰여져 있었다. 패방을 세운 원래 의도는 알 길이 없는데, 향후 개선문으로 쓴다면 아주 적당할 듯했다.

봄철의 베이징 교외는 큰 바람만 없다면 놀러 다니기에 아주 매력적인 곳이다. 나뭇가지 위나 흙 담장 가의 달팽이는 은색의 끈끈한 자욱을 남기고 있다. 이것들이 천천히 이동하는 것은 차라리 자신들의 껍데기 이외에 어떤 우주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버드나무 연못가의 어린 오리는 담황색의 깃털을 입고 신록의 새로 나온 잎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헤엄을 칠 때는 작은 파도가 일렁이며 동심원 하나하나를 이루는데, 이 모두가 생기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걷다가 힘들어 길가 묘원墓園에서 잠시 쉬었다. 류 선생은 아주 아름다운 탑 위에 서서 나에게 사진 한 장 찍어달라고 했다. 느릅나무 그늘 아래서 우리는 길 위의 작렬하는 태양을 느끼지 못했다. 고적한 묘원에는 무슨 이름난 꽃 같은 건 없지만, 오히려 들꽃이 아주 장하게 자라고 있었다. 바삐 날아다니는 꿀벌은 양쪽 다리에 약간의 꽃가루를 묻히고서도 여전히 채집을 하고 있고, 개미는 떨어져 나간 메뚜기 뒷다리를 얻기 위해 마른 등나무 뿌리 위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거미줄에 떨어진 작은 나비는 한쪽 날개는 이미 효용 가치를 잃었지만 여전히 버둥대고 있다. 이것 역시 생기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긴 해도 의미는 약간 달랐다.

한담을 나누다 보니 이미 해는 중천에 떴고, 저 앞의 완핑 성宛平城도 눈앞에 나타났다. 완핑 성은 루거우챠오의 동쪽에 있는데 명 숭정 10년에는 이름을 ‘궁베이 성拱北城’이라 하였다. 둘레는 2리에 못 미치고, 두 개의 성문만 있는데, 북문은 순즈먼順治門, 남문은 융창먼永昌門이다. 청대에는 궁베이를 궁지拱極라 바꾸고, 융창먼은 웨이옌먼威嚴門이라 하였다. 남문 밖이 곧 루거우챠오蘆溝橋이다. 궁베이 성은 본래 현성縣城이 아니었는데, 몇 년 전 베이핑에 의해 시로 바뀌면서 현아縣衙가 그곳으로 옮겨갔기에 규모가 극히 빈약한 것이다. 예전에 여기는 위성衛城이라 무관이 항상 주둔하며 지키던 것이 이제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아주 중요한 군사 요충이었던 것이다.

루거우챠오 쪽에서 바라본 완핑 성

우리는 낙타 무리를 따라 순즈먼으로 들어갔다. 멀지 않은 앞쪽에 융창먼이 보였다. 대로 양 옆은 대부분 황무지이다. 예정 된 곳을 탐방하니 과연 방대한 동불銅佛의 머리와 동상의 남은 몸체가 현립 광동학교의 땅바닥 위에 가로뉘어져 있었다. 궁베이 성 안에는 원래 관인안觀音庵과 싱룽쓰興隆寺가 있었고, 싱룽쓰 안에는 이미 근거를 따질 수 없게 된 광츠쓰廣慈寺의 유물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데, 그 동상이 어느 절에 속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우리는 한번 쓰다듬고는 루거우챠오 앞의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완핑의 현아가 궁베이 성으로 옮겨온 뒤 루거우챠오는 현성의 번화한 거리가 되었다. 다리 북쪽은 상점과 민가가 아주 많은데, 예전에 중원의 몇 개의 성에서 베이징으로 들어오는 대로의 규모를 아직도 보존하고 있었다. 다리 위의 비가 있는 정자는 비록 오래되고 파괴됐지만 여전히 우뚝 서 있다. 요 몇 년 사이 내전이 일어난 이래로 루거우챠오는 더더욱 군마가 왕래하는 요충지가 되어버렸다. 창신뎬長辛店 전역戰役의 인상까지 더해 부근의 주민들은 모두 근대 전쟁의 대체적인 상황을 알게 되었다. 어린아이까지도 비행기와 대포, 기관총 등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정도이다. 곳곳의 담장 위에는 표어가 붙어 있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색깔과 양에 있어서 약을 파는 광고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창을 밀어 여니 융딩허永定河의 탁한 물이 드문드문한 나무들 사이를 꿰뚫고 동남쪽으로 흘렀다. 문득 천가오陳高의 시가 떠올랐다.

루거우챠오 서쪽은 수레와 말이 많고 蘆溝橋西車馬多,
산마루 해는 맑은 물결을 비추고 山頭白日照淸派.
양탄자 같은 갈대밭에도 강남의 아낙 있어 毡蘆亦有江南婦,
금나라 군인의 출정가를 근심스럽게 듣누나. 愁聽金人出塞歌.

맑은 물결은 보이지 않고 탁한 물이 조수를 이루는 것이 기록과 사실이 차이가 나긴 해도, 옛날과 지금이 다른 것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다리 아래 아집정雅集亭의 풍경과 금나라 사람에게 약탈당한 아낙네를 상상하면서 이곳의 정경을 지나노라면 감개가 일지 않을 수 없다.

융딩허의 탁한 물

루거우챠오 위에서 지나쳐갔던 슬프고 한스럽고 울고 웃는 사적이 어찌 금나라 사람에게 약탈당한 강남의 아낙네에 그치겠는가? 애석한 것은 다리 난간 위에 쭈그려 앉은 돌 사자 하나하나가 이빨을 드러낸 채 성이 나서 혀가 굳은 채 말이 없고, 약간의 자취를 남긴 역사적 사실들이 발굽에 채인 먼지를 따라 흩어지지 않으면 바퀴 자국에 눌려 스러지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나는 또 세상에서 가장 공덕이 많은 것이 다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자연의 격절을 연결시키고, 사람들을 강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게 해준다. 다리 위로 지나가는 것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근본적으로 다리와는 무관하다. 하물며 그 위로 지나가는 것은 긴 여정 가운데 작은 부분에 불과할진대, 다리로서는 어느 것이 슬프고 한스럽고 울고 웃는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다리는 역사를 기록할 필요가 없지만 도리어 역사는 다리를 기록한다.

루거우챠오의 사자 상

루거우챠오의 원래 이름은 광리챠오廣利橋인데, 금 대정大定 27년에 처음 세워졌고, 명창明昌 2년(1189년에서 1912년)까지 축조되었다. 이 다리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마르코 폴로가 기술했기 때문이다. 마르코 폴로는 ‘풀리상긴’라고 기록했지만, 유럽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마르코 폴로 다리’라 불러 오히려 기록한 이가 쌍간허桑乾河 윗길의 커다란 다리라는 원래의 뜻을 잃어버렸다. 중국인들은 돌다리 만드는 데 뛰어났는데, 건축물 가운데 다리와 탑이 비교적 장구하게 보존할 수 있다. 중국의 큰 돌다리마다 사람들은 그 귀신같은 솜씨에 찬탄을 금치 못하는데, 루거우챠오의 위대함은 저 유명한 취안저우泉州의 뤄양챠오洛陽橋, 장저우漳州의 후두챠오虎渡橋와는 약같 다른 점이 있다. 공정만 놓고 보자면, 루거우챠오는 저 두 다리의 웅장함이 없지만, 사적이라는 측면에서는 여러 차례 민족의 안위와 연계되어 있다. 설사 이 다리가 철거되더라도 루거우챠오가 남긴 기억은 중국인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7·7 사변이 일어난 뒤에는 사람들이 더욱더 그렇게 느꼈다. 당시 나는 일본군이 구베이커우古北口를 통해 베이징에 들어올 거라 생각했을 뿐 베이징으로부터 이 유명한 다리를 넘어 중원을 침략해 불길이 내가 그때 서 있던 곳에서 일어나리라고는 결단코 생각을 못했다.

완핑 성 안에는 이른바 ‘7·7 사변’을 기념하여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中國人民抗日戰爭紀念館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 ‘루거우챠오의 깨어난 사자盧溝獅醒’ 상을 조성해 놓았다.

식당에서 되는 대로 사오빙燒餠을 먹고 나와서는 다리 위에서 바라보았다. 철교가 저 멀리에 평행선을 긋듯 걸려 있었다. 석탄을 등에 진 낙타 무리가 방울 소리에 맞춰 가지런히 다리 위를 느릿느릿 걸었다. 소상인과 농민들이 조각이 새겨진 난간 아래서 교역을 하면서 아주 예의바르게 흥정을 했다. 아낙네들은 다리 아래서 빨래를 하며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은 비록 나라의 형세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군대의 선전원들 입을 통해 적들이 이미 문 앞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원래부터 스파이가 되어 간 것은 아니었는데, 다리 위에서 길 가는 사람들에게 몇 번씩이나 말을 물었기 때문에 경찰관의 주의를 끌었다. 우리 자신도 우스웠다. 나는 일 보는 관리의 주의를 끌었다는 사실로 인해 기뻤다. 그들은 시시각각 경계하면서 경비를 서고 다리를 건너 스저산實柘山을 바라보았다. 짙푸른 산색은 해가 얼마나 기울었는지 가리켜주었다. 자갈이 깔린 들판 위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다가 문득 저녁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걸 느꼈다.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여기서 묵어야 한다. ‘루거우의 새벽달蘆溝曉月’은 유명하다. 원래는 이 아름다운 경치를 음미하기 위해 하룻밤을 묵어가는 것도 가치가 있긴 하지만, 나는 새벽바람과 지는 달 같은 경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달은 어두운 밤에 드러나는 달빛인 것이다. 새벽달은 죽어가는 빛으로 아주 처량하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자.

‘루거우의 새벽달蘆溝曉月’ 비

우리는 원래 왔던 길로 가지 않고 궁베이 성 밖의 갈림길에 있었다. 류 선생은 예전의 천변을 따라 북으로 하이뎬海甸으로 돌아갔다. 나는 돌 몇 개를 수습해 바리좡八里莊 쪽 길을 걸어갔다. 푸청먼阜城門으로 들어가니 멀리 베이하이北海의 백탑이 이미 잘려진 그림자가 되어 은이 흩뿌려진 어두운 푸른 종이 위에 붙여져 있었다.

(이상은 쉬디산許地山의 『잡감집』(1946년 11월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출판)에서 가려 뽑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