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대소설예술기법 23 망중투한법忙中偸閑法

망중투한법忙中偸閑法

【정의】

‘망중투한법’은 바쁜 가운데 몰래 한가로움을 맛본다는 뜻이다. 모든 사물에는 긴장과 이완이 갈마들게 되어 있다. 소설 작품 역시 마찬가지로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여유롭고 느긋한 장면들이 겹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과 연관해 장주포張竹坡는 《금병매독법》에서 “한참 바쁠 때 고의로 한가한 필치로 쓴 것百忙中故作消閒之筆”이라 하였다. 여기서 “고의로”라고 한 것은 “이야기꾼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중요한 대목에서 짐짓 잠시 이야기를 멈추어 청중들로 하여금 조바심이 나게 만드는 것賣關子”을 말한다. 이렇듯 템포를 조절함으로써 작자는 작품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인물 묘사와 줄거리의 전개를 좀더 심화할 수 있게 된다.

【실례】

《수호전》에서 우쑹武松이 “위안양러우를 피로 물들이는血濺鴛鴦樓” 대목은 바로 ‘망중투한법’을 적절하게 적용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복수심에 불타오른 우쑹은 페이윈푸飛雲浦에서 장 도감을 비롯한 네 명을 죽이기 위해 멍저우孟州 성에 다시 돌아간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은 마부가 한가롭게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옷을 벗고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하는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마부는 문간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이 어른이 금방 누웠다. 네 놈이 내 옷을 훔치기는 아직 이르다.”는 말을 한다. 목전에 닥친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마부의 이 말에 독자들은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된다. 마부를 죽인 우쑹이 집안으로 들어가니 부엌에서는 밤늦도록 이어지는 술시중에 짜증이 난 여종들이 투덜대고 있었다. 그리고 우쑹에 의해 살해되는 네 사람 역시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 한 채 우쑹을 맞이한다. 그때까지 “방 한가운데 벌여 놓은 술상은 거두지 않을 채 그대로 있었다.”

한 밤중에 피바람을 일으킨 일대 사건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우쑹의 시각과 심드렁한 일상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마부와 여종들, 그리고 살해당하는 네 사람의 시각으로 교차하며 묘사되고 있다. 순식간에 7명의 사람들을 황천길로 보내버린 우쑹은 “그리고 나서 보니 상 위에 술과 고기가 있기에 잔을 들어 단모금에 들이켰다. 이렇게 연거푸 네댓 잔을 마시고는 시체에서 옷자락을 베내어 피를 묻혀 가지고 흰 벽에다 ‘살인자는 호랑이를 때려잡은 우쑹이다殺人者打虎武松也’라고 크게 써 놓았다.” 이 대목에 이르게 되면 극도로 긴장되었던 국면이 일시에 풀어져 한가로움의 극치를 달리게 되는 것이다.

【예문】

장 도감은 장 단련사가 구슬리고 청탁하는 데 넘어가서 쟝먼선蔣門神의 원수를 갚아 주려고 우쑹武松을 죽이려 꾀하였다가 그 네 사람이 도리어 페이윈푸飛雲浦에서 우쑹한테 죽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때 다리 위에서 머뭇거리던 우쑹은 생각하면 할수록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다.

‘장 도감을 죽이지 않고서야 이 원한을 어찌 풀소냐!’

그는 시체 옆으로 내려가서 요도를 끌러내어 좋은 것으로 골라 차고 박도를 골라잡자 도로 멍저우孟州 성으로 들어갔다. 성 안에 들어서니 벌써 어스름녘이라 집집마다 문을 걸어 닫고 빗장을 질렀다.

우쑹이 곧장 성 안에 들어가 장 도감네 뒤 화원 담장 밖에 이르러 본즉 그곳은 마구간이었다. 마구간 옆에 엎드려 동정을 살펴보니 마부는 아직 내아에서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참 지키고 있노라니 일각문이 삐그덕하고 열리면서 한 마부가 등롱을 들고 나온다. 안에서는 이어 누가 문을 닫아거는 모양이다. 우쑹이 어둠 속에 숨어서 들으니 어느덧 초경 4점을 알리는 경점 소리가 들려왔다. 마부는 여물을 버무려 주고 등롱을 걸어 놓은 다음 침상에 이불을 펴더니 곧 옷을 벗고 누워서 자려고 하였다. 우쑹이 문 앞에 바싹 붙어서면서 그만 문을 다쳐 소리가 나니 마부는 투덜거렸다.

“이 어른이 금방 누웠다. 네 놈이 내 옷을 훔치기는 아직 이르다.”

……

이때 달빛이 환하였다. 우쑹은 담장 안으로 훌쩍 뛰어내려 우선 일각문을 열고 도로 나가 담장에 기대 세웠던 문짝을 제자리로 가져다 놓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일각문을 닫고 빗장을 다 뽑아 놓았다. 그리고는 불빛이 밝은 곳으로 더듬어 간즉 그곳은 부엌인데 거기서는 두 여종이 물 끓이는 솥 옆에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진종일 시중했는데도 돌아가서 잘 생각을 않고 또 차를 가려오라지 않나. 그 두 손님은 염치가 없어도 분수가 있지. 그토록 취하고도 돌아가 쉬지 않고 지껄이기만 한다니까!”

그들이 이렇게 원망하며 종알거리고 있는데, 우쑹은 한 옆에 박도를 세워 놓고 허리에서 그 피묻은 칼을 뽑아들고 문을 버쩍 밀고 들어가 먼저 한 여종의 고수머리를 거머쥐고 단칼에 찔러 죽였다.

……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우쑹은 가슴 속에 치솟는 울화와 복수의 불길을 누를 수 없었다. 그는 오른손에 칼을 들고 다섯 손가락을 쫙 편 왼손을 뻗치며 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네댓 자루의 휘황한 화촉과 비쳐드는 달빛에 방 안은 대낮같이 밝은데 방 한가운데 벌여 놓은 술상은 거두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쟝먼선은 우쑹을 보자 혼비백산하여 오장육부가 금시 하늘로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가 급히 피하려는 순간 어느 새 우쑹의 손에 들린 칼이 번쩍 하더니 그 자의 면상과 그 자가 앉았던 의자까지 함께 찍어 넘겼다. 이어 몸을 홱 돌린 우쑹이 또 내빼려고 서두르는 장 도감을 찍으니 그는 귀 밑에서부터 모가지까지 베어져 마룻바닥에 풀썩 고꾸라진다. 넘어진 그 두 놈은 그냥 버둥거렸다. 장 단련사만은 그래도 무관 출신이라 비록 취하기는 했으나 아직 힘을 쓸 수 있었는데 두 놈이 칼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자 자기도 죽음을 면치 못할 줄 알고 의자를 들어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느 새 우쑹이 의자 다리를 덥석 받아 쥐고 냅다 미니 취중이 아니라 맑은 정신에도 그의 힘을 당해낼 수 없는 터이라 장 단련사는 뒤로 벌렁 자빠졌다. 그 순간에 우쑹은 와락 달려들어 그 자의 대가리를 내리찍었다. 쟝먼선이 워낙 기운을 쓰던 놈인지라 기를 쓰며 일어나는 것을 우쑹은 왼발로 걷어차서 거꾸러뜨리고 목을 잘랐다. 이어 우쑹은 장 도감의 머리도 잘랐다. 그리고 나서 보니 상 위에 술과 고기가 있기에 잔을 들어 단모금에 들이켰다. 이렇게 연거푸 네댓 잔을 마시고는 시체에서 옷자락을 베내어 피를 묻혀 가지고 흰 벽에다 ‘살인자는 호랑이를 때려잡은 우쑹이다殺人者打虎武松也’라고 크게 써 놓았다.( 《수호전》 제31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