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난성 보이차의 길 – 차향을 전하는 길에 거짓을 담지 마시라
지금 우리는 중국의 백성들이 오래도록 살아온 살림집들을 찾아 여행을 하고 있다. 집이라고 하면 ‘집 안’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집의 바로 바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길이다. 대문은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지만, 길을 나서자면 길로 들어서는 입구가 된다.
우리나라 건축법에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을 대지라고 하는데, 대지는 폭 2m 이상의 길에 접해 있어야 한다. 길에 접하지 않은 땅은 맹지盲地라 해서 불구의 땅으로 간주한다. 왜 맹지라고 할까. 길은 바로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길은 집과 집을 이어준다. 길이 넓어지면 광장이 되고, 길이 길어지면 광장과 광장, 도시와 도시, 문명과 문명을 교류하고 융합시켜 준다. 인간사회의 신경세포와 같다. 이번에는 윈난성云南省 남부 지역으로 가 보이차를 실은 마방들이 먼 길을 시작하는 곳에서 길과 집과 보이차를 음미하려고 한다.
윈난에서 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차마고도茶馬古道와 관마대도官馬大道 때문이다. 차마고도, 깊은 산 높은 차나무에서 따낸 찻잎으로 병차餠茶를 만들고 수십 마리 말로 마방馬幇을 꾸려서는 산길과 고갯길과 협곡을 건너 신비의 땅 티베트에 차를 전해주던 길이다. 차의 향기와 마방의 노고와 험로의 신비가 한데 어우러져 기억되는 길이다.
보이차는 황제에게 가는 관마대도를 따라 실려 가기도 한다. 보이차는 청나라 초기부터 황제에게 공납되었기 때문에 관마대도는 공차고도貢茶古道라고도 부른다. 이 두 갈래의 길은 전통시대 보이차의 주산지였던 6대 차산의 이우易武에서 시작해 푸얼普洱(우리말로 보이)에서 갈라진다. 푸얼로 모여든 보이차는 북북서로 북상해서 다리大理, 리장丽江, 샹거리라香格里拉를 거쳐 티베트의 라싸로 이어지는 차마고도를 타고 가든가, 북북동으로 올라가서 쿤밍昆明을 거쳐 베이징으로 가는 관마대도를 따라 먼 곳으로 전해졌다.
보이차의 출발점과 종착점에는 상반되는 요소가 있어 흥미롭다. 보이차가 출발할 때에는 생차인데 도착하고 나서 창고에서 시간을 지내다 보면 숙차가 되기도 한다. 관마대도나 차마고도나 몇 개월씩 걸리기 때문에 말 등에 흐르는 땀이나 빗물이 스며들면서 자연스레 발효가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이차 산지에서는 숙차를 제조한 적도, 숙차라는 말을 만든 적도 없었다. 지금도 차산에서 찻잎을 따는 그들은 일상에서 그저 생차를 마실 뿐이다. 그러나 라싸나 베이징의 창고에는 자연스럽게 발효된 차가 쌓여 있었다. 지금처럼 억지로 발효시킨 것은 아니지만.
또 한 가지, 관마대도는 ‘황제의 손길’이 닿은 백성의 살림집 한 채에서 출발해 황제가 사는 곳에 종착했으니 이 또한 흥미로운 일이다. 1894년 청나라 광서제가 차순래車順來라고 하는 관리가 공납한 보이차를 맛보고는 “탕이 청순하고, 맛이 진하고, 뒷맛이 달고, 회감이 길어 서품瑞品”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 증표로 서공천조瑞贡天朝(위 사진)라는 편액을 하사한 것이다. 중국 공차 역사상 유일무이한 일이었다. 이 편액은 차순래의 살림집 당옥과 대문 위에 걸려 있었으니, 크게 과장해서 이 집에서 관마대도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차순래 고택(아래 사진)은 윈난 남부 시솽반나의 멍라현 이우향勐腊县 易武乡에 있다. 이우는 전통시대 6대 차산의 중심지였고 지금도 좋은 고수차가 생산되는 곳이다. 차순래가 하사받은 편액에는 하나의 특권이 주어졌다. 황제의 친필을 걸기 위해 백성의 민가에는 금지되어 있던 단청을 하도록 한 것이다. 단청은 처마 밑 서까래 등의 목재에 칠을 해서 부식을 막는 동시에 화려한 장식 효과 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고 중국에서도 황궁과 일부 왕부, 그리고 사찰에만 허용되었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궁궐과 같은 유적지나 사찰에서 단청을 자주 봤기 때문에 옛날에도 흔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전통시대에는 백성들의 집에는 금지된 고급 장식이었다.
차순래 고택의 단청은 이미 100년이 훨씬 넘어 색도 많이 바랬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봐야만 희미하게 보인다. 20세기에는 보이차를 만들던 6대 차산의 산골 마을이 빈곤에 허덕였기 때문에 단청을 보수할 여력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황제가 허락한 단청의 흔적은 선명하다.
고택은 정남향으로 자리 잡은 2층 삼합원이다. 가운데 정방과 양옆으로 이어진 상방이 모두 2층인데, 1층은 주거용이고 2층은 저장이나 작업공간이다. 정방에 황제의 편액이 걸려 있고, 그 양쪽으로는 주인장의 침실이 있다. 대문은 동쪽으로 나 있다. 전형적인 남방 삼합원이지만 동네의 다른 집에 비해 격식을 갖춘 집이다.
단청은 정방과 문루에 남아 있다. 100년 넘는 세월을 견뎌온 낡은 단청, 그 아래에서 차순래 5세손 차지신車智新과 그의 가족들이 보이차 만드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그동안 쌓여온 보이차 이야기를 더듬어 느낄 수 있다.
보이차는 기원 3세기 초 야생의 교목에서 채엽하는 약용으로 시작되었다. 점차 음용으로 변하면서 채엽을 쉽게 하기 위해 차나무를 밀식 재배하는 관목형 다원으로 변해왔다. 당송시대에는 차산업이 크게 발달해서 이우는 이윤성利潤城이란 별칭이 생기기도 했으니 첫 번째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원대에는 전란과 함께 질병이 심하게 돌아 다원이 황폐해졌다가, 명말청초 인구가 과밀했던 인근의 스핑石屛 사람들이 들어와 다원을 복구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우나 이방에는 번듯한 합원식 살림집은 물론 상인회관도 등장했고, 청나라 옹정제 시대에는 보이차를 공납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에는 이우에서 시작해 이방, 멍왕을 거쳐 쓰마오까지 가는, 전장 240여 km의 흙길을 대대적으로 수리해 폭 2∼3m로 청석판靑石板을 깔기도 했다. 청석 차마고도(위 사진)는 현재 이방倚邦에 잘 남아 있다. 이방은 보이차 역사에서 명성이 높아 보이차 애호가들이 지금도 찾아가곤 하는데,마을 중심을 가로지르는 긴 청석로와 길 양옆에 늘어선 전통적인 가로주택들이 아주 고풍스럽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우가 이방을 제치고 올라섰다. 그 계기가 바로 황제의 친필 편액이었다. 당시 황제의 편액은 가문의 영광을 넘어서서 차산업의 판도를 흔들 정도였다. 그때까지 마방들은 이방에서 보이차를 매집했으나 편액 하사 이후 산길로만 50km를 더 들어가야 하는 이우까지 찾아간 것이다.
19세기 후반 청조가 외세에 흔들리고 민란이 빈발해 보이차의 유통이 크게 위축되었고, 20세기 들어서면서 공납도 중단되었다. 20세기 전반은 자가소비 이외의 생산은 대폭 축소된 일종의 암흑기였다.
1949년 신중국이 들어선 다음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서 생산 효율성을 내세워 수백 년 된 고차수를 마구 베어내는 바람에 전통시대의 6대 차산은 옛날의 영화로만 물러나 앉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윈난이 아닌 광둥과 홍콩, 타이완의 상인들을 통해 보이차가 되살아났다. 지금은 중국의 대형 차창들이 주도권을 가져가 제3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지만, 전통시대의 6대 차산은 고차수 보이차로 특화되어 남아 있다.
보이차 애호가라면 마방이 보이차를 싣고 출발했던 이우의 차순래 고택을 찾아갈 만하다. 지금은 5세손 차지신이 차순호車順號란 원래의 이름으로 고차수 보이차를 만들고 있다. 누가 찾아오든 보이차 향기보다 진하게 반기면서 선한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보이차를 한잔 내줄 것이다. 진품 보이차를 빛내주는 황제의 편액을 감상하고, 단청의 흔적을 찾아 100년 세월을 음미한다면 최고의 보이차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차순래 고택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에 보이차가 전해져 온 길을 되짚어보면 유쾌하지는 않다. 전통시대에 차순호 본가에서 출발한 보이차는 위엄의 길을 걸어 황제에게 전해지거나 문명교류의 길을 따라 티베트에 전해졌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전해진 보이차는 너저분한 거짓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 차 역사에서 보이차는 10대 명차에 한 번도 낀 적이 없었다. 20세기 후반에도 광둥, 홍콩 등지에서 보이차는 값싼 차로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서공천조 편액은 품차의 결과가 아니라 황제가 가장 먼 곳까지 편액을 보내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동시에 변경의 사정을 탐지하는 정치적인 조치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1960년 베이징에서 자금성 유물을 조사하다가 청나라 말에 공납된 보이차가 원형대로 발견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었다. 이때 값싼 윈난 보이차를 가져다가 광둥의 습기 많은 창고에 쌓아두었던 일부 차상들이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광둥의 습한 창고에서 썩어버린(또는 강제로 발효된) 값싼 보이차에 자금성의 신비한 보이차 이야기를 덧씌운 것이다.
보이차는 다시 시장에서 관심을 끌기 시작했지만, 수익은 보이차 생산자가 아니라 광둥 상인들의 몫이었다. 그러자 윈난 멍하이 차창의 연구원들이 1973년 광둥성에 가서 ‘억지로 발효된 보이차’를 배워 오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광둥성만큼 습기가 많지 않은 윈난에서는 광둥의 습창방식이 먹혀들지 않았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숙차 제조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조수악퇴潮水渥堆, 즉 두엄 쌓기와 같은 단기 강제발효 방법이 개발된 것이다. 농약과 비료를 주고 대량으로 생산된 재배종 찻잎을 가져다가 물을 뿌리고 가마니로 덮은 다음 두엄을 뿌려 빠른 시간 안에 대량으로 숙차를 만들어낸 것이다.
1974년부터 멍하이 차창에서 시작하여 인공발효 숙차를 대량 생산해오면서 우리가 보이차의 전부라고 잘못 알았던 숙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원래의 보이차는 가려지고 강제발효 숙차가 원래의 보이차인 것으로 오인되었다. 그래도 21세기 초까지 시장의 반응은 뜨거운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러자 2005년 윈난의 대형 차창들이 연합하여 대대적인 마케팅 이벤트를 열었다. 말 100마리에 5톤의 숙차를 싣고 푸얼에서 베이징까지 마방의 행렬을 재현한 것이다. 이것이 CCTV를 통해 전국에 반복 보도되면서 마케팅은 성공했고, 숙차는 국내외 시장에서 상승하기 시작했다.
홍콩과 타이완의 영악한 상인들이 싸구려 숙차를 ‘신비한 보이차’로 이미지만 재포장해서 팔았다고 해도 여기까지는 중국의 사정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에게 전해지는 과정이었다.
한국에서는 차마고도라는 신비한 이미지에 고가 마케팅을 결합시켜 수입원가에 비해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판매한 것이다. 우선은 가격이 거짓말이었다. 그 위에 차가 골동품이라도 되는 듯이 오래될수록 좋다, 나중에 비싼 값에 되팔 수 있다, 원하면 훗날 되사주겠다고까지 떠벌렸다. 심지어 보이차 생차는 마실 수 없는 차로 폄하하면서 썩은 숙차를 내미는 어이없는 기만까지 등장했다. 이로 인해 보이차에서 흙 냄새나 풀 썩은 냄새가 나도 원래 그런 것이고, 그것만이 좋은 차라고 속고 속이게 되었다.
홍콩, 타이완, 한국의 기만적인 상술을 알게 된 중국 본토의 상인들도 거짓의 길에 합세했다. 중국을 찾은 한국의 단체 여행객들을 끌어들여 싸구려 저질 보이차를 고가에 마구 팔아먹은 것이다. 차마고도와 관마대도를 따라 실려 갔던 보이차의 길과는 너무나도 다른 길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에 걸쳐 엉터리 숙차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한국의 보이차 애호가들이 거짓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서울의 품위 있는 보이차 찻집을 벗어나 수입상 창고로, 다시 원산지라고 하는 윈난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윈난에 도착해서는 쿤밍의 도매시장으로, 시솽반나의 보이차 생산공장을 찾아갔다. 그 다음엔 차산, 즉 찻잎 생산지를 찾아 들어갔고, 결국 이우의 차순호 고택까지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보이차의 거짓을 확인하게 되자 보이차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길을 거슬러 들어간 이들 가운데 일부는 현지 차산에서 고차수 찻잎을 직접 수매하고, 직접 병차로 만들어 소량이나마 국내 애호가들에게 전해주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보이차에서 기만의 껍질을 점차 벗겨내기 시작한 것이다.
길은 시장이고 광장이고 세계다.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이다. 사람들은 길에 나서면서 보이차를 거짓과 과장으로 포장할 수도 있고, 길에서 진실과 겸손을 얹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스마트폰이나 용광로나 조선소에도 있지만, 작은 보이차에서 그 속을 파고들어 가는 젊은이들의 손끝에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보이차가 첫걸음을 내딛는 차순호 고택에서 음미하는 ‘보이차의 길’이다.